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 (5)
서문경을 본 성하민은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입술을 삐쭉였다.
“하여튼…… 얌전히 쉬라고 했잖아? 그 몸으로 무슨 비무야?”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걷는 것조차 힘겨울 내상일 텐데.
서문경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움직이면서 희미한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뭐 어때, 다들 무영신투가 싸운 걸로 알 텐데.”
마교와 싸운 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미련하게 보여서.
성하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경이한테 듣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오해하고 있었겠지…….’
사천성에서 생긴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진 게 참으로 다행이다.
성하민의 시선이 잠시 서문경의 어깨에 머물렀다.
“벌써 움직이니까 상처가 아물질 않잖아.”
“아, 어쩐지 축축하다 싶더니만.”
“잠깐 있어 봐.”
미처 아물지 않은 자상에서 피라도 흐른 걸까?
서문경의 어깨에 손을 대니 핏물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그걸 본 성하민은 주위를 한차례 돌아보았다.
혹시 무사부가 있다면 이놈의 고집 좀 꺾어 달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말려 줄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없진 않았다는 뜻이다.
“뭐야, 상처가 심하다더니 움직일 수 있네?”
양무연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녀의 상식에 중상이나 경상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까 붕대에 피 좀 흘렸다고 한들, 움직일 수 있으면 정상이라는 생각이겠지.
‘어떻게 동기 중에 정상적인 사람이 없을까?’
아까부터 말없이 따라오는 둔걸이나 눈앞의 양무연까지.
당최 서문경의 중상을 보고도 말릴 기색이 없다.
특히 양무연은 전날 있었던 소란에 고양감마저 생긴 듯했다.
“적마한테 이겼다며?”
“이긴 건 아니고, 상처를 입힌 건데…… 애초에 무영신투가 나 대신 싸웠다니까.”
“세상 사람은 속여도 나한텐 아니지.”
성하민은 양무연과 서문경의 대화를 들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저렇게 몸을 축내면서 적마와 싸운 공을 인정받지도 못하는 게 너무 못마땅했다.
“그럼 세상에 말하면 되잖아. 왜 그대로 두는 거야?”
그 말에 서문경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명성에 초연한 듯, 웃음을 참는 듯하다가, 깜짝 놀랄 한마디를 덧붙였다.
“알아줄 사람만 알아주면 돼.”
“……뭐?”
“그거면 됐다고.”
성하민은 우두커니 서서 서문경의 말뜻을 천천히 곱씹었다.
쿵, 쿵.
설레는 마음과 함께 시커먼 것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적마와 싸운 것을 어찌 알았냐고 물었던 어제.
그때 성하민은 다른 말로 둘러댔다.
정확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말할 수나 있을까?
그 생각에 가슴의 고동이 느려졌다.
달큰하던 미소도 점차 씁쓰레해졌다.
“……여기서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있을 순 없겠지.”
누구도 들리지 않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양무연이나 성하민처럼 서문경의 악소문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완전히 등을 돌리는 동기도 분명히 존재했다.
“……실망이오!”
고검 남궁명.
첫인상이 주백경처럼 꼬장꼬장하게 보였는데, 역시나 부정한 소문을 듣고 생각이 바뀐 듯했다.
서문경은 등 돌리는 남궁명을 보곤 턱을 매만졌다.
‘남궁세가라면 소문의 진위를 조사할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믿고 싶은 걸 보기 마련인가.’
자기 후기지수랑 같은 나이에 의념절기를 쓰는 천재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걸 인정하면 새로운 천하십대고수의 탄생을 기다리잔 뜻이니까.
‘그래도 내 경지를 확인하려는 수작질은 해 보겠지.’
권문세가가 왜 권문세가인가?
자기 지역의 상권을 틀어쥐고서 현령 여럿과 교섭하여, 권세를 유지하는 것부터 기초한다.
쉽게 말해 심부름시킬 손이 많다는 소리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지저분한 일까지도.
‘소년한테 협잡질하는 게 보통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손을 구하는데 며칠은 걸리겠다만, 금방이겠지.’
어쩌면 눈앞의 남궁명에게 비무를 해 보라고 시켰을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점차 모여드는 동기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무사부가 오길 기다렸다.
