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 (5)
“날이 밝다. 조카가 만진 가전무공의 흠결을 보기엔 좋은 날씨야.”
서문패의 음색에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아무리 천무신동이고 적마와 싸웠다고 한들, 전공일 뿐.
의념절기로 치명상을 입혔단 건 소년의 거짓 섞인 허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서문경이어도 저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겨우 열네 살의 소년이 전장에서 태어나고 길러진 무공을 손대기란 천재여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의념절기? 상단전 심상으로 펼치는 절초가 우스운가?
……하지만 한 번의 삶을 더 살았던 사람이면 어떠할까.
“후우.”
서문경은 숨을 숙하게 골랐다.
전신에 활력이 돋으며 핏물이 빠르게 휘도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문패가 도착하기 전에 휘감았던 붕대가 다시 축축해졌으니까.
그러나 통증에 집중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배웠던 무공을 떠올려, 방대하게 펼친다.
번천광검결과 서문검법.
무연창과 서문창법.
거기에 창궁무애검법이라.
머릿속에 품었던 상념과 이론에 입각해서 펼쳤던 초식을 분리했다.
“……너.”
조카라는 호칭이 낯설게 변했다.
서문패가 자신의 기세를 보고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곧이어 손을 내밀었다.
‘상처가 벌어지니까 그만둬라, 뭐 그렇게 말하려는 거겠지만.’
아까 서문패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정이 있는 건 알았다고.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라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여의주를 문 용이 폭포 아래에서 웅크리다 승천을 위해 용오름을 펼치는 때다.
서문경은 자유롭게 손을 뻗었다.
쩌적.
마당에 심어져 있던 나무에서 가지를 꺾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이 떠오르고 가라앉길 반복했다.
그것 또한 수많은 나뭇가지였다.
무공사전을 쥐지 않아도 자연히 떠오르는 영감이자 오성이었다.
“서문검법, 일초.”
비검절우.
서문패가 수백, 수천 번은 펼쳤을 검초를 입에 담는다.
서문경의 팔이 강하게 휘둘러졌다.
“……!”
서문패의 눈이 커졌다.
내공을 쓰지도 않았는데 가지가 휘어지지 않다니?
신기에 가까우나, 비검절우는 강하게 휘둘러 수급을 취하는 베기다.
초식이 담고자 하는 뜻과 다르다.
그 말을 입에 담기도 전에 ‘신비’가 일어났다.
……휘르르.
돌개바람이 일었다.
소리에 귀가 쫑긋거렸고, 주먹을 쥐었다.
왜 주먹을?
그 의문이 들기도 전에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파스슥!
돌담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 가루가 흩날려서 살갗을 두드리는 차음.
“들리셨습니까?”
서문경이 그렇게 말했다.
뻔뻔하게도, 자신이 들었다는 것을 알면서.
“……계속해라.”
서문패는 심통이 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땐 가문 내에서 종지그릇이라고 불리는 편이 낫다.
그래야 서문경이 자길 증명하기 위해 모든 것을 보여 줄 테니까.
“일검적심.”
가지가 앞으로 내질러졌다.
갑옷 틈새 사이로 근육과 뼈를 끊기 위한 일격.
초식의 본의는 그러했다.
……분명 그러했을 텐데.
쩌적!
바람에 스쳤던 돌담에 바늘만 한 크기의 점이 새겨졌다.
‘강호의 무예 중에 이런 것이 꽤 많았지.’
흔하다면 흔하다.
검풍을 기습적으로 쏘아, 틈을 노리는 것이야 서문패도 수없이 경험해 보았다.
하지만 서문검법에 들어있다는 건 다르다.
근육과 뼈를 끊을 강격(强擊)에 내장까지 꿰뚫을 검풍까지 뒤섞였다면 살상력은 더 올라간다.
서문패는 저도 모르게 감탄할 뻔할 것을 참고서.
“……계속해라.”
본심을 숨기고서 말했다.
서문경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서풍광아.”
서쪽에 칼바람이 분다고 하였다.
북적을 베는 칼에 망설임이 없다.
의지가 없는 재해처럼 인정(人情)을 버리고 크게 휘두르라는 본의다.
화살비를 쳐내거나 주위의 보병을 격멸한다.
