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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무공사전-64화 (62/250)

진무신검 (1)

한족의 무신은 과연 무명(武名)인가 악명(惡名)인가?

서문경은 지금껏 보지 못한 서문패의 일면을 본 것 같았다.

‘삼촌과 싸운 소수민족이 불쌍하군.’

고문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진 않아도 직업으로 삼을 만큼 숙련된 행동이 이어졌다.

턱이 부서져 비명을 마음껏 지르는 것조차 불가능.

그저 침을 흘리며 끄어억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흑의인들은 일각을 채 버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끅, 그마, 그마안…….”

“옳지, 옳지. 이제야 대화할 자세를 갖췄구먼.”

서문패가 히죽 웃으며 뺨에 묻은 핏방울을 닦았다.

그것만으로 흑의인들과 남궁명이 경기를 일으켰지만, 서문경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 주변에 서문세가의 방계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와 주 무사가 그곳에 들러서 마차를 끌 말을 빌려오겠습니다.”

“……그래.”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서문패의 내심에 큰 파문이 일었다.

소년이 감당할 만한 광경이 아니었는데.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짚지 않았나?

눈을 질끈 감은 남궁명이야말로 정상적이다.

“거참, 형도 참 대단한 아들을 길렀어.”

“칭찬으로 듣지요.”

서문경은 주백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주백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색이 조금 하얘졌어도 본분을 잊지 않은 모습이다.

“공자님,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너보다 세잖아. 또, 혼자서 말을 몇 필이나 데려올 수 있겠어?”

“……으음.”

“고지식하게 굴지 말고. 얼른 움직이자고.”

서문경은 경공을 펼치면서 생각했다.

남궁세가의 마차를 대놓고 습격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서문패에게 들은 정보를 전부 떠올렸다.

적마의 머리.

두 동강 난 검치의 검.

무림맹에서 심부름꾼으로 위장해 있던 청마.

세 가지 파편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청마가 신분을 드러내면서까지 물건을 남긴 의도가 불분명해, 악의가 한껏 담긴 자랑처럼 느껴질 정도다.

-어디 한번 머리를 짜내 봐라, 궤가 맞지 않을 테니까.

청마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와 여러 차례 싸워 온 선봉장이었다.

‘……낚시겠지.’

청마는 낚시를 좋아하는 놈이었다.

그 행동이 기이해서, 사소한 정보임에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떡밥 없이 낚싯대를 늘어놓거나, 잉어를 바늘에 끼워 놓고 용을 잡겠다고 설치기도 했다.

그 두 가지 짓거리로 책략을 짜내는 놈이다.

‘아직 강호와 제대로 부딪치지 않았으니까, 여러 번 꼬거나 하지 않았을 거야.’

전쟁 막바지에 청마는 사특한 계책을 배배 꼬아서 펼쳤다.

잔당을 마무리하기 위함이었고, 자기 책략이 어떤 성향인지 알려져 있을 때니까.

지금은 그러할 필요가 없다.

오걸이나 십대고수의 위치가 드러나 있는 시기이기에.

‘바보 같은 놈. 네가 마차를 뒤엎은 덕분에, 오히려 파악하기가 쉬워졌다.’

청마는 모를 것이다.

자기와 수십 번이나 부딪쳤던 놈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무림맹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야겠는걸.”

서문경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청마의 모략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 * *

네 시진 뒤.

지상을 밝게 비추던 태양은 어느새 능선 너머로 저물었다.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외팔의 백전노장, 진무신검은 홀로 산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적적하나, 외롭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무림맹에서 떠나기 전에 무림맹주가 동행을 붙여주겠다고 했었으니까.

그 제안은 단칼에 거절했다.

걱정하는 마음만 받았다.

그들 중 마교의 간자가 없다고 어찌 확신하겠는가?

청마의 모략이 끼어들지도 모르니, 홀로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나이가 드니 속이 좁아진 게지, 의심이 많아진 게야.’

어린 시절, 무림사에 관여하지 말라던 사백의 말을 거절한 것부터 문제였을까?

사람을 돕는 도해선인이 되겠다는 포부로부터 오십 년이 넘게 지났다.

‘지금 산길을 걷는 자는 도사인고, 무림인인고? 아니면 도해선인을 자칭하는 늙은이인고? 알 길이 없구나.’

