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57화 (55/250)

무림맹 (1)

두 검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수처럼 위아래를 훑어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고수를 판별하려거든 눈동자를 들여다보라고 하였으니.

“……호오.”

검치는 서문경의 성장에 경탄했다.

눈동자에 담긴 정광(晶光).

상단전 수련이 일정 수준에 이르러, 심상의 창구라고 할 수 있는 눈동자까지 의기(意氣)가 도달해 있다.

“석년(昔年)의 나를 보는 듯해, 장하구만.”

“석년이라기엔 너무 먼 과거 아닙니까?”

“어른이 말하는데 그렇게 딴죽을 걸어서야 이쁨 받지 못할 것이다.”

검치는 히죽 웃으며 술을 채워 달라는 듯 주백경에게 잔을 내밀었다.

소년이 짧은 시간 동안 저렇게 장성한 모습을 보니 어른으로서 가슴이 뿌듯해졌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이쁨 받고 싶을 짓을 해야 대접을 하지요.”

“……응?”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 호위무사를 왜 시종처럼 부리고 있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의 목소리가 제법 매서웠다.

말에 담긴 힘으로 상대를 짓누를 경지에 도달해 있다.

가히 전신을 휘감은 붕대에, 누군가와 싸우고 온 듯 머리카락이 땀에 푹 젖었을지언정 기개는 강건했다.

“술은 스스로 따라 드십시오. 손님이어도 중상인 사람을 데려다가 그러지 말고.”

“……아니, 이건. 흠.”

오해가 생겼다.

검치는 곤혹스러운 감정을 속으로 감췄다.

사실은 이게 더 즐거웠다.

서로 안부를 물으며 차나 처마시고 점잔 빼는 것보다 으르렁거리다 검을 나누는 것이 무인 아니겠는가?

검치는 한쪽 입술을 이죽거렸다.

“내가 그러기 싫다면 어쩌려고?”

“개가 뒷구멍으로 들어왔으면 부지깽이로 때려서 쫓아내야지요.”

“개? 부지깽이?”

“노견(老犬)이라고 해드릴까?”

“허, 누가 명가의 공자님 아니랄까 봐 설검(舌劍)도 매섭구나.”

가볍게 꾸짖는 걸로 끝나는 줄 알았더니, 서문경의 혀가 제법 날카롭다.

검치는 이 말싸움조차 즐거워서 끌끌 웃었다.

‘이러려고 찾아온 건 아니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 않지.’

눈동자의 정광을 보고 흥미가 돋았다.

이곳으로 오면서 들은 소문의 진위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그 도둑놈이 누굴 대신해서 마교와 싸울 만큼 담대하지 않은데 말이지.’

그래도 서문경이 직접 싸웠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옥화산에서 마주쳤던 적마는 오걸을 쉽사리 꺾을 만큼 강인했으니까.

허나 지금 저 정광과 여전히 더러운 싹수를 보자니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스릉…….

검치가 먼저 칼을 뽑자, 서문경도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주백경이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하십시오.”

“……네가 모욕당했는데도?”

“그런 게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상황이 꼬인 걸까?

주백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제가 먼저 공격했었습니다.”

“……뭐?”

그 말엔 서문경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 *

“……옥화산에서 적마와 싸우셨다고요?”

“그래. 산이 먼저 무너져서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지만, 깊은 내상을 입혔으니 제 기량은 못 펼쳤을 거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적마가 왜 그토록 분노하고도 적영창만 날렸는지 깨달았다.

만전의 상태였다면 적혈마공뿐만 아니라 다른 마공도 펼쳤을 테니까.

서문경은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그리 말하시지.”

“너나 여기 있는 놈이나, 자기가 좀 아프다고 남들한테 온갖 X랄을 부려서야 무슨…… 쯧!”

검치가 문을 열자마자 날아온 주백경의 급습.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어서 막았고, 집요하게 사혈을 공격하기에 화가 났다고 실토했다.

