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 (6)
대업이 눈앞에 왔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서겸이 차가운 얼굴로 아들, 남궁명을 내려다보았다.
“동년배에게 진 것이 그리도 충격이더냐?”
“아닙니다.”
“양가의 여식에 비하면 훌륭한 패배가 아니더냐? 적어도 가전무공에 패하진 않았으니.”
“그렇습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로서 본보기가 되어야지. 왜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냐.”
깊은 한탄이 남궁명의 가슴을 찔렀다.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장 강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여러 말이 턱 아래서 울컥거리다가 가라앉았다.
눈물은 흘릴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그런 것을 싫어하셨기에.
팔자주름 하나 없는 얼굴에 웃음기는 평생 보지 못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저러하셨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묻지 못했다.
그럴 자격이 없었다.
‘서문경이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은 통하지도 않는다.
그와 비견될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성하민이라는 신성이 있었으니까.
이 불합리함.
‘천재 사이에도 격이 있단 말인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남궁명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몇 마디 변명이 떠올랐으나 내뱉진 못했다.
남궁세가의 엄중한 가르침 때문이었다.
“제가, 제가 조금 더 노력하겠습니다. 따라잡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예?”
“서문세가는 애초에 무림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가문이다. 여기까지 온 것이 억지에 가까웠지.”
서문경이 떠나고 나면, 성하민을 쫓아내는 것이야 순식간.
천무학관의 관비를 높이면 그만이다.
남궁서겸은 무심한 얼굴로 남궁명을 위로했다.
“그 둘은 무림사에서 찾기 어려운 소년 고수다.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해. 이번 기회로 패배를 수습하는 경험을 쌓거라.”
“…….”
남궁명은 그 말을 위로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어서 쫓아내는 꼴이니까.
마음 한구석에선 서문경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기에 더더욱 창피했다.
“소가주에서 스스로 내려간 놈 하나 이기지 못해서야 어찌 남궁세가의 귀한 혈족임을 자칭하겠습니까?”
“상대를 인정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서문경 같은 고수가 대명을 수호하고, 성하민을 본가에 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 둘은 지금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남궁명은 고개를 쉬이 끄덕이지 못하고 번민했다.
서문경이야 본래 서문세가의 소가주였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하민은?
자갈밭에 수없이 깔린 돌멩이 중, 가까스로 빛을 발하던 보석을 남궁세가가 채 가겠다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말이 좋아도…….
“예. 모르겠습니다.”
“네가 어려서 그렇다.”
“……어려서요?”
“영위(榮位)를 위하여 지금도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다. 무림맹마저 언젠가 손에 들어오면 구파일방이라는 중과 도사들도 우리를 존중하게 되겠지. 모두 그때를 위해 남궁세가라는 밭을 일구고 있는 것이야.”
남궁서겸은 남궁명에게 대국과 시간을 논했다.
“나의 대에선 파종(播種)의 끝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씨앗에서 곡식이 나올지, 꽃이 나올지.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왜 그러하겠느냐?”
“……후대를 위해서입니까?”
“맞아. 하지만 절반뿐이다. 이곳이 무림이라는 것을 잊었느냐?”
남궁서겸은 무림과 강호를 논했다.
“다른 문파나 세가도 영위를 꿈꾼다. 황실에 비하면 물거품에 불과할지라도, 만인지상을 노리는 것이 사내이고 무인이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도태되고 마는 것이 순리고.”
“…….”
“비정(非情)하기 싫은 것이라면 이해하나, 수많은 넋과 노력을 저버려서야 가주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남궁서겸은 가주의 무게를 논했다.
남궁명은 자신의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서문경과 성하민을 천무학관에서 쫓아내고자 하는 이유.
그것은 잘 알았다.
이해했다.
남궁세가가 영위를 자치하기 전에 추문을 없애고, 천재 소녀를 아군으로 삼겠다는 건 합리적이니까.
