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 (2)
“많이 놀란 모양이군. 검치와 친한 사이였나?”
“……그건 아니지만, 이상하다고 여기긴 했습니다.”
처음부터 검치의 존재가 미심쩍긴 했다.
마교가 중원을 침범하여 세상을 불태우는데 어느 은자(隱者)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단언컨대, 신비문파라고 하는 것들도 모두 하산하여 정의맹에 합류했다.
그 속에서 검치만 한 고수가 있었다면…….
‘반드시 기억했겠지.’
마교와의 전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나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마인이었을 줄이야.
그러한 과거를 가지고도 서문세가 앞에 떡하니 은거하고 있었다니.
‘본가를 우습게 보았나?’
서문경의 표정을 본 양회광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 원랜 자네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네. 현 무림에서 아는 사람이 열 명도 되지 않는 비밀이니까.”
분위기를 희석하기 위해 꺼낸 진실이었다.
양회광은 서문경의 전신을 훑었다.
저렇게 다치고도 멀쩡히 천무학관에 등교하였고 검치의 정체를 듣고 분노하는 기세가 남달랐다.
그의 나이가 겨우 열넷.
앞으로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서문경에게 큰 투자를 해야 친한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다.
양회광의 얼굴에 겸연쩍은 미소가 담겼다.
“처음엔 자네 나이나 망나니랑 소문만 듣고 함부로 대했었지. 사죄함세. 호북성 분타주의 주둥이를 열게 만드는 경지라면 나이가 무슨 생각이겠나?”
“서두가 긴 걸 보니 갑(甲)급 비밀이라도 됐습니까? 금칠은 그만하지요.”
그 말에 양회광의 눈가가 가늘어진다.
갑을병정.
정보의 질을 따라서 개방이 붙이는 등급을 서문경이 뻔히 알고 있다.
그것도 단순히 떠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본제로 들어가자고 채근하듯.
‘현 서문세가의 가주가 서문이현이라고 했던가? 무시무시한 재목을 강호에 심었군……!’
저만한 재목이라면 가문의 정원에서 키워야 정상이거늘.
험난한 강호로 내보낸 이유가 가늠이 되질 않아서 왼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양회광은 오른손으로 돋아난 소름을 감추곤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허허…… 그럼 현 마교가 어떤 상태부터.”
“아니, 그것도 알아.”
“……?”
양회광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경에게 양귀비 암거래의 정황을 듣고서 보름 동안.
개방은 마교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비 인원까지 모두 다해서 총력을 한 건 역사상 두어 번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본가와 연락을 쉽게 취할 수 없는 서문경이?
“그래도 내 말을 들어 보는 게…….”
“과거에 이름을 잃은 사교부터 소수민족, 만신(萬神)을 믿는 종자, 배화교까지 뭉쳐 있지 않나. 토벌 당한 경험을 한데 모아서 수십 년 동안 강호에 싹을 심어 놓은 상태지. 개방도 자유롭지 않고.”
“…….”
양회광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전사(前事:과거)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사라졌다지만, 서문세가가 저기까지 조사를 마쳤을 줄이야.
그들이 군부의 가장 윗줄에 있다지만 정보력까지 밀려서야 개방의 이름이 우스워진다.
‘……이거, 마교가 아니었다면 무림이 위험해졌겠군.’
저만한 능력을 지녔는데 힘 좀 가졌다는 왈패들이 떵떵거리고 있는 꼴을 보면 칼이라도 뽑지 않겠는가?
양회광은 서문세가를 머리 굳은 군문이라고 여기고 있던 생각을 지웠다.
“검마는…….”
* * *
시시한 이야기다.
부모 잃은 고아가 가게 되는 곳이 대부분 그렇지만, 검치의 경우에는 최악이었다.
하루에 두 시진을 제외하면 항상 암실(暗室)인 토굴.
어느날 정신을 잃고 나니 그곳에 있었다.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어져 당황한 사이, 어둠속에서 거대한 울림이 몰려왔다.
“넌 앞으로 십칠 호다. 서로 이름을 교환하는 일은 없도록.”
십칠 호.
어린 고아에게 새로 주어진 이름이었고.
