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신검 (2)
“태허? 죽을 때가 됐다는 말을 참으로 어렵게 하는구나!”
청마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
공력을 무수히 소진하고 등과 옆구리를 베인 채 독에 중독됐으니, 가만히 둬도 쓰러지게 될 것이다.
진무신검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아.”
껍데기가 벗겨진 노송(老松:늙은 소나무)이 이러할까?
숨이 흐트러졌다.
폐부가 말라비틀어지는 기분이었다.
‘무림맹주의 호의를 받아들였어야 했나? 아니, 저자라면 그 가능성도 미리 점쳐 두었겠지.’
쓴웃음이 올라왔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다른 이와 함께 왔다면 그들까지 죽었을 테니까.
죽는 사람이 자신 하나면 족하다.
등선이나 시해(尸解)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살업을 쌓은 생이기에 후회는 없었다.
‘저 악의를, 악심(惡心)을 천하에서 지우고 가는 것이 마지막 숙제렷다.’
이 싸움이 마지막이라고 여기니, 흔들리던 칼끝이 멎었다.
번민이 부동심(不動心)으로 화했다.
‘본산에서 썩어 가던 때엔 온갖 걱정이 괴롭혔는데, 막상 죽음이 다가오니 이리도 후련하다니!’
그것이 우스워서 슬쩍 웃고 말았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웃고,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에 웃다가, 무심코 하늘을 보았다.
“진무신검이라는 허명보다 우자(愚者)가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구나!”
진무신검은 껄껄 웃으며 검을 쥐었다.
이에 청마가 마주 웃었다.
그는 모든 행동을 음험하게 해석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이들이 도망칠 시간을 끈 것이라면, 부질없는 짓이다. 금방 쫓아가면 될 일이니.”
“음험한 것아. 세상을 너무 무애(無愛)하게 보는 것이 아니냐?”
“……뭐?”
“지금은 날이 어둡다지만, 천하는 언젠가 밝아지는 법이다. 너 또한 해가 밝으면 터럭 하나 남기지 못하고 스러지겠지.”
“다 늙어서 허망한 꿈을 꾸는가?”
청마의 신랄한 조롱에 진무신검은 단호히 대답했다.
“허망하지 않아. 내가 여기서 죽는대도, 전혀 상관하지 않네.”
스르륵…….
진무신검은 칼끝으로 원을 그렸다.
태극(太極).
어린 시절부터 무당파 본산의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여, 아직도 깨우쳤다고 말하기 민망한 도결(道訣)이었다.
그 도결을 슬기롭게 펼친다고 하여 혜검(慧劍).
무당산은 이 검법을 태극혜검(太極慧劍)이라고 칭하니.
“자, 오너라……!”
진무신검의 전신 공력이 칼에 담겼다.
호신강기를 펼칠 여유는 없었다.
그저 적마의 목숨을 빼앗는 데만 집중하기로 하였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삿된 꿈에 취하였구나!”
청마가 흑린신편을 강하게 휘둘렀다.
수십 장이 넘는 절벽마저 무너뜨린다는 강격이 진무신검에게 쇄도했다.
그와 대적하는 진무신검은 실로 위태했다.
‘오른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군.’
등을 찔린 위치가 좋지 않았던 걸까?
오른 어깨에서 검지까지 이르는 수양명대장경이 다쳐서,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전신 발경으로 검력(劍力)을 늘리는 건 불가능.
어느새 발치가 핏물에 젖어서 불쾌한 촉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혜검은 무너지지 않는다.’
진무신검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르륵.
검으로 자그맣게 그린 원이 금세 커져서는, 흑린신편의 대력(大力)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아니,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또 그 망할 검법인가!”
인상을 찡그린 청마가 혀를 찼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극복하는 이유제강(以柔制剛).
작은 힘으로 큰 힘을 튕겨 낸다는 사량발천근도 저 검법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진무신검의 태극혜검에는 신묘한 힘이 있었다.
“이래서 먼저 죽여 두려고 했거늘……!”
쿠콰콰쾅!
흑린신편의 대력을 머금은 검강이 청마에게 되돌아가니.
고요하고 어둡던 산길에 온갖 흙먼지와 굉음이 휘몰아쳤다.
진무신검은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으로 청마를 노려보았다.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한 발을 전진하며 태극의 검을 떨쳤다.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 고통스러우나 참는다.
흑린신편에 엮인 검은색 비늘들.
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눈으로 직시하여 역으로 원을 그렸다.
쿠구구……!
태극의 일원이 두 갈래로 갈라져 서는 음과 양.