대부분은 남궁명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언젠가 이럴 줄 알았죠. 내가 무슨 기대를 한 건지.”
검봉 유화는 조소를 머금으며 자리를 피했고.
“언제 시간 남으면 나랑 객잔에나 가지 않겠나?”
어제 생긴 소란을 이용해서 관심이나 낚아 보려는 운룡 청겸이 저러했다.
물론 눈빛은 곱지 않았다.
다만, 저 셋 외에는 서문경에게 호의적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많이 다쳤다고 들었네만, 왜 쉬지 않았나?”
연준호가 깜짝 놀라서 의무실로 데려가는 걸 억지로 만류했다.
오늘은 의무실에서 얌전히 쉴 때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자네, 몸이 그렇게 되어서도 책은 꿋꿋이 들고 다니는구먼.”
참으로 기가 막힌다는 시선이 무공사전에 여럿 꽂힌다.
붕대로 목 아래까지 휘감은 놈이 왼손에 오래된 책을 끼고 다니는 게 정상으로 보이지 않을 테니까.
서문경은 그 시선을 어색한 미소로 받아냈다.
‘그동안 주변을 경계하느라 무공사전에 미진한 걸, 오늘 채워야지.’
모름지기 병법의 기본은 자신이 자리한 곳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
그 이론에 따르기 위해 지난 보름을 호북성 무한의 지리와 세력도를 조사했다.
동기의 무공을 수집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마교가 활개치지 않게끔 양귀비 거래를 막고 적마를 몰아내지 않았나.
이제는 내실을 다질 때다.
서문경의 시선이 비무장으로 향했다.
“오늘 비무 말이야. 상대를 각자 정하는 건가?”
그 말에 연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듣기로는 그러네만. 정확한 건 정현 무사부께서 와야겠지.”
“정현?”
“아, 자네는 듣는 수업이 잡기 밖에 없었지.”
무사부 정현.
소림사에서 차출한 외공의 고수이자 권법가.
그의 높은 덕망은 천무학관 내에서 유명하여 많은 관원이 따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까지가 연준호의 설명이었다.
“소림사의 비전까진 아니어도 기초 외공을 배울 수 있으니까 많이들 수업에 지원하지. 자네는 아니지만 말이야.”
“그랬구나.”
정작 서문경에겐 심드렁한 내용이었다.
외공의 고수라고 한들 전장에서 한평생 사는 서문세가에 비할 수 없다고 여겼으니까.
오히려 그들이 가진 불법에 대한 집념은 마교와의 전쟁에서 독이 되었다.
‘높은 덕망이나 성품 같은 건 언제 개조를 해야 하는데.’
서문경은 시커먼 생각을 품은 채 멀리서 다가오는 정현을 발견했다.
누가 소림사의 고수 아니랄까 봐 허름한 가사에 주먹 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아 있었다.
하물며 주먹은 어떠한가?
나한권으로 금강석을 부순다는 수련이 과언이 아닌지, 굳은살이 겹겹이 박혀 있었다.
그에 비해 인상은 너무 순박하고 선량하여 어울리지 않았다.
“모두들 모였구나.”
당장 설법이라도 할 것 같은 어조는 주변에서 사슴이 뛰어놀아도 이상하지 않다.
서문경은 큰 하품을 내쉬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여전히 소림사가 싫네.’
전생에서 마교와 싸우면서 얼마나 많은 소릴 들었던가?
이건 저래서 안 된다.
저건 계율에 어긋나서 못한다.
하물며 황실에서 화약을 쓰자는 결단을 내리자, 대놓고 황도에서 무릎을 꿇고 반대하기도 했다.
‘언제…… 악(惡)을 주입시켜야…….’
실없는 생각을 품던 찰나에 정현이 큰 귀를 펄럭였다.
“저 아이는 처음 보는구나. 이름을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서문경이라고 합니다.”
“경(經)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언제 금강경을 받아 가지 않겠느냐? 좋은 가르침이 되어 줄 것이다.”
저 말을 계속 듣자니 팔뚝에 소름이 돋을 것 같다.
서문경은 저절로 몸서리치며 다른 화제로 돌렸다.