그 본의는 과연 어떻게 변하였을까? 더욱 발전했을까?
기대심을 품고 말았다.
서문패는 이미 자신이 졌다는 걸 알았지만, 기뻤다.
휘르르르…….
휘어지지 않는 가지가 크게, 연거푸, 사각 하나 없이.
작은 돌풍을 이룬다.
저것이 칼이고 공력이 담겼다면 어땠을지 짐작하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저건 원래의 서풍광아가 아닌가?
의문을 품던 찰나에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나지 않아?’
작은 돌풍은 서문경을 중앙에 품은 채 계속해서 회천했다.
쥐고 있는 것이 가지라서, 내공을 쓰지 않아서.
호사가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터였다.
그러나 서문패는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검이어도, 공력을 끌어다가 썼어도 다르지 않았겠지.’
서풍광아는 그저 주위를 강하게 휘두르는 초식이 아니다.
그깟 초식이라면 차라리 삼재검법이 낫다.
팔방풍우가 딱 그 꼴일 테니까.
본질은 얼마나 정확하게 휘두르느냐다.
돌풍을 이루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서문패는 작은 상상을 서문경에게 덧붙였다.
카가강!
“끄아악!”
화살비를 무심하게 쳐 내면서 보병을 죽이는 서문경을.
그 모습을 보며 분통을 터트리는 적장의 분노 역시.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되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전장에 데려가고 싶지 않은가?
전형적인 지략가였던 형이 저런 자식을 내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문패는 치솟으려는 웃음을 억눌렀다.
“……창법까지 바꾸었다고?”
“예.”
“광오하다. 하지만 봐줄 가치는 있어. 계속해 보아라.”
“하지만 삼촌.”
서문경은 옷깃을 슬쩍 옆으로 제쳤다.
쇄골과 가슴을 묶은 붕대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아물려던 상처가 다시 터졌다는 증거다.
창법까지 펼쳤다간 다시 쓰러질 팔자였기에.
“검법의 사초인 청운적하를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그리 해라.”
서문패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검법의 절초라고 볼 수 있는 청운적하.
그 본질은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용장의 목을 취하는 힘.
구름을 붉게 물들인다는 뜻 그대로를 재현할 수 있을까?
의문이 이어지기 전에 서문경이 움직였다.
“……하아.”
가슴속에 모아둔 숨을 일거에 뱉었다.
눈동자에 시퍼런 광망이 일렁였다.
공력을 쓰지 않아도 의념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천주심경을 수련한 이래로 이러했다.
상단전의 격조가 높아져, 의지가 힘으로 화한다는 증거였다.
다행히…… 서문패는 전생의 서문경처럼 상단전 수련에 무지한 편이었으니.
휘두른다.
스가각!
가지가 반원을 그렸다.
허공에 휘둘렀는데도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서문패의 귓가를 스쳤다.
“아!”
서문패는 저도 모르게 아쉬움을 토했다.
알았기 때문이다.
이번 초식을 끝이라는 것을.
저 가지가 끝내 부러진다는 사실까지도.
뚜둑!
서문경이 두 동강 난 가지를 미련 없이 버렸다.
어찌 보면 가장 볼품없는 초식이었다.
비검절우처럼 바람을 일으키지도, 일검적심처럼 구멍을 뚫지도, 서풍광아처럼 정교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가장 단순한 것이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었다.
“두 호흡의 강검(强劍)인가……!”
서문패의 읊조림에 서문경은 어찌 알았냐는 듯 놀라워했다.
“다른 무공에서 좋은 점을 빌려왔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함부로 밝힐 순 없습니다.”
“그래? 그럴 만하다! 놀랍구나! 무림에 신기한 조화를 지닌 무예가 많다지만, 이렇게 궁합이 잘 맞을 줄이야!”
“제가 잘 조화시킨 거지요.”
서문경의 말은 사실이었다.
번천광검결은 삼단전으로서 완성된 신공이고, 서문검법은 중하단전에 집중된 검법이었다.
두 검법은 절묘하게 맞는 듯하면서 다르다.
대치시키는 건 쉬워도 합일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서문패의 대답은 얄미웠다.
“무림으로 가더니 무인의 허세만 배웠구나. 군인은 오로지 담백하게 사실만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어허, 삼촌에게 말꼬리라도 잡고 싶은 것이냐?”