자신 외에도 똑같은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 많았다.
“……들었지?”
“곧 있으면 사냥 시간이야. 얼 타지 말고 움직여.”
서로 이름도 모르는 고아들끼리 한데 뭉쳐 어딘가에서 달려드는 짐승을 사냥한다.
구워 먹는 향락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무조건 날로 먹어야 했고, 가끔 천장에서 환약이 떨어졌다.
아이들은 그것을 두고 경쟁했다.
“내놔!”
“야, 양보해 줘…… 오늘 놓치면 나는…….”
“내가 알 바야?”
짐승을 생식하는 것만으로 채울 수 없는 무언가.
그것이 환약에 담겨 있었다.
삼십 일 넘게 먹지 못하면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다들 그렇게 여겼지만, 십칠 호는 달랐다.
‘짐승들에게 주입한 독을 환약으로 중화하는 거야.’
십칠 호의 부모는 본래 산골에 살던 약방 주인이었다.
약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었고, 의서를 어느 정도 읽었다.
이 암실에서는 아주 조금이라도 더 아는 것이 힘이었다.
물론 그 기반에는 남다른 힘도 존재했다.
“십칠 호, 저 자식. 눈이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움직임이…… 못 따라잡겠어.”
아무것도 몰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약학을 지닌 이유.
남들보다 비대한 상단전과 쇠심줄 같은 근육을 타고났다.
그 덕택에 칠흑 같이 어두운 암실에서도 눈이 빠르게 적응하고 육감으로 위험을 피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십칠 호, 너는 마도관으로 간다.”
처음에 저 말을 듣고 모두가 환호했다.
토굴에서 해방되어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묻어라.”
“……!”
“자, 잠깐만요! 이건 아니잖아요!”
모두가 파묻히는 와중에 십칠 호는 지금까지 모은 환약을 챙겼다.
언젠가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으니까.
그 예견은 토굴에서 발달한 상단전과 육감이 빚어낸 것이었고.
“어딜…… 고아 새끼가 잘난 듯이! 고통스럽게 뒈져라!”
자기가 귀한 가문 출신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놈에게 하독당했다.
다행히도, 토굴에서 당했던 독은 마도관에서도 흔했다.
환약을 삼키고 나니 우스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런 쓰레기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독 때문에 몇 명이 죽었는데…….’
회의감이 들었다.
누구보다 잘나서 살아남았다는 생각보다 점차 이곳이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 십수 년.
십칠 호는 검마가 되어.
“신교의 위대한 탄생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다.”
수많은 고아가 붙잡혀 있는 것을 보았다.
저들은 머지않아 마공을 시험하기 위한 희생양이나 제물로 쓰일 터다.
회의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그 아이들 또한 이름을 잃고서 삼만칠 호 같은 것으로 불렸다.
‘내가 십칠 호였지.’
언제 저렇게 숫자가 늘어났을까?
우스워서 끅끅 웃었다.
애써 무게를 잡으며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세월이 떠올라서 크게 웃었다.
“난 어리석은(痴) 놈이었구나.”
마를 버리고 치를 택하기로 하였다.
이건 누군가에게 받은 이름이 아니라, 검마가 스스로 택한 이름이었다.
끼이익……!
검마는 철문을 열었다.
문을 지키는 마인을 섬멸하며 길을 열었다.
그 와중에 두 고수와 연을 맺었고, 마교와 싸우다가 패하였다.
그날 이후에야 알았다.
마교에서 탈출한 아이들 사이에 신교의 부활에 필요한 육신이 있었다는 것을.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설마 알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검치는 입김을 불었다.
서문경의 매서운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어린 나이임에도 많은 것을 아는 모습이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해서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한마디가 떠올라,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또, 또 싸우자고 하는 건가.”
무영신투와 검치, 진무신검.
세 절대고수가 뭉쳐도 마교의 살은커녕 피부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린 소년이 의지를 다져 봐야 무슨 소용일까?
‘내가 검마였다는 걸 알고 부탁한 거겠지, 아마.’
비록 과거라지만 마교를 아는 유일한 무림인.
