봉합 (1)
“소협 덕분에 내 등선이 미루어졌군. 고맙네.”
진무신검의 말은 얼핏 듣기에 기묘했다.
도사라면 응당 등선이나 시해를 꿈꾸기 마련인데, 미루어졌다고 고마워할 건 뭔가?
아니, 애당초 죽게 두어야 했다는 뜻이었을까?
서문경이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진무신검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죽기 전에 구해 줘서 고맙단 말이었네.”
“말을 뭘 그리 어렵게 빙 돌려서 하십니까?”
서문경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음에 진무신검은 껄껄 웃었다.
오걸이라는 허명이 붙고 나서 늘 대접만 받다가 이렇게 당돌한 후배를 보니 옛 생각이 아른거렸다.
하물며, 조금 전 청마와 싸우면서 ‘진무신검’이나 ‘오걸’은 허명임을 깨닫지 않았던가?
“미안하네.”
진무신검이 스스럼없이 잘못을 시인했다.
그 모습을 본 서문패와 남궁명의 표정이 각기 달랐다.
“……허, 내가 본 말코도사는 모두 고개가 빳빳했는데. 과연 고수는 다른가?”
서문패는 자기 나름대로 진무신검의 기도를 재고서 감탄하였고.
“어, 어찌 진무신검 노선배께 무례를 범하는가!”
남궁명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서는, 서문경은 본래 이런 아이이니 이해해 달라고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진무신검이 보기에도 꽤 묘한 조합인지라, 가장 평범하게 보이는 주백경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각자 다른 곳에서 합류한 겐가?”
“아니요. 처음부터 함께했습니다.”
“……허어, 신기하군.”
“저도 가끔 그리 생각합니다.”
서문세가의 핏줄에 이상한 게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백경은 진무신검의 말에 공감하곤 미리 준비해 뒀던 약상자를 열었다.
“상태가 위중하니 우선은 안정을 취하시지요, 어르신.”
“어르신?”
“제가 무림인이 아니니 선배로 대접할 수 없고, 연장자로서 대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허! 허허……! 그 말이 옳군!”
평범한 노인네 취급을 받게 될 줄이야!
진무신검은 가히 수십 년 만에 순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한 가지가 심려됐다.
“혹, 여기 오다가 어린 남매를 보지 못하였는가?”
저런 중상을 입고도 어린아이들을 걱정하다니?
서문경이 내심 감탄하였다.
“명이가 그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명?”
“아, 그러고 보니 상황이 급하여 소개가 뒷전이었군요.”
서문경은 서문패와 주백경, 남궁명을 순서대로 소개했다.
그걸 끝까지 들은 진무신검이 유쾌하게 웃었다.
“이기지 못할 적을 스스로 떠나게 했다더니, 과연. 그대로 싸웠다면 서문패 대협을 제외하곤 죽음을 피치 못했을 거요.”
진무신검의 눈이 서문경에게 닿았다.
겨우 열넷이란 나이로 저런 심계를 부리는 게 가능한가?
이름을 듣지 못했다면 제갈세가의 문사로 착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감탄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서문경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굴욕이지요. 적마의 머리를 넘겨서 끝났다는 것이.”
청마를 죽이지 못하여 분한 마음을 애써 차갑게 정돈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무신검은 그 모습이 신기해서 물었다.
“청마와 악연이 있는가?”
“아직 없습니다.”
“소협의 말이 묘하군. 앞으로 쌓을 거란 말처럼 들리네.”
“그놈이 죽기 전까지는 그러겠지요.”
반드시 죽인다는 결의가 한 치의 주저 없이 나오는 목소리에서 배어 있다.
진무신검은 서문경의 눈동자를 보았다.
‘천하에서 본 누구보다 강인하구나.’
겉모습은 어릴지언정 심중에서 정한 일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행할 남자가 눈앞에 있다.
진무신검은 서문경을 슬픈 눈으로 보았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멸마척사(滅魔斥邪)의 기치를 품고서 평생을 바칠 이유가 무어인가?”
“…….”
서문경은 잠시 입술을 매만졌다.
놀라움을 그렇게 감췄다.
전생에서 마주치지 못한 오걸, 진무신검의 통찰이 이토록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을 줄이야.
‘무당산의 전대 고수라더니, 역시…….’
자칫 마음을 놓고 있다간 미주알고주알 말하게 될 것 같다.