두 개의 파도가 흑린신편이 흩뿌리는 마기를 끌어안고서 회천한다.
마기마저 태극의 이치에 따라서 역으로 되돌린다?
도가가 아니라, 패자(霸者)의 무공처럼 보일 지경이다.
청마는 얼굴에서 비열한 미소를 지웠다.
진무신검의 심기를 어지럽히기 위한 위장을 벗어던지고서 순수하게 감탄했다.
“피가 발치에 웅덩이지고, 독에 정신이 갉아먹혔을지언정 정도(正道)를 지키려는 도사라…… 훌륭한 이야기야. 감탄스러운 광경이지.”
청마가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흑린신편을 여러 차례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 위에서 아래.
방향조차 불분명한 공세를 퍼부었다.
그에 따라 진무신검의 신형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출혈은 멈추지 않고 독은 더더욱 빠르게 흐른다.
그의 입가에서 정신을 다잡기 위한 도호가 흘러나온다.
“……원시안진.”
모든 것이 원활하고 평안하길.
젊은 도사가 품은 염원이었다.
그걸 위해 도학에 매진하라는 사백의 말을 뿌리치고 강호에 나왔다.
그 끝이 거악(巨惡)과 홀로 맞서다가 죽는 것이라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청마가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지 않았다.
“좋은 이야기지만 진부해.”
“…….”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리라.
그리 생각했던 것이 청마가 뒤이은 말에 깨졌다.
“당신의 등을 찌른 손길이 익숙하다 생각지 않나? 혹, 이른 나이에 살업을 저지른 아이라면 어떤가?”
“…….”
“네가 살린 아이들이 독으로 사람을 죽이고 금전을 갈취하는 악한이라면?”
청마의 혀가 뱀처럼 매끄러웠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지면 태극혜검의 칼끝 또한 흔들린다.
그 틈이 생기면 목숨을 빼앗기겠지.
‘귓가에 온갖 유혹을 속삭인다는 마군(魔軍)이 이런 것일까?’
청마의 속내가 뻔히 보여서, 진무신검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목숨을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네 만족까지 채우고 싶었느냐? 번민하다가 추하게 죽길 바라면서?”
“믿지 못하겠느냐? 네 옆구리의 독이 극독이 아니었던 이유는 그 아이들이 만들었기……”
“무엇이든 날 어지럽히진 못한다.”
진무신검은 청마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서 똑똑히 말했다.
“내 마음속엔 태극의 도가 있으며, 머릿속엔 무당산의 가르침이 있다.”
늙은 몸에 큰 상처가 생기고 독기가 침범했을지언정 태극혜검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무신검은 또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청마의 입술이 비틀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흑린신편을 여러 방향으로 휘둘렀다.
꽈과과광……!
산길은 본래 형체를 잃었다.
나무 파편이 이리저리 튀며 두 절대고수의 신색을 더럽혔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는 눈은 흔들리지 않는다.
주변이 아무리 폭음이 가득하고 먼지가 빈번해질지언정 깜빡이지 않았다.
“……유유무극(幽幽無極).”
“환섬(幻閃).”
두 절초가 교차했다.
태극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려는 심상과 흑린신편의 섬광이 부딪쳤다.
힘이나 공력이나 청마가 압도적.
진무신검의 숨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허억, 헉.”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
청마는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언젠가 기력이 다하면 진무신검을 무릎 꿇리고, 적마를 회수하면 그만인 여흥.
‘적마를 굴복시키려면 피를 많이 빼놔야겠군.’
진무신검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청마는 다음 계획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걸 중 절반 이상을 죽일 수 있었다.
……그를 무척이나 잘 아는 무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도 전생에서 회귀한 무인이.
“늦지 않게 도착했나?”
열네 살.
이제 막 뺨에 젖살이 빠지기 시작한 소년이 짙게 웃으며 나타났다.
청마는 소년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서문경?”
“잘 아는군.”
“여긴 또 어쩐 일로 온 거냐?”
그 말에 소년, 서문경이 차갑게 웃었다.
“왜, 당신 수하 중에 배신자라도 있을까봐?”
“…….”
“예나 지금이나 의심암귀로 가득한 놈이군.”
서문경은 왼손으로 옷깃을 젖히고는 붕대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청마와 싸우게 되면 거추장스러울 뿐이니까.
그 모습을 보고 청마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설마 나와 싸울 생각이냐?”
“그렇다면?”
“내가 적마처럼 아둔한 놈으로 보이느냐?”
“……뭐, 멍청하게 당해 주진 않겠지.”
