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60화 (58/250)

무림맹 (4)

싱그러운 봄의 색채는 여름이 가까워지며 더욱 시퍼렇게 물드니.

천지가 변하는 계절이다.

농작물이 영글어 농부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고, 관리는 공납의 양을 셈하기 시작하는 때.

“……후우, 덥다.”

백우선을 쥔 남자는 후자에 속했다.

서문세가의 중진(重鎭)으로서 사천의 지부대인이나 현령과 농담을 떠들러 다니거나, 무사들의 무공을 보거나.

필요 이상으로 공납을 걷는 부패한 소똥들을 치우거나.

몸이 두 개여도 바쁜 신분이었다.

가주인 서문이현이 자신을 부른다고 하였을 때 분명히 또 나쁜 짓이나 시키겠거니 싶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틀렸다.

-일공자의 의중을 알아 오게.

서문이현의 밀명이었다.

그것도 육성이 아니라 필담으로 했다.

가주인 그가 자기 가문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

여느 때처럼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가족으로서 안다.

속이 문드러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씨익 웃고는 그 아래에 덧붙여 썼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 자네가 필담으로 진행하는 건 십수 년 전 전쟁 이후로 처음인데.

-그만한 일이야.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지.

서문이현은 흔들림 없는 필체로 꾹꾹 눌러썼다.

-가문 내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남자라면 역시 자네밖에 없지. 그래서 불렀네.

한족의 무신(武神).

전쟁 중에 소수민족이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한평생 벽지에서 지냈기에 식견이 좁아서 그랬을 테지만, 적어도 남자는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서문이현은 그것을 알기에 손끝이 꿈틀거리는 걸 참고서 썼다.

-한족의 무신, 서문패.

-부끄럽나? 강호와 접하여 살면서 아직도 별호에 거리낌이 있어서야 언제 무림인과 친해지겠나?

-나한테 철인이란 말이 붙은 것도 허울이지.

서문이현의 강인한 필체에 남자, 서문패가 끌끌 웃었다.

-여전히 무림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구먼. 한데, 그 철인을 움직이게 한 것이 일공자렷다?

-주변에 마교가 있을 테니까 주의해.

서문이현이 ‘마교’라고 쓰는 동안에 서문패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으로 오면서 마교와 관해 충분히 알아보았다.

과거의 망령들이 천하를 조지기 뭉쳤다니, 얼마나 할 짓 없는 놈들인가!

그러나 한 가지만은 괄시할 수 없었다.

-남만(南蠻)의 야수궁도 마교에 있다는 게 사실인가?

-그러니까 주의하라는 게지.

-난감하군.

십수 년 전, 자기 손으로 몰살했던 민족을 다시 보게 될 수도 있다니.

서문패의 입가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고민이 조금 됐다.

물론 두렵거나 망설여서는 아니었다.

-나를 보면 아마 죽이려고 달려들겠지?

-야수궁의 풍습대로 처리하겠지.

-시체가 남아나질 않겠어.

끌끌, 서문패가 잡배처럼 웃어젖히고는 필담이 적힌 종이를 한손으로 꽉 쥐었다.

찌지직 소리를 내며 종이가 일그러졌다.

단순히 주먹을 쥐는 압력만으로 주름진 공간마다 균열이 인 탓이다.

서문이현은 그의 무공이 한층 더 성장을 이루었음을 깨달았다.

“축하하네. 하지만 성취를 자랑할 시간에 움직이는 건 어떠나?”

“크…… 냉정하구만, 냉정해.”

서문패가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는 가주실에서 나갔다.

여전히 비좁고 소름끼칠 정도로 정리된 공간이었다.

계절의 변화나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하지만 지금 보니, 안에 있는 사람이 조금 바뀌지 않았던가?

‘그 똑바른 척하던 서문경이가 철인을 저리 만들어?’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저렇게 꽉 막힌 놈이 무림까지 돌아보게 만들었을까.

서문패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웃었다.