진무신검은 상자에서 새어 나오는 마기에 저항하며 자신의 과거를 반추했다.

온갖 번뇌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대의라 여긴 싸움에서 한 팔을 잃고.

이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여겼던 강호에 다시 늙은 몸을 들이밀었다.

‘사천성에서 아이들이 죽을 뻔하였다고 들었는데, 이 노물(老物)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랴!’

하물며 그 아이들을 구한 것이 비슷한 나이의 소년이라고 들었다.

그 소식에 무당산 자은봉(自隱峰)에서 썩어 가던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

진무신검은 함정일지도 모를 상자를 든 채 무당산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저벅, 저벅.

고요한 산자락에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지르밟는 소리가 울린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이 계절에도, 산꼭대기에서 불어오는 산풍(山風:산바람)은 사람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어둠 속으로 강하게 밀어서 잡아먹을 것처럼.

혹은, 갑자기 찾아오는 호환(虎患)을 냄새로 대비하라는 듯이.

“……하아.”

진무신검은 입김을 불었다.

하얀 연기가 산풍에 휩쓸려 사라지는 순간, 세 인영(人影)이 길 위에서 나타났다.

“사, 살려 주세요……!”

“으흑, 흑.”

눈물을 흘리는 어린 남매와 왼쪽 눈 아래에 점이 있는 청년.

진무신검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젠가 길을 가로막으리라 여겼지만, 이르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비열한 방식으로.

“청마, 둘이서 맺을 이야기가 아니더냐? 아이들은 물리거라.”

“미안하지만……”

“미안하지도 않을 것이다.”

“안 본 사이에 입심이 매서워졌군, 늙은이.”

청마가 빙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매의 정수리를 꾹꾹 짓눌렀다.

“아악!”

“아, 아파요, 아파!”

산풍에 피 냄새가 뒤섞였다.

외공을 단련한 무인도 청마의 손길을 이겨 내지 못하는데, 어린아이가 견딜 리가 없었다.

청마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마치 뱀과 같았다.

진무신검은 속으로 몇 번이고 도호를 외웠다.

‘원시안진, 삼청삼원, 대도무량…….’

분노로 감각이 더럽혀지는 것을 욱였다.

청마에게 대적하려거든, 어느 때보다 침착하게 맞서야 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과거에서 배운 게 있나 보지? 곧바로 달려들지 않고 말이야.”

“……묻지 않았느냐.”

“목소리 한 번 차갑군. 우리가 초면은 아니잖나?”

청마가 남매의 정수리에 손가락을 휘저으려는 순간, 진무신검이 상자를 바닥에 던졌다.

외팔로 검을 휘두르는 시간이 찰나를 앞질렀으니.

휘르륵, 탕!

극에 이른 검풍이 청마의 손목을 베었다.

하나 자르지는 못했다.

살갗에서 피 한 방울.

검풍이 자아낼 수 있는 한계.

그마저도 청마는 순식간에 재생할 수 있었다.

‘멀리서는 결착을 낼 수 없거늘.’

이 사실을 청마가 모를 리가 없다.

진무신검의 표정을 본 청마가 크게 웃었다.

“행실은 신중해졌어도 무공에 진전은 크게 없었나? 아쉽군 그래.”

“그리 생각한다면 직접 싸우는 것이 어떠냐?”

“아, 그러긴 싫어. 궁금하기도 해. 당신 같은 늙은이가 언제까지 선한 척할 수 있는지.”

청마가 히죽 웃으며 어린 남매를 이리저리 괴롭혔다.

속셈이야 뻔하다.

자신의 공력을 최대한 낭비시켜서, 힘을 빼놓고 죽이겠다는 심산이다.

그걸 알면서도 아이들이 죽게 둘 수 없어서.

진무신검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휘르륵, 캉!

한 번, 두 번, 세 번.

검풍을 연거푸 펼쳐 청마의 오금이나 힘줄을 절묘하게 노렸다.

적은 힘일지라도 행동을 멈추게 하는 요혈이었다.

그러나 공력은 무한하지 않다.

“후우…….”

가히 반 시진을 계속해서 검풍을 펼치니 진무신검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그 모습을 본 청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림맹이 적마의 머리에서 살점을 뜯거나 신혈을 채취했다지?”

“……아마 그리했겠지.”