하지만 남궁명은 남궁서겸처럼 차갑지 않았다.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쇠하지 않은 것이 정(情)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열등감이나 동정심까지도 정이라.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무림맹을 통해서 진행 중이다. 미루다간 서문세가가 먼저 알아차릴 것이다.”
“둘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제가 이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
남궁서겸은 잠시 망설였다.
대국이나 시간을 논했던 자신이 무시하라 일갈했고.
무림과 강호, 가주의 무게로 보아서도 당연히 거절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라서.
가주의 비정한 덕목은 고루 갖추었으나, 아직 소년인 아들에게 정을 치우라고 강요할 순 없었다.
“……생각해 보니, 무림맹에 소란이 있었지. 그걸 수습하느라 시간이 걸리겠구나.”
“아버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다. 그땐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야.”
“감, 감사합니다!”
남궁명은 감격하며 두 손을 모아 올렸다.
하지만 남궁서겸은 아무런 표정조차 짓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속에서 여러 생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 *
“……무림맹의 중추인 남궁세가가 저를 밀어내려고 한다고요?”
“그래. 망나니 서문경아, 출신이 문제고 행실이 문제란다. 아마 온갖 딴죽을 다 걸겠지.”
망나니로서 행동한 흔적.
천무학관에서 여러 수업을 청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
그것까지 전부 끌어와서 호북성에서 밀어낼 작정이라니.
서문경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제가 그…… 소가주라는 애를 이기긴 했는데.”
“어이쿠, 속이 완전 좁은 앤가?”
“속이 좁은 애는 아니었어요. ……적어도 겉보기에는.”
“사람 속을 네가 어찌 알겠냐? 어린애가 허세가 물들어선.”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서문패가 낄껄거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서문경은 당장 나가라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지금은 소가주가 아니니까. 듣는 척도 안 하겠지.’
오히려 조카 예의가 X같다며 말장난이나 할 것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있지. 적마의 머리가 무림맹에 도착했다던데.”
“……아니, 뭣.”
너무 깜짝 놀라게 되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서문경은 입을 크게 벌린 채 쌍욕이 나오려는 것을 인내했다.
“아니, 그거부터 말해야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이런 반응이 보고 싶었지…….”
“적마를 처죽인다거나- 했던 건 또 뭐고요?”
“조카한테 허세 좀 부리고 싶을 때가 있잖아…….”
궁색한 변명이 이어졌다.
열네 살 조카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꾸짖을 줄 몰랐던 모양.
서문경은 서문패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직은 물을 것이 남아 있었다.
“다른 건 더 없겠죠?”
“그, 검치의 칼이 발견됐고…… 청마가 심부름꾼으로 숨어서…….”
“왜 먼저 말해야 할 걸 마지막에 말하는 겁니까?”
“그 상태로 무림맹에 갈 순 없잖아……. 내가 가서 추이나 지켜보려고 했지…….”
“한 대만 때려도 됩니까?”
“그건 싫은데…….”
나이 먹은 철부지와 말을 섞는 시간이 아깝다.
서문경은 붕대와 약, 피풍의를 보자기에 대충 챙겨 넣었다.
‘다행히 무림맹이 여기서 멀진 않으니까.’
중간에 마교와 마주치지만 않으면 위험할 일은 없다.
혹시 모르니 주백경과 합류하는 것이 좋을까?
여러 고민을 머릿속에 담는 사이에 서문패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진짜 가게?”
“가짜로 가는 것도 가문에서 배웁니까?”
“가서 칼부림이라도 나면 어쩌게?”
“삼촌은 무슨 무림맹을 싸우려고 갑니까? 안 싸우고 상황만 파악할 겁니다. 다른 사람한테 전달 받는 것보다 현장에서 듣는 게 나을 테니까요.”
“오. 역시 부전자전.”
“농담할 시간 없습니다. 주 무사랑 함께 갈 테니까 돌아가세요.”
서문경의 매몰찬 말에도 서문패는 싱글벙글 웃었다.