‘삼촌이 간다, 요놈아!’

* * *

“망나니라고 불린다며?”

그렇게 묻는 서문패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무슨 말을 하든 꿋꿋이 받아칠 작정이다.

서문경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주백경은 일찌감치 수련을 핑계로 숙소에서 떠났다.

‘저 고약한 심보에 당하기 싫으니까 무영신투한테 갔지.’

상급자한테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부하에겐 철저하다.

자긴 놀리면서 놀림 당하면 정색을 한다.

보급품을 주면서 온갖 생색을 낸다.

군문에서 쪼잔한 행동으로 꼽는 모든 것을 웃는 얼굴로 행하는 삼촌이었다.

소수민족에겐 한족의 무신, 본가 내에선 한족의 종지그릇.

물론, 당사자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다.

‘최소한 반년은 말도 안 붙일 테니까.’

어쩌면 저 쪼잔하게 꾸민 성격에 능구렁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낮지만.

서문경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예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야, 나도 네 나이 때엔 그렇게 불리질 않았는데…… 한편으로는 부럽구나! 네 아비가 이만큼 일찍 세상에 풀어 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성년이 넘어서도 본가 내에서 붙잡고 소가주로 키울 줄 알았더니만, 웬걸. 네가 자리에서 내려가고 무림으로 투신하다니!”

끌끌, 서문패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는 듯 자기 허벅지를 때렸다.

“내가 아는 동생이라면 널 패서든 붙잡아서든 말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기까지 했는데…….”

‘아마 내기도 억지로 하고, 돈을 따간 부하한텐 밥이나 쏘라고 졸랐겠지.’

“듣고 있느냐?”

“아, 예. 삼촌. 그나저나 바쁘신 몸인데 어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그러게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서문경은 잠시 서문패와 눈싸움을 벌였다.

이런 경우,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먼저 입을 열라는 시위였다.

어린 시절에는 자주 당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일각이 지나자, 서문패가 켁 하는 소리를 냈다.

“무림이 독하긴 한가 보지? 내가 알던 그 애가 아니야!”

“전 원래 이랬습니다.”

“야, 네가 나를 제일 많이 닮았어. 휘가 형을 닮았지.”

내가 당신을?

서문경이 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서문패가 곧장 잡아냈다.

“섭섭하게 생각하네?”

“아, 아닙니다.”

“일단 몸으로 부딪치는 게 나고 너고.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움직이는 게 형이고 네 동생이지.”

“일리가 있네요.”

“와…… 조카란 녀석이 나이 좀 먹었다고 날 너무 무시하네.”

어린 시절에는 삼촌이라고 쪼르르 따르던 녀석이 이제는 거리를 두려고 섭섭한 짓이나 한다며, 서문패가 온갖 말을 쏟아냈다.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전생에서 들었던 말을 또, 또 듣고 있자니 마인에게 소진하려고 아껴 둔 분노가 솟구치는 기분.

서문경은 필사적으로 다른 화제로 돌렸다.

“제가 망나니로만 불린 게 아닙니다.”

“알아. 적마라는 놈이랑 싸웠다며?”

“……정확하게는 무영신투가 제 신분을 빌려서.”

“누굴 속이려고 들어?”

서문패가 차가운 웃음을 드러냈다.

실망과 섭섭함이 교차한 듯했다.

“알면서 속아 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그렇지만.”

“네 사정도 있긴 하겠지. 그렇지만 말이다.”

서문패의 손길이 서문경의 옷깃과 소매를 스쳤다.

가볍게 젖히는 것만으로 꽁꽁 감싼 붕대가 드러났다.

격전의 흔적, 상흔이 붕대 아래서 티가 날 정도로 격했다.

전장에서 오랫동안 구른 서문패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렇게 다쳤는데 속아 주진 않아. 게다가 세상 사람이 모두 조카를 비웃는데 가만히 있을 삼촌이 어딨냐?”

“……죄송합니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자 서문패가 다른 것을 물었다.

“네 무사는?”