서문경은 주먹을 쥐고서 부들거렸다.
자신의 나이가 열넷이니 삼촌이라고 해 봐야 겨우 서른 아닌가?
그런데 얄밉고 능글맞기가 무슨 마흔에서 쉰은 된 것 같다.
“하, 아니.”
“실랑이는 여기까지 하자. 네 몸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과연 그 말대로, 서문경의 몸은 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새로이 정돈한 가전무공을 보여 주느라 아물어 가던 상처가 터진 것이다.
그 이유가 서문패에게 있었으나, 뻔뻔했다.
“거 참. 살살하지…… 상처도 적잖은 놈이…….”
“삼촌!”
“귀청 떨어지겠다!”
서문패가 흐뭇하게 웃었다.
“적마란 놈도 아주 크게 다쳤겠구나. 공력 없이 이런 조화를 일으키는데, 의념절기를 펼쳤다는 말도 소문은 아니겠어. 그렇지?”
“……전 모릅니다.”
“그래, 모르는 일로 하자.”
서문패가 고개를 끄덕이곤 숙소를 가리켰다.
“상처를 봐줄 테니까, 참으면서 들어라.”
“본가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런 건 어른한테 맡겨라. 안 그래도 네 아버지. 아니, 가주님께서 불철주야 고생 중이니까.”
“그러면……?”
“성질 한번 급하기는!”
혀를 가볍게 찬 서문패가 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무림맹.”
“…….”
“뭐, 대충 예상했다는 것 같은데. 이것까진 모를걸?”
“설마 적마가 습격이라도 했습니까?”
“아니.”
서문패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무림맹 쪽에서 너를 밀어내려고 한다구나.”
* * *
적마의 머리가 나타난 이후.
무림맹은 소란스러워졌다.
청마가 심부름꾼으로 잠입해 있었다는 사실도 문제지만, 두 동강 난 검치의 칼이라든가, 적마의 머리를 진무신검이 무당파로 가져가겠다고 해서 난리가 났다.
특히 전공을 따지기 좋아하는 자들끼리 문제였다.
그들 중 무림맹주가 있다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왜 적마의 머리를 무당파에 가져가십니까? 공을 무당파에 돌리기 위해 그러시는 겁니까?”
“검치가 적마를 베고 나서 나에게 보낸 게 아니겠나?”
“그건 진무신검께서도 모르잖습니까!”
‘……이럴 때 유능한 무림맹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진무신검은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과거에 마교와 싸우겠다던 자신이나 무영신투를 도와주던 낭왕은 어디 가고, 전공에 집착하는 자만 남았나?
‘어서 영산에 묻어야 적혈마공의 뿌리를 완전히 없앨 수 있거늘. 어쩌면 머리 자체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이래서야 적마의 머리를 영산에 묻는 이유를 말할 수가 없다.
무림맹 소유의 영산이 있다고 실랑이 하느라 간자가 마교에 전달할 테니까.
진무신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력으로 가져가야 속이 시원하겠나?”
“아니, 지금 무림맹을…….”
“본도만큼 마교와 싸운 사람이 현 무림맹에 누가 있나? 낭왕? 은거하여 보이지도 않고, 무영신투? 천무학관에 있네. 검치는 생사마저 불분명한 상황이고!”
“…….”
“모든 일에 인내심을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네만, 마교에 관해서는 안 되겠네.”
그러다가 진무신검은 무림맹주의 의표를 찔렀다.
“자네, 이 머리를 탐하는 이유가 권위를 위해서인가?”
“……그건.”
“낭왕이 마교와 싸우느라 무림맹의 가산을 탕진하여 남궁세가에게 많이 손을 빌렸고, 자네 잘못이 아닌 건 아네. 하지만 급한 상황에서 체면을 따질 때는 아닐세.”
“……선배.”
“나중에라도 무당파에서 도움을 주겠네. 그러니까 말리지 말게.”
그 말을 끝으로 진무신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세가의 간섭마저 이겨 내지 못하는 무림맹주라면 앞으로 일어날 환난에 대처할 수 없다.
‘이럴 때 낭왕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는 대체 어디서 은거하고 있는가?
늙은 도사, 진무신검은 과거의 전우가 그리웠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