“내 말 못 들었어? 나도 갈 거라니까.”
“……왜요?”
“왜는 왜야. 조카가 위험한 곳에 간다는데 삼촌이 어떻게 가만히 있어?”
“아.”
“아?”
“아, 정말 안심된다. 그런 의미였습니다.”
엄청난 고수인 건 맞지만, 행동하는 것이 당최 예상이 안 되는 사람이라.
서문경은 서문패가 위험한 도당(徒黨)처럼 보였다.
‘차라리 눈치 없이 도리니 인의 같은 걸 따지는 주백경이 낫지.’
어쩔 때는 도움이 된다.
척안룡한테 시간을 벌거나 하지 않았나?
하지만 서문패는 다르다.
저 사람이라면 최악의 상황에 최악으로 능글맞은 농담을 던질 것만 같다.
서문경의 눈빛을 본 서문패가 울상을 했다.
“이러다가 삼촌, 토라져 버려?”
“……그러세요, 그럼.”
“매몰차.”
칫 하는 소리를 낸 서문패가 상자를 꺼냈다.
딱 손바닥만 해서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짐작이 갔다.
“요상약입니까?”
“오던 중에 분가한테 지원을 받았다. 뛰어난 거니까 내상과 외상 모두 효험이 좋을 거야.”
말이 지원이지 분명히 털어 왔을 것이다.
서문경은 진실을 구태여 묻지 않고 요상약을 입에 털어넣었다.
“쓰다……!”
“뛰어난 거니까.”
약은 쓸수록 좋다.
참으로 군인다운 지론이라, 서문경도 동의하는 바였다.
“즉효성이 있네요.”
“좋지?”
“예. 금방 몸이 아무는 기분이에요.”
단순히 ‘그런 것 같다’의 수준이 아니었다.
붕대를 슬쩍 들추니 상처에 딱지가 져서 사나흘이면 떨어져나갈 듯 견고했다.
이제야 삼촌다운 행동이지 않나.
서문경은 서문패에게 빙긋 웃었다.
“역시 삼촌입니다.”
“여기 오고 나서 처음으로 좋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착각입니다.”
서문경은 장난을 걸려는 서문패를 단칼에 자르곤 숙소 정문으로 다가갔다.
문 너머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설마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몰래 대기하던 주백경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곤장이라도 가져와서 패주리라.
그리 생각하고 문을 열어젖히자, 의외의 인물이 드러났다.
“……남궁명?”
선전포고라도 하러 왔나 해서 의아하던 차였다.
남궁명의 볼일은 그거보다 더 심했다.
“호, 혹시 내일 비무하지 않겠나?”
“뭐?”
자기랑 비무하는 중에 상처가 터졌는데 또 하자?
매일 비무해서 죽이겠다는 뜻인가?
의도가 도대체 뭔지 감이 안 오던 찰나에 남궁명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구체의 형상이지만 흐물흐물해서, 먹는 약은 아닌 것 같았다.
“이거면 자상은 금방 아물 걸세!”
“바르는 건가?”
“본가의 비전일세. 반나절이면 금방이지!”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 효험이 뛰어난 듯했다.
서문경은 천에 감싼 약을 받고서, 기대에 찬 남궁명을 배신했다.
“내일은 힘들어.”
“왜지?”
“무림맹으로 갈 참이거든.”
이렇게 말하면 자기가 남궁세가의 소가주이니까 눈치가 보여서 안 간다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남궁명은 아직 소년이었고, 미뤄진 시간이 얼마인지 몰랐다.
“나도 따라가겠네!”
“……?”
“내가 남궁세가의 소가주니까, 무슨 일이든 도움이 될 걸세!”
“……아, 하. 이거 참.”
얼마나 더 직접적으로 말해야 할까?
서문경이 잠시 고민하던 차였다.
“항시 대기 중인 마차가 있네! 그거면 무림맹까지 편하고 빠르게…….”
“좋아.”
서문경은 냉큼 수락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