서문경의 얼굴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대낮에 아이들을 납치하고 어딘가로 끌고 가는 사교 집단입니다. 대명의 천하를 수호하는 사내로서 어찌 가만히 두겠습니까?”
“……과연. 과연.”
진무신검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적당히 넘어가 주겠다는 미소처럼 보여, 서문경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애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얼 말인가?”
“걔들이 바른대로 말했습니다. 자기가 찌른 사람이 있다고, 가서 구해 달라고.”
“……아!”
조금 전, 주백경에게 어르신이라는 말을 들어서였을까?
진무신검은 자기도 모르게 온후한 미소를 지었다.
고강한 무공을 지닌 고수도 아니고 도학을 깨우친 노도사가 아닌, 평범한 노인처럼.
“용서해 주게.”
용서.
이 단어를 입에 담기가 얼마나 어렵던가?
진무신검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혹여, 아이들이 과거에 지은 죄가 있다면…… 알려 주게. 내가 책임지고 뉘우치게 만들어서, 다른 이에게도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할 터이니.”
“……어르신.”
그 말에 진무신검의 상처를 돌보고 있던 주백경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강호에서 처음으로 정도를 논하는 도사를 만났으니, 감회가 큰 듯했다.
하지만 서문경의 생각은 달랐다.
“애들을 품으면 청마가 또 그런 식으로 급습할지 모릅니다.”
“각오한 바일세.”
“…….”
서문경은 진무신검을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시선은 이래도, 그에게 훈계할 생각은 없었다.
군문과 도문.
완전히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자에게 이게 옳다고 한들 들어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고집이 진무신검을 절대고수로 만든 거겠지.’
뜻을 억지로 꺾느니 그냥 두는 것이 낫다.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아서 하십시오. 몸조심하시고요.”
“허허, 이해해 줘서 고맙네. 주백경이라고 했던가? 자네도 이제 됐네.”
진무신검이 주백경의 치료를 마다하고 마차로 다가갔다.
그곳엔 겁에 잔뜩 질린 어린 남매가 있었다.
“오, 오지 마세요!”
“복수할 거라면…… 저희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예요!”
얼마나 험한 곳에서 살았으면 저리 표독스러울까?
분노보다는 동정심이 들었다.
진무신검은 부드럽게 웃으며 남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무당산으로 가지 않으련?”
“……예?”
“장담컨대 너흴 서로 떼놓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을 것이야!”
“…….”
남매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진무신검을 보았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내민 손을 잡았다.
* * *
“훌륭한 어르신이었지요!”
진무신검이 떠나고 난 뒤, 주백경이 몇 번 중얼거렸다.
……그것도 자신과 서문패를 흘깃거리면서.
그게 뭔가 우습기도 해서 서문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훌륭하지만, 장수할 팔자는 아니시긴 하지.”
“조카 말이 옳아. 사람이 겸손한 맛은 있어도, 끝까지 오지랖이나 부리다가 죽겠지!”
인정(人情)이 많다는 약점을 강호에 훤히 드러내고도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고개를 끄덕인 서문패가 한 가지를 물었다.
“그래서 어찌할 거냐?”
“……?”
“휘라면 몰라도 경이 너는 저대로 두진 않을 거잖아?”
평소에 철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다른 사람의 속내를 훤히 꿰고 있다는 걸까?
서문경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뭐, 휘라면 정말 내버려 뒀겠죠. 근데 저는 말 안 듣는 고수 몇 명쯤은 참아 줄 수 있어서, 지켜보는 눈을 조금 둘 겁니다.”
“……흐음. 그 도사, 고집이 세던데.”
“명색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데 화를 내진 않겠죠.”
그 말에 서문패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말을 지지리 안 듣는 조카를 짓궂게 놀리는 미소였다.
“본가에서 왜 무림인을 배척하는지 알아?”
“……압니다.”
“오호, 왜?”
“자기 자존심은 엄청 고고하고, 말은 지지리 안 듣고, 방패나 활 다루는 법을 모르니까요.”
“그거야 가주 수업에서 듣는 이야기고. 현장에선 이렇게 말해.”
커흠, 흠.
한차례 헛기침한 서문패가 히죽 웃었다.
“X새끼들이다!”
“……뭡니까?”