“아니, 내 얼굴을 보고도 자꾸 낭심이나 거궐혈 같은 지저분한 곳이나 노리는데 화가 안 나면 배겨?”

“그게…… 저는 선배가 마교에 속한 적이라고 착각해서…….”

“막으면서 아니라고도 말했지?”

“어느 악인이 거짓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죄송하다고 말해라, 딱 절반만큼 죽여 버리기 전에.”

“죄송합니다.”

주백경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술을 잔에 따랐다.

부끄러운 일이긴 하나 잘못했다고 여기진 않았다.

그 기색을 검치가 모를 리가 없다.

그저 예나 지금이나 답답한 놈인 건 여전하다고 씨부렁거렸다.

“하여튼 군부에 속한 무사 놈들은 다 저래. 지가 잘못을 해놓고 절차가 어쩌고, 저쩌고, 내 기분은 누가 해결해?”

“그래서 이렇게 좋은 술을…….”

“야, 내가 좋은 술을 대접이라고 여길 수준이냐?”

“…….”

주백경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물론 거기에도 진심은 없어서, 검치가 학을 떼었다는 듯 혀를 찼다.

“X병할 놈. 그저 서문세가에 충성해서 아주 오래 살겠다 요놈아!”

“용서해 주십시오.”

주백경이 빈말을 일삼는 사이, 서문경은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냈다.

“그럼 마교에선 옥화산의 일을 선배께서 무너뜨린 걸로 안 겁니까?”

“그렇지. 보기 좋게 네가 한 짓을 덤터기 쓴 거야!”

쿵!

검치는 항하리목으로 만들어진 식탁을 두드리며 온갖 생색을 냈다.

“내기 하나 지키겠다고 마교랑 척을 지게 생겼다. 어떻게 해결해 줄 거냐? 보상은 또 어떻고?”

“해결이나 보상이나 어찌 되든 마교는 선배를 노리지 않겠습니까?”

“어, 이놈 보게.”

검치는 음험한 미소를 흘렸다.

서문경을 그저 당돌한 소년으로 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자기 가문에서 살았을 원숭이가 마교의 행사에 어찌 그리 박식한 거냐?”

“선배의 고생을 모르는 척 넘기는 것보다 이게 나으니까요.”

서문경은 검치와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품고 있던 생각을 꺼냈다.

“마교와 함께 싸우지 않겠습니까?”

“…….”

“선배 같은 무림고수와 군부, 관이 모두 힘을 합한다면 적어도 최악은 면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을 위한 두 번째 삶이 아니던가?

서문경은 대답을 갈구하듯 끈질긴 눈빛으로 검치를 압박했다.

그는 자신의 목 아래를 흘낏 보았다.

어제 입은 자상과 더불어 남궁경과의 비무로 시뻘게진 붕대가 옷까지 적시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내가 본 넌, 그리 선량하지도 않고 대의를 주절거릴 정도로 고리타분한 놈도 아니었는데.”

“…….”

잠시 할 말을 고르는 사이에도 검치의 질문은 이어졌다.

“설마 네 본가가 군부라서 그러는 거냐? 대명에 충성하기 위해서, 무림과 원하지 않는 동맹을 청하려는 거라면…….”

“그게 아닙니다.”

서문경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생각했다.

분명, 전생이었다면 저 말에 긍정했을 터였다.

무림인은 실전성 없는 무예를 수련하며 스스로 위안하는 족속으로 여겼고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는 호족이라고 여겼으니까.

후자는 두 번째 삶을 구가하는 지금도 똑같다.

하지만 마교라는 대적 앞에서 손을 가릴 이유가 없다.

세상을 불태우겠다는 미친놈이나 달을 숭배하는 괴력난신을 처죽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만약 그랬다면, 저 혼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전생과 길을 달리한다. 서문세가의 소가주로서 거들먹거리던 고수가 아니라, 천무학관에 입관한 후기지수부터 시작한다.

서문경은 대의나 영웅심 같은 단어는 꺼내지도 않았다.

