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 (3)
“허, 허어억……!”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무림맹의 지객당에서 숨이 넘어갈 듯한 비명이 울렸다.
무림맹에 오가는 물건을 검사하는 남자의 비명이었는데, 상자를 여는 순간 한 가지를 직감했다.
‘아, 평화롭게 살다가 죽긴 글렀구나.’
싸우기 싫어서 내직으로 옮긴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눈앞에 한 남자의 수급(首級:머리)이 담겨, 피범벅인 나무상자가 있었다.
심지어 무슨 조화인지…… 무게가 십 관(37kg)은 되는 것 같다.
“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남자는 헐레벌떡 일어나 지객당주를 찾아가려고 했다.
상자에서 인기척이 나기 전까지는.
“……푸허, 컥.”
방금, 피에 반쯤 잠긴 입에서 난 건가?
남자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린 시절, 밤중에 헛것을 보았을 때가 분연히 떠올랐다.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마성(魔性)이 남자의 몸을 붙잡았다.
그렇게 일각 동안 상자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혹시나 또 움직이면 어떻게 하나, 지금이라도 칼을 들어야 하나, 온갖 번민이 공존했다.
‘어떻게 잘린 목에서 소리가 나겠어? 헛것이었을 거야, 아니, 헛것이겠지. ……제발.’
남자는 깊은 혼란에 빠졌다.
입을 크게 벌려서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상자 겉면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깜짝 놀랄 정체가 적혀 있었다.
적마.
호북성을 혼란에 빠지게 했던 마두의 목이라니!
대경실색한 사이, 거대한 공력을 몸에 두른 무인이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도와주겠네.”
툭툭 두드리는 손짓에 범상치 않은 기운이 담겼다.
전신을 억죄던 마성이 무인의 공력에 씻기듯 사라지는 듯했다.
남자는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무인의 모습을 본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왼쪽 소매를 묶은 도복.
온후한 색을 머금은 눈가에 고목(古木)의 나이테 같은 주름이 휘감겨있다.
나이가 지긋한 외팔의 백전노장이라.
노인이 되어서도 외팔로 무림에서 활동하는 이는 적다.
적어도 남자가 아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지, 진무신검(眞武神劍)!”
“자네처럼 젊은이가 본도를 기억할 줄이야.”
“어찌 세상이 오걸(五傑)을 잊겠습니까?”
현 세대의 강자라고 볼 수 있는 천하십대고수.
그 윗줄에 위치한 절대고수가 바로 오걸이다.
설령 진무신검이 수십 년 동안 무당산에서 두문불출하였다고 한들, 천하가 잊지 않는다.
남자의 달콤한 말에도 진무신검은 쓴웃음만을 지을 뿐이었다.
“장강의 뒷물에 삼켜지지 못한 게 서글플 뿐이네. 이 노구(老軀)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아.”
그 말에 남자는 뒤늦게 상자 안의 머리를 손가락질했다.
“저, 저놈은 죽지 않았습니다!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겠지.”
진무신검은 적마의 머리를 보았다.
두 시선이 마주치자 적마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마성이 빚은 환상이 아니라, 목을 베이고도 살아 있다는 뜻.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역시, 괴력난신이로다.”
과거에 적마의 목을 베고도 목숨을 빼앗지 못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하지만 그를 가장 괴롭게 할 방법은 알고 있었다.
“영산(靈山)의 토지 깊숙이 묻으면 언젠가 메말라 죽을 걸세. 무림맹주와 이야기하여 무당산에 매장하겠네. 잠깐만 기다리게.”
“설마 여기 두실 생각이십니까?”
한번 마성을 경험해서인지, 남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른 이가 보았다면 웃음을 흘렸을지도 모르나 진무신검은 그를 십분 이해했다.
“내가 가지고 가겠네. 한데, 이 상자를 전달한 사람은 누구였나?”
“신분 미상의 남자가 무림맹의 심부름꾼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심부름꾼의 신분은 어찌 되는가?”
“마현이라는 이름으로, 젊고 경박하며 왼쪽 눈 아래에 점이 있는 남자입니다.”
그 말에 진무신검은 미간을 좁혔다.
“……무림맹에 얼마나 지냈는지 아나?”