서문경은 자연스럽게 적마의 머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이걸 원해서 온 거라면 그냥 가져가고 끝내지 그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청마가 조소를 지으며 반문하자, 서문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혼자 오진 않았거든.”
“……!”
그 말에 청마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서문경 옆에 자연스럽게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림자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게, 청마가 익히 아는 무공이었다.
“무영보…… 무영신투의 제자렷다?”
“…….”
남자, 주백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부터 이렇게 하란 명령을 받았다.
그 이유는 청마에게 큰 의심을 품게 하기 위해서였고.
의심에 방점을 찍게 하는 건 오롯이 한 명의 몫이었다.
“네가 청마라는 놈이냐?”
마기 앞에서도 여유로운 미소와 듬성듬성한 수염.
이립에 가까운 남자의 육체는 극한까지 단련되어있었다.
칠로두 중 한 놈을 떠올리게 될 정도로.
청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서문패 정도면 역시 청마라도 경계하는군.’
서문경은 속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입만 열면 무게가 사라지지만, 겉모습은 무림인과 다른 방향으로 완성된 무사였다.
괜히 한족의 무신이라 불렸겠는가?
자기가 가진 무게를, 서문패 자기도 잘 알고 있었다.
“밝힐 이유가 없지. 네 식견이 그 정도라는 뜻이니까!”
서문패의 목소리에 적잖은 공력이 담겼다.
폐허로 변한 산길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일신에 쌓은 무위에 대한 자신감.
그것을 모를 청마가 아니었다.
“……무림인 중에서 너 같은 자는 들은 적이 없다. 서문세가의 무사이냐?”
“대명의 천하를 어지럽히는 악적에게 답할 이름은 없다!”
서문패가 눈을 크게 뜨자, 서문세가의 안법이 눈동자를 시퍼렇게 물들였다.
청마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자기 그림이 망가지면 누구보다 불쾌해할 놈이다. 하지만 냉정을 잃진 않지. 지금도 가늠하고 있을 거야.’
무영신투의 제자.
정체 모를 서문세가의 절대고수.
또, 사사건건 마교의 행사를 방해하는 소년이라.
청마에게 있어 누구 하나 만만하지 않다.
강함을 떠나서 예측하기 어려운 놈들뿐이다.
서문경은 그의 심기를 읽고서 말했다.
“이대로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울 테냐? 아니면 머리만 가지고 꺼질 테냐?”
“……왜 양보하지?”
“진무신검을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많으니까.”
지금까지 허세를 부린 것 중에 유일한 진실이었다.
-서문세가가 위험에 처한 진무신검을 구했다!
그 사실만으로 남궁세가의 견제나 서문세가를 배척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강호에서 오걸은 그만한 위치에 있으니.
그걸 청마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나와 싸워서 불확실한 결과를 얻기보다 서로 바라는 걸 주고 떠나자? 계산적이군.”
“내가 군문의 소가주였어서 말이야. 그래서 어쩔 건데? 싸울 건가?”
“……흐음.”
이대로 싸우면 다른 오걸이나 십대고수가 합류할지도 모른다.
청마가 서문경을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허세인지 진실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서문경은 이런 경험이 많았다.
“마인 주제에 겁이 많군.”
자연스럽게 살기와 뒤섞인 마기를 흘리면서 조롱까지 덧붙인다.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적마의 머리를 차서 청마에게 보냈다.
“가져가라. 다음에 마주치면 죽을 때라는 걸 명심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혹시 칠로두나 수하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걸까?
속내가 복잡해진 청마가 적마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오걸이나 십대고수 이전에, 네놈을 죽여 놔야겠구나.”
“열심히 해 봐.”
“……쯧!”
혀를 찬 청마가 경공을 펼쳐 산에서 사라졌다.
이에 주백경이 긴장이 풀렸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못 해 먹을 짓이네요.”
“하지만 이기지 못할 놈을 스스로 떠나게 만들었고, 주변을 의심하게 만들었으니. 완벽한 승리지.”
서문경은 청마가 스스로 도망치게 만들었다는 것이 퍽 만족스러웠지만, 서문패는 아니었다.
“이기지 못할 놈? 나를 너무 우습게 본 것이 아니냐?”
“아니에요. 삼촌 같은 고수가 둘은 있어야 해요.”
그 말에 서문패가 깜짝 놀랐다.
“……그 정도라고?”
“예. 저런 놈이 일곱이나 있어요.”
아마, 전생에서 마교와 싸우기가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가 오늘처럼 오걸이나 십대고수를 암살해서였겠지.
‘적어도 진무신검은 살렸구나.’
서문경은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