자신이 협력하면 많은 도움을 받게 되리란 생각이었겠지만, 글쎄.
바람을 견디다가 꺾인 갈대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검치는 여러 복잡한 생각을 품다가 고개를 털었다.
제자가 있었다.
자신처럼 비루하고 시시콜콜한 사연을 가진 제자가.
“기다리고 있겠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
검치의 발걸음이 사천성 방향으로 향했다.
* * *
“검치의 과거사가 이러해서 극소수 밖에 알지 못하네.”
“……음.”
서문경은 양회광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얼굴을 굳혔다.
검치가 그런 과거사를 가지고 있었다면, 전생에서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하다.
‘청마가 추적하고 있을 텐데. 이미 쫓아가서 말해 주기엔 늦었나.’
청마.
귀한 태생 덕분에 승승장구한 적마와는 다르다.
그놈은 음험한 곳에서 사냥감을 노리다가, 적기에 목을 취한다. 어쩌면 지금도 사천성에서 은거한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문경이 여러 생각에 잠긴 사이, 양회광이 입술을 달싹였다.
“검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쉽게 도와주진 않을 걸세. 과거에 마교와 대적하고서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으니까.”
“……그렇습니까?”
내심 아쉬웠다.
그만한 고수가 합류한다면 무림인 수백을 대신하고도 남으니까.
서문경은 대놓고 아쉽다는 듯 쩝쩝거렸다.
“여러 번 찾아가서 설득하면 통하지 않겠습니까?”
“진무신검께서 이미 그러한 전적이 있으나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고 하네.”
“진무신검이라.”
진무신검(眞武神劍).
무당파의 전대 장로로 오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절대고수.
전생에선 그가 외팔인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는데, 이제야 그 속사정을 알 것 같았다.
‘검치를 설득하려면 언제 무당파에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게 좋겠는데.’
지금 당장은 호북성에서 발을 뗄 수가 없는 노릇이니.
서문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양회광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밤이 깊어지는 사이에 완연한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커윽, 큭.”
가슴을 관통당한 적마는 피를 한 됫박이나 토했다.
방심했다.
척안룡을 완전히 따돌리고서 마교의 은신처로 향했는데, 설마 다른 고수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검마, 네 이놈……!”
“그 이름은 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나?”
검치가 손을 뻗자 적마의 가슴을 관통했던 칼이 되돌아왔다.
극에 이른 상단전 운용.
과거에 마교를 떠들썩하게 했던 무공, 번천광검결의 일검이다.
적마의 눈가에 기이한 열기가 도드라졌다.
“동귀어진이 두렵지 않으냐?”
“……두렵지. 누가 죽음이 두렵지 않겠느냐.”
검치는 차분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상단전의 창구라고 할 수 있는 눈이 적마의 전신을 탐색했다.
눈동자 안쪽에서 시퍼런 공력이 번뜩였다.
번천광검결과 비견될 수준의 안법은 마도 고수마저 꿰뚫었다.
“하지만 네놈을 여기서 놓치면 더 처참하게 죽을 것 같으니, 미리 죽이려는 거다.”
“큭!”
적마가 피를 다시 토하며 마기를 끌어올렸다.
그러다가 서문경이 입혔던 치명상에서 군데군데 끊어졌다.
“그 애새끼만 아니었어도……!”
척안룡 담정마저도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건만.
너무 서문경을 무시했다.
의념절기를 소년이 펼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기서 죽게 되는가?
적마는 고개를 뒤흔들었다.
“죽지 않는다……! 여기서 모든 걸 잃게 될지언정, 발버둥 치겠다!”
타고난 신혈이 적마에게 생존하라고 우짖는다.
그걸 본 검치가 희미하게 웃었다.
“평소엔 그리 고고한 척하는 놈이 살고자 하는 집착엔 솔직하군.”
검치의 목소리에 거대한 공력이 실려 있었다.
그 다음 순간.
서걱!
적마의 목이 땅바닥을 허무하게 뒹굴고 나서야,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검치는 뒤늦게 등장한 남자를 보고 기괴한 웃음을 드러냈다.
그 다음 날.
적마의 목이 상자에 담겨져 무림맹에 도착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