난데없는 욕설에 남궁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림세가의 소가주가 듣고 있으니 자중해 달란 뜻이었으나, 서문패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남궁명에게 시선을 돌리고서 히죽거렸다.
“겉으론 정파인 척, 청빈한 척 굴어도 자기들끼리 운영하는 상단이 있고 방계 가문에서 받아먹는 게 있겠지. 대명의 법률을 어기진 않는다지만, 그게 옳은 짓인가?”
“……선배.”
“나는 네 선배 아니다. 무림인이 아니고, 나라의 공납을 떼먹는 관인 중 하나거든.”
서문패의 목소리가 한순간 서늘해졌다.
그걸 본 서문경이 남궁명의 체면을 위해 끼어들었다.
“위치가 다르다는 겁니까?”
“그래. 결국 구파일방도 큰 방파고, 오대세가도 우리 눈에선 호족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내가 그걸 왜 모르겠어?’
서문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서 아주 지긋지긋하게 보지 않았던가?
아니, 자신이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서문세가나 군문의 눈에서 무림은 언제든 딴생각을 품을지도 모를 역도였으니까.
실제로 천하가 혼란해지기 시작했을 때 무림인이 피난하던 사람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마저도 마교의 간계 중 하나였다는 게 문제지만.’
단기간에 생긴 앙금이 아니다.
적게는 수십에서 몇백 년.
천하에 무림이 생기고부터 만들어진 틈이 지금까지 이어졌고, 마교는 그걸 자연스럽게 이용했다.
‘이걸 메우는 게 무림으로 향한 이유 중 하나였는데.’
서문패의 눈초리를 보니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저대로 둘 수 없는 노릇이라.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이려는 그때였다.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문패가 남궁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남궁명은 평범한 소년 중 하나이자 남궁세가를 이루는 직계혈족에 불과했다.
소가주라는 위치를 존중할 필요 따위 없었다.
“불만 있느냐?”
“불만이요? 예, 있지요.”
남궁명은 분연히 눈을 뜨고서 서문패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저씨가 무림에 불만이 많은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경이는 그곳에 투신했지요. 왜겠습니까?”
“…….”
“아저씨나 진무신검 선배조차 홀로 대적하지 못하는 마도 고수가 천하에 있는데, 손잡지 못할 이유가 뭡니까?”
“……그건.”
“저는 천무학관에서 경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보았습니다. 동기나 학관 선배의 눈총을 받으면서 불만 없이 지냈고, 양무연이란 친구의 무공을 봐줬지요.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다가 불현듯 큰 목소리가 나왔다.
필시 평소에 품고 있던 열등감이나 열패감일 것 같아, 남궁명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하지만 서문패에게 밝히고자 하는 뜻은 분명히 밝혔다.
“적어도 대명의 법률을 어기지 않는 무림과 마교를 같은 잣대에 두었을 때, 누가 적입니까?”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서문패가 입술을 힘겹게 떼었다.
“……아니. 그걸 누가 모르겠어? 그냥 평소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저 평소 생각이 몇 년 지나지 않아 확신으로 바뀐다는 게 문제였지.’
서문경은 똑똑히 기억했다.
촌락에서 약탈하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방계 무인을.
그들의 패악질을 보고 분노했던 서문세가까지도.
그 이후 서문세가와 무림은 서로 신뢰하지 않는 상태로 오래 지냈다.
‘저 문제를 최대한 어릴 때 해결하려고 했는데, 남궁명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나중에 어린아이한테 말로 밀렸다고 짜증을 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해하지 않았는가?
서문경은 서문패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명이의 말엔 동의합니다. 관인과 무림이 힘을 합하지 못하도록 마교가 암계를 부릴지도 모르고요.”
“무슨 확신이라도 있느냐?”
“그저 지금 떠오른 전략이 그렇다는 거죠.”
“허어, 참.”
“나중에 아버지께 전해 주세요.”
“너는 어쩌게?”
그 말에 서문경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오늘 일을 널리 퍼뜨려야죠. 마교가 암계를 부리지 못하게끔, 홀로 지내던 은자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진무신검조차도 혼자 다니다가 죽을 뻔했는데 다른 오걸이나 십대고수라도 안심할 수 있겠는가?
아니, 검치처럼 그들과 비견되는 고수라도 나타나 줬으면 좋겠다.
서문경은 속으로 큰 기대를 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