“잘 모릅니다. 설마 그자가 흉수입니까?”
“모르네.”
진무신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영신투의 부탁으로 무림맹에서 빈객으로 지낸 지 어언 열흘.
그동안 주변을 경계하며 지냈으나 어떠한 마기도 느끼지 못했다.
‘무림맹의 중추에 있을 거라 여겼거늘…… 내 오판이었구나.’
진무신검의 등줄기에 한기가 흘렀다.
외부인과 접촉해도 의심하지 않을 신분, 심부름꾼.
가까운 곳에 그가 있었다.
마교의 칠로두 중 가장 위험하다 여기고 있는 남자.
‘청마, 무슨 꿍꿍이로 적마를 무림맹에 넘긴 것이냐?’
설마 마교에서 내분이라도 일어난 걸까?
진무신검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고민이 깊었다.
자신이 아는 한, 청마는 자기 신분을 노출할 놈이 아니었으니까.
“심부름꾼들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동, 동편에 있습니다!”
그 말에 진무신검은 경공을 펼쳐 마현의 방으로 향했다.
“……이런. 벌써 떠났나.”
온기 하나 남지 않은 방 한가운데에 두 동강 난 검이 있었다.
과거에 자신과 함께 마교에게 대적했던 절대고수.
검치의 애병(愛兵)이었다.
* * *
“이게 웬일이냐?”
양회광은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둔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 무공을 수련하던 삼 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빈둥대던 녀석이 갑자기 저럴 이유가 없었다.
‘누가 돈이라도 걸었나?’
개방도 사이의 도박에 둔걸이 밑천을 챙기려고 대충 하는 척이라도 하는 걸지도 몰라.
양회광의 얼굴을 본 둔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뭐가?”
“척 보면 척이죠. 저 이제 진짜 수련하고 있는 거예요.”
“허, 세상이 망조긴 한가 보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기도 하고?”
“……그렇게 놀림 받을 일입니까?”
“네가 하던 짓을 생각해라.”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자고.
뛰어난 재능이 없었다면 식충이 취급이나 받았을 녀석이다.
그걸 자기도 아는 건지, 둔걸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이제 정신 차렸습니다.”
“누구 때문에?”
“주변에 워낙 잘난 놈들이 많아서, 가만히 있다가는 후개고 뭐고 내쫓길 판 아닙니까?”
그 말에 양회광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보름 사이에 세상이 바뀌고 있었으니까.
천무신동 서문경.
처음에 그의 별호를 두고 서문세가가 너무 오만하다며 수군거렸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마인과 단독으로 싸워 붙잡은 전공만으로 후기지수 중 최강.
천무학관 내부에선 정말로 십팔반무예에 통달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다.
‘이마저도 적마에게 치명상을 입힌 소문을 숨긴 거란 말이지.’
혹시나 둔걸이 이걸 듣고 더 나태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참으로 다행이었다.
오랜 스승으로서, 둔걸의 눈을 보면 안다.
처음 무공에 입문하였을 때 보았던 열의.
더 이상 안주해선 안 되겠다는 향상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양회광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그러니까 내가 처자지 말라고 할 때 열심히 하지! 쯧!”
“솔직히…… 그땐 누구나 만만해 보였습니다.”
“쯧, 오만하긴.”
그러다 문득, 양회광은 별생각 없이 물었다.
“성하민은 어때 보이느냐?”
천무신성 성하민.
그녀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서문경과 다른 의미로 그러했다.
가문이나 문파에 속하지 않은 채 자강(自彊)하여, 명가와 명문의 후기지수를 모두 꺾어 버렸으니까.
지금도 암중에서 성하민의 과거를 캐고 있는 자가 많다고 들었다.
따라서, 둔걸에게 무언가 듣게 된다면 비싸게 팔아먹을 작정이었는데.
“……정말 모르겠습니다.”
“뭐?”
양회광의 눈썹이 휘었다.
나이가 어려 철딱서니가 없다지만, 어렸을 적부터 후개로서 키워온 둔걸이었다.
사람 보는 눈은 충분히 키워 놓았다.
옷감이나 무늬를 보고 출신지까지 파악하는 지식도 가르쳤다.
그런데도 모르겠다니?