“같은 칠로두로서 가만히 있기가 어렵더군. 저렇게 두면 계속해서 약해질 테고, 지금도 굴욕에 몸부림치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청마의 말에 바닥에 던졌던 상자가 덜그럭거렸다.

적마가 머리만 남은 채로 살아 있는 것도 놀랍지만, 저 말을 듣고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기상천외한 광경에 진무신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데 검치는 어떻게 되었는고?”

“왜? 궁금해?”

“여기서 곱게 보내 주진 않을 터이니, 궁금한 것이라도 물어야지.”

“좋은 자세야.”

그렇게 대답한 청마가 갑자기 남매를 집어던졌다.

진무신검은 자연스럽게 두 아이를 품에 안았다.

어디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 찬찬히 살피고 싶었지만…….

“문제는 내가 친절하지 않단 거지.”

스르륵.

청마의 허리에서 채찍이 풀려나왔다.

흑린신편(黑鱗神鞭).

호신강기마저 분쇄한다는 청마의 애병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아이를 지키다 죽을 테냐? 아니면 홀로 맞서 싸울 테냐?”

청마의 물음에 어린 남매가 진무신검을 올려다보았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시선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저, 저흰 이제…….”

차마 괜찮다거나, 버리고 가라는 말조차 잇지 못했다.

아이란 보통 그러하다.

의연하게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두려움을 극복해 본 경험도 없다.

나무로 치면 아직 나이테도 없을 때가 아닌가?

진무신검은 남매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곤, 청마에게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전혀, 상관없다.”

“오냐. 죽어라.”

이제 흥미가 사라졌다는 듯.

청마는 서늘한 표정을 지은 채 흑린신편을 휘둘렀다.

쿠콰콰쾅!!

산길이 위아래로 파헤쳐졌다.

나무가 뿌리를 드러내며 기울어졌다.

가히 산사태에 버금가는 소란이다.

정면으로 받아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해내야만 했다.

“내 등 뒤를 통해서 도망치거라. 시간을 벌어 주마. 아무 마을에라도 가서 몸을 의탁하려무나.”

“……예.”

남매가 자신의 등 뒤로 슬금슬금 기어갔다.

진무신검은 속으로 안도하며 검을 쥐었다.

‘여기서 죽을지언정 후회는 남기지 않겠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도망칠 때까지 버티다가 쓰러지리라.

그 의지는 아주 간단하게 허물어졌다.

……푸욱!

진무신검의 등에 두 단검이 나란히 꽂혔다.

“……큭!”

흑린신편을 쳐 내던 진무신검은 뒤늦게 호신강기를 일으켰지만.

촤악!

또다른 단검으로 옆구리를 베였다.

이번에는 독이 발려 있었는지, 감각이 금세 흐리멍덩해졌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으흑흑…….”

등 뒤에서 남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 왜 배신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필시, 청마에게 협박이라도 받은 거겠지. 가족이나 마을을 몰살하겠다든지 해서.’

진무신검은 쓰게 웃었다.

당연하지만, 청마는 저런 약속을 지킨 적이 없었다.

무슨 구실이든 잡아서 후환을 없앨 것이다.

‘애가 뭘 알겠는가? 무슨 잘못이 있겠나? 청마가 악인인 것을!’

진무신검은 고통 섞인 신음을 흘리며 남매에게 조언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여기 있지 말고, 빨리 도망치거라.”

“하, 하지만…….”

“저런 자가 살려 주겠단 약속을 지키겠느냐?”

뒤늦게 진실을 알아차린 남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나는 전혀, 상관없어.”

낮게 읊조린 진무신검은 청마의 공세에 처절하게 저항했다.

검풍에 공력 절반을 소진하고, 등과 옆구리를 찔리거나 베였다.

꼴이 말이 아니다.

다리가 저려서 한쪽 무릎을 꿇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은 과거에 도해선인이 되고자 했다.

‘나귀를 거꾸로 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아도…… 남을 돕기 위해 바다를 건넜지.’

자기만족을 위해 선택한 길이었으니, 끝이 더러워도 불평할 생각은 일절 없다.

진무신검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노구(老軀)가 태허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야…….”

선의가 칼로 돌아왔을지언정, 진무신검의 정신은 쇠하거나 꺾이지 않는다.

무당산의 가르침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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