“함께 싸웠습니다. 많이 다치기도 했지요.”

“너만 다쳤다면 그놈을 쫓아가서 문초했을 거다. 뭐, 그게 아니라면 적마라는 놈만 처죽이면 되겠지.”

적마를 죽이겠다.

저 말에는 떠보거나 으름장을 놓는 구석이 없었다.

마땅히 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만이 가득했다.

또, 깊은 걱정까지.

서문경은 서문패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가 많이 컸구만. 이게 걱정이라는 것도 알고.”

서문패가 히죽 웃으며 본제로 다가갔다.

“가주님께서 네 의중을 물으라고 하시더구나.”

“그건…….”

회귀를 했다거나 천무학관 내부에 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빼고서 말했다.

애초에 믿어 줄 거라 생각지도 않았고, 서문패의 행동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천무학관에 간자가 있다고 들으면…… 아예 뒤집어엎을 텐데.’

그렇게 되면 서문세가와 무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그건 서문경이 원하지 않았다.

“……음, 으음.”

이야기를 줄곧 듣던 서문패가 서문경의 어깨를 붙잡았다.

“윽……!”

“아팠니? 미안하구나. 환자라는 게 티가 안 나서.”

서문패는 크흠, 흠 헛기침하고서 느낀 바를 말했다.

“여기서 마교 같은 잡것과 싸울 시간에 함께 북적을 멸하는 것이 대의에 맞지 않겠느냐?”

‘역시.’

서문세가의 사람이라면 저렇게 말할 줄 알았다.

서문경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찰나에 서문패가 말을 덧붙였다.

“단, 네가 말했지? 천무학관에 다니면서 가전무공을 수정하거나 덧붙이고 있다고.”

“……예.”

“오만한 말이었다. 가전무공이 왜 가전(家傳)이냐? 애가 만지라고 있는 게 아니야. 차라리 병장기를 개조한다고 해라.”

서문패가 잔뜩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놀리다가, 한순간 어조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서문세가의 무공이 전장에서 만들어졌고, 때때로 고쳐졌다는 역사를 부정할 수도 없는 법이지.”

“……?”

“나에게 증명해라. 무림에 남아 있고 싶거든, 이 삼촌이 핑계까진 만들어 줄 수 있으니.”

단.

서문패가 한 가지 제약을 걸었다.

“방금 속이려고 든 것처럼. 날 또 실망시키면 그때는 사지를 분질러서라도 본가에 데려가겠다.”

본가에선 종지그릇이라고 불린다지만, 전장에서는 한족의 무신.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알았다.

전생에선 접점이 적었지만 지금 본 서문패의 기세는 여느 절대고수에게 밀리지 않았다.

‘관존 시절의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중하단전을 극에 이르게 단련한 무인.

최강의 형을 체현하는 의념과 심상에는 미숙하나,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공간을 점할 만하다.

서문경의 표정을 본 서문패가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었다.

“호오…… 예전과는 다르구나.”

“이런 일이 또 있었습니까?”

“너무 어려서 그런가? 하긴, 소가주로 지명된 나이가 여섯이었으니까.”

“……?”

“그땐 네가 내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했거든.”

그 말에는 서문경도 어이가 없었다.

고수의 기세를 정면에서 견딜 꼬마가 어딨단 말인가?

‘정신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짓을 벌이고 예전과는 다르다고 주절거려?’

서문경의 표정을 본 서문패가 황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그렇게 보진 마라. 안 그래도 네 형이 곤장까지 들었으니까.”

“…….”

“에잇, 마당이 어딨느냐?”

“뒷문에 있습니다. 특별히 담이 높은 곳으로 정했지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서문검법은 강인하고 정직하니까.”

“제가 변형한 것은 조금 다를 겁니다.”

“……무림인의 무공처럼 화려하기만 하다면, 내 말처럼 끌려갈 것이다.”

서문패의 경고에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눈이 삐지 않은 이상, 그렇게 될 일은 없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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