그 의문에 둔걸은 신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학관에 자주 출석하진 않았지만, 그때마다 성하민와 친분을 다지려고 했습니다. 오늘처럼 물어볼 때가 있을까봐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보여도, 과거나 속내는 철저하게 감추고 있어요.”
천하는 넓다.
각 지역마다 특색이 된 의복이 있다든지, 된소리가 강한 어조나 고유한 단어가 있기 마련이다.
개방은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부터 키운다.
둔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후개가 될 재능을 지녔기에 더더욱 세세하게 가르쳤다.
하지만 성하민에게 그러한 게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둔걸은 자기 뜻을 내놓았다.
“만일 마교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전 걜 마인이라고 생각했을 거 같아요.”
“그 정도냐?”
양회광의 입에서 켁,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안 그래도 마교 때문에 시름하고 있는데, 과거가 불분명한 여자아이가 눈에 밟힐 줄이야.
‘차라리 서문경이 낫지. 그놈은 군문일지언정 출신이 확실하지 않나.’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성하민이 자길 숨기는데 익숙하다면 둔걸에게 들키지도 않았을 테니까.
‘정말로 마교의 간자 같은 거였으면 산동성 토박이처럼 행동했겠지.’
어린 시절부터 쌓은 조심성과 경계심에 가까울 것이다.
양회광은 둔걸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그 아이, 서문경과 친하다고 하지 않았나?”
“숙소를 하나 구해 주고서 옆집에 산다던데요?”
“……흐음.”
강한 예감이 들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둘에 의해 강호가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양회광이 그 생각을 곱씹는 사이에 둔걸이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아, 사부. 요즘 지켜볼 사람이 생기긴 했어요.”
“누구?”
“남궁세가의 고검. 남궁명이.”
둔걸은 피식 웃으며 하려던 말을 덧붙였다.
“걔, 대협처럼 구는 것과는 달리 여린 놈이거든요.”
* * *
무림맹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고, 개방의 사제가 여러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동안.
서문경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수련과 휴식을 병행했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
사천성에서 노출 당한 것이 컸던 걸까?
마교는 전생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야욕을 드러냈다.
서문경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차라리 다행이었다.
더더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았으니까.
적어도 전생처럼 강호의 삼분지 일을 먹어치우진 못할 것이다.
“……후우.”
서문경은 차가운 헝겊으로 전신을 식혔다.
다친 몸을 혹사해서인가, 열이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내려가길 반복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주백경으로선 참으로 곡할 노릇이었다.
“공자님, 전장에 나갈 사람도 몸을 그리 험하게 쓰진 않습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담정이 끼어들었지만, 만약 다음에 적마와 다시 싸우게 되면 어쩌려고?”
“…….”
주백경은 저도 모르게 적마의 마공을 떠올렸다.
휘두른 순간 사혈에 도달해 있는 강기.
그걸 귀갑검진으로 힘겹게 막아 내면서 신음하지 않았던가?
그마저도 척안룡 담정이라는 절대고수와 싸우면서 가볍게 던진 초식이었으니.
“……솔직히 두렵습니다.”
“왜, 호위 그만두게?”
서문경은 농담을 던지듯 피식 웃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이제 와서 주 무사가 빠지면 곤란한데…….’
호북성 무한.
서문세가와 한참이나 동 떨어진 무림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주백경이었다.
그가 자신을 떠나게 되면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는데…… 가히 불가능했다.
당장 떠올려 보자면 천무학관과 무림맹, 서문세가에서 올 연락.
서문경의 웃음이 점차 굳어졌다.
“왜 대답이 없어? 정말 본가로 돌아가게?”
“……하하.”
그 말에 주백경은 뒤늦게 웃어젖혔다.
잠시 어린 주군의 얼굴을 살폈는데, 역시나. 자신이 필요한 듯했다.
“역시 제가 없으면 안 되지요?”
“물론이지.”
그렇게 말한 서문경은 주백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슬슬 본가에서 누가 올 때가 됐으니까, 우리가 이룬 것을 보여 주자고.”
가전무공인 서문검법과 창법의 개량 및 발전.
또, 적마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진실까지.
이 모든 것을 들으면 서문이현이 뭐라고 반응할까?
서문경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