“오늘 비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끼리 상대를 정해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본래 그러려고 했지만…….”
“했지만?”
“네 용태를 보니 자칫 잘못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아, 내가 관여해야겠구나.”
자칫 잘못하면 서문경에게 악심을 품은 누군가가 큰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
정현은 서문경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흘렸지만, 정작 장본인은 꺼림칙하기만 했다.
“그, 그냥 우리끼리 해도 되는데요.”
“내가 상대를 정해 주마.”
그렇게 말한 정현이 여덟 명의 후기지수를 돌아보았다.
서문경은 그 시선에서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아차렸다.
보나 마나 가장 살기가 미약한 무공과 붙여 주려는 심산이다.
‘본가의 가전무공과 제일 안 어울리는 게 도가인데…….’
이러다간 여기까지 온 목적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다급히 바로 옆에 있는 동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 저는 이 친구와 비무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정현이 정해 주는 것보다 낫겠다는 마음으로 움직였는데.
“……내가 언제 그랬소?”
남궁명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서문경은 자기도 모르게 남궁명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되나?
-내가 왜 그래야 하오?
-궁금할 테니까. 내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그 말에 남궁명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연갈색 눈동자에 한순간 놀라움이 스쳤다.
어려서 그런지 아직 표정을 숨기는 것이 능숙하지 않았다.
서문경은 그 지점을 찔렀다.
-혹시 겁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서문경이 던진 도발에 남궁명은 선뜻 발을 내밀었다.
솔직히 말해, 양무연과의 비무를 지켜보며 호기심이 치밀었다.
서문세가가 정녕 무예십팔반 모두에 정통했을까?
강호의 무공에 대한 파해법을 안다는 게 사실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과연…….
-백련에게는 통했을지라도, 나에겐 그러지 못할 거요.
양무연에겐 양가창법으로 이겼지만, 자신에겐 그러지 못할 것이다.
남궁명은 무인으로서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자긍심을 가지고서 비무장에 올라갔다.
정현이 말릴 새도 없었다.
카앙!
서문경이 칼을 빼 든 속도는 눈이 아니라 감각에 의지해야 할 정도였다.
“……허.”
헛숨을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극에 이른 검사는 짧게 휘둘러도 검의를 담는다는데,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서문세가의 가전검법.
여섯 초식을 어젯밤에 미리 조사하고 왔음에도 완벽하게 막지 못했다.
까득!
손목이 꺾여서 쓰라렸다.
인대가 늘어난 것 같았지만, 인내하고서 패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쉽지 않을 거요.”
“……그래.”
서문경의 목소리엔 호승심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즐거운 것처럼 들렸다.
창궁무애검법과 서문검법.
뿌리가 다른 두 검법의 격렬한 부딪침, 두 검이 자아내는 검무 자체가 흥미롭다는 듯이.
‘……과연, 이래서 천무신동인가.’
남궁명은 왠지 모를 패배감을 꾹 억누르고서 서문경과 초식을 연거푸 교환했다.
비무장의 땅을 때리고서 달려들어 일초, 당연히 받아치는 것을 발길질로 견제하여 이초, 서문경의 걸음 사이에 검초를 집어넣어서 삼초.
찰나 사이를 서로 비집었다.
점차 호흡은 줄어들고 땀방울이 비무장을 두드렸다.
철의 대화였다.
서문경이 요혈을 노리는 제비라면, 남궁명은 우직하게 철을 깎아 내는 대장장이였다.
“경이가 다친 걸 노리고 있나?”
“비겁하다고 볼 순 없겠지. 먼저 비무하기로 약속했다니까.”
두 동기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저 말이 맞았다.
남궁명은 강한 검력으로 서문경을 짓눌러, 스스로 포기하길 바랐다.
자그마한 악의가 있기도 했다.
‘언제까지 즐거울 수 있겠소?’
처음부터 지금까지, 서문경은 이기기 위한 움직임보다 검무를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이 무언가 열패감을 자극했다.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공 자체를 즐기는 사람처럼 보여서.
소가주의 짐을 훌훌 털어 버린 그가 부러워질까봐.
그래서 남궁명은 서문경이 꺾이길 바랐지만…….
“즐거웠어.”
서문경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