지극히 단순하게 말했다.

“마교가 있으면 두 발 뻗고 잘 수 없으니까, 그걸론 부족합니까?”

“……푸흡, 푸하하하!”

그 말에 검치가 대소를 터트렸다.

그는 마시려던 술잔조차 탁자에 내려놓은 채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천하에서 오걸이니 십대고수라고 하는 것들도 마교와 대적하길 두려워할 텐데, 너 같은 애가? 무슨 말을 입에 담은 건지 아느냐?”

“적마 같은 마도 고수 일곱과 싸우고, 언제부터 심었을지 모를 간자들과 싸워야겠지요.”

“…….”

적마의 말수가 급격하게 적어졌다.

머릿속에 고민이 가득할 것이다.

아마, 서문세가 내부에서 이미 조사가 끝났다고 추론할 테지.

서문경은 그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검치를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괜한 허세라도 부릴 수 있었다.

“선배도 어렴풋이 깨닫지 않았습니까? 내가 적마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것을. 선배가 돕는다면…….”

“……그만.”

더 이상은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검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씁쓰레한 미소로 본심을 감추는 것처럼 보였다.

“사천성에 돌아오면 놀러 오너라. 거절한 대신 술이라도 한잔 주마.”

그 말이 끝이었다.

검치는 서문경에게 등을 보인 채 숙소 밖으로 나갔다.

* * *

스륵, 탁.

문을 닫은 검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강호의 공기였다.

기름으로 닦은 칼집의 냄새, 어딘가에서 풍기는 혈향과 욕지거리.

부쩍 여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봄날의 냉기는 가시고 열기가 살갗을 푹푹 찔러 왔다.

그러다가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패배자끼리 회합이나 하자는 건가?”

“……그건 아니고. 잠깐 이야기나 하자는 거지.”

어두운 골목에서 무영신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치에게 무영신투란 좋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동료였다.

쉽게 말해, 어울리고 싶지도 않다.

검치는 차가운 얼굴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한참 전부터 엿듣고 있었다는 건 알았다. 왜, 너도 마교와 싸우잔 말이나 주절거릴 셈이냐?”

“…….”

“같잖은 위안이나 얻자고 무사부로 있었겠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무영신투의 가슴을 연신 찔러 댔다.

검치와 무영신투, 그리고 또 다른 오걸.

셋이서 마교와 싸웠던 과거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많은 희생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검치는 자신의 과거조차 잃었다.

“옛 정이 있어서 이 만큼이나 인내했다.”

“……네 성질이야 알지.”

“알고도?”

“그래.”

무영신투는 회한에 잠긴 검치와 똑바로 마주했다.

“그놈은 다시 싸우기로 했다.”

“……뭐?”

“하물며, 저기 있는 애조차 마교와 싸우겠다고 했지.”

“…….”

“다시 생각해봐라. 그리고 결정해.”

그 말을 끝으로 무영신투가 자취를 감췄다.

홀로 남은 검치는 생각에 잠겼다.

과거에 셋이서 마교와 싸우던 때를 떠올렸다.

‘……제기랄, 나 보고 어쩌라는 거냐.’

그저 호기나 대의로 움직이던 시절은 이미 지나지 않았나.

검치는 밤새 제자리에서 하늘을 노려보다가,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떠났다.

* * *

이른 아침.

양회광은 서문경의 숙소에 들렀다.

가히 수백 일 만의 외출이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제 검치가 다녀갔다고 들었네.”

“예.”

짧게 대답하는 서문경의 눈빛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그건 양회광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쩌다가 검치와 연을 맺은 건가?”

“……그게 신기할 일입니까?”

“그렇지.”

양회광은 서문경이 소스라칠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검치는 과거에 검마(劍魔)라고 불린 마인이니까. 불과 한 시진 전에 무림맹과 무당파, 제갈세가에 전서구를 돌리고 왔네.”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서문경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양회광이 잠시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계산이 선 듯 입술을 달싹였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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