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 (2)
지독히도 불운하다.
‘검치에 이어 이젠 수적 놈까지 나를 방해하는가?’
하지만 마주친 순간 알았다.
검치와 같은 절대고수일지라도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적마는 속으로 그 생각을 곱씹으며 서문경에게 펼치려던 적세염천을 옆으로 비틀었다.
콰콰콰쾅!
기이한 형태의 기병에 깃든 만뢰(萬雷).
공력으로 귀를 웬만큼 보호하지 않으면 청각과 상단전이 통째로 날아갈 소음이다.
척안룡 담정은 그만한 힘을 오로지 자신과 공소심만을 향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만뢰백우형(萬雷白雨形)인가.”
공소심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담정의 무공은 뇌전(雷電)과 우레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그의 기병에 일격이변(一擊二變)이 담겨 있다는 것 역시.
“정면으로 받아 내면 불시의 공격이 날아온다지?”
적마의 장포에서 검붉은 안개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다섯 장.
그 범위를 혈기의 영역으로 가득 채웠다.
소국(小國)을 먹어치워서 생긴 압도적인 힘.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세월로 축적한 경험은 눈앞의 절대고수마저 하수로 가늠했다.
“어디 보자꾸나, 네 수하가 말한 대로 치명적일지. 아, 그리고.”
적마는 엷게 웃으며 왼손을 까딱였다.
그 손가락 끝에 재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서문경이 있었다.
“네놈을 한순간 잊고 있었구나.”
검붉은 안개가 주는 제 육감이 서문경의 칼날을 감지한 것이다.
적마가 눈을 깜빡이는 것과 동시에 구체를 이룬 혈기가 서문경을 향해 쇄도했다.
카가강!
중원에서 말하는 오악의 정상에서 철퇴를 날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완벽하게, 흘렸는데도.’
서문경의 복부에서 우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몸속에서 부서진 뼛조각이 근육과 핏줄을 찌르는 듯했다.
이마저도 적마가 자길 방해하지 말라고 가볍게 날린 일격에 불과하니.
압도적이다.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 아니라, 일개 미물에 가깝다.
그렇기에.
‘……방심하고 있구나!’
서문경은 입가에서 핏물을 게우며 씨익 웃었다.
적마가 자신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이 정도로 끝났다.
등을 아예 돌리고서 담정의 일격을 받아치는 것이 보였다.
꽈과광!
담정이 날린 기병 내부에서 쐐기꼴의 쇳조각 따위가 사방으로 퍼졌다.
서문경에겐 아무 영향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눈앞에 분노로 가득한 공소심이 있었으니까.
“……나에게 기회가 왔구나.”
쇳조각을 쳐 낸 공소심이 홍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안 그래도 저놈과는 안면이 있었다.
우습지만, 자기가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아예 잊은 모양이었다.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담정의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의도하지 않은 척 사혈을 점해서 장강에 던져 버렸어야 했다.
서문경은 그것이 조금 후회 돼서 끅끅 웃었다.
그마저도 고까웠는지, 공소심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우습나?”
“우습지. 애한테 져서 손병신 된 주제에 복수까지 하겠다는 꼴이 안 우스우면 이상하잖아.”
“애새끼가!”
“네가 들어도 부끄럽긴 하지?”
그렇게 공소심을 비웃다가 한순간,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금방이라도 옆으로 넘어질 것 같았다.
의도하진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신체의 균형이 흔들린 탓이다.
그와 동시에 공소심의 입가가 비틀렸다.
얼굴에 큼지막하게 있는 상처까지 씰룩거리니 인상이 한층 더 더러워졌다.
“일단은 팔부터다!”
예정된 승리에 도취해 크게 휘두르는 오른팔.
평소엔 절대 그러지 않았을 방심을, 그 틈새를.
서문경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시야로 포착했다.
칼과 대지가 부딪치며 자그마한 불똥이 튀었다.
츠즉!
본가에서 챙겨 나온 명검에 흠집이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서문경은 한 줌의 호흡으로 동공을 일으켜, 하단전의 내공을 끌어왔다.
“……커허.”
목구멍에 솟구친 선홍색 핏물이 다시 입가를 적신다.
정신이 어지러워, 시야가 껌뻑거린다.
명멸하는 세상 속에서 생로(生路)를 향해 칼을 잡으니.
“일검적심, 청운적하.”
어깨를 찔러 선공을 제압하고, 목을 베어 구름을 붉게 물들이기 위한 초식.
가전검법의 초식명을 입에 담았다.
없는 기력을 억지로 일으키기 위해, 일평생 수련한 동작을 체화시키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뒈져.”
서문경은 작게 중얼거리며 검을 휘둘렀다.
이윽고 공소심의 눈동자 안에 두 선이 담겼다.
서걱!
하나는 공소심의 오른 어깨를 꿰뚫는 직선이었고.
촤아악!
그 직선이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려, 공소심의 목을 점하였으니.
콧잔등을 스치는 피 냄새가 공소심이 기억하는 마지막 잔향이었다.
“…….”
한쪽으로 넘어졌던 서문경은 공소심의 죽음을 확인하곤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쓰러져서 눕고 싶을 지경이지만, 인내했다.
전생의 관존 시절에는 이보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했는데 어려져서 그런가 몸이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적마가 남아 있었다.
“주 무사.”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주백경을 불렀다.
다행히도, 대답은 금방 들려왔다.
“예. 공자님.”
“힘들겠지만 따라 붙어. 그럴 때가 아니니까.”
서문경은 갈증이 나는 걸 꾹 참고는 전황을 확인했다.
공소심의 목숨을 취한 게 겨우 일초에서 일초반식.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적마와 담정은 삼도천을 눈앞에 두고 맞부딪치고 있었다.
꽈과광! 콰드드득!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다 이루어지는 절초의 교환.
산사태를 방불케 하는 소음과 파공성이 부두에 모여든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저게 무슨…….”
“인세의 싸움이긴 한가?”
거대하게 솟구친 파도가 부둣길과 전각을 덮치고, 물고기가 떼죽음 당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두 사람이 싸우는 게 아니라 마치 자연재해에 가깝다.
호신강기를 두른 고수가 아닌 한 다가가는 것조차 불허.
거리를 두어도 파편이나 물보라 같은 게 조금씩 날아들 정도다.
서문경은 그 광경을 눈에 담고서도 묵묵히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보이지?”
“……예.”
주백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주군이 많은 말을 생략했지만, 저들과 가까이 있기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큭.”
“겨우 이 정돈가.”
수세에 몰려가는 담정과 희미한 조소를 머금은 적마.
이대로라면 강호의 절대고수 중 하나가 허무하게 죽고 만다.
……서문경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마교와 언젠가 함께 싸우려고 적대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적마한테 죽게 두면 무슨 꼴인가?
아직 그의 다락방에서 발견한 서책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시간을 벌어 줘.”
주백경은 군말 없이 서문경을 수호하듯 옆에 섰다.
타인이라면 저게 무슨 소린가 하며 자초지종을 묻겠지만, 적어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서문경이라면 분명히 무언가 해 줄 것이다.
그 모습을 사천성에서부터 지금까지, 항상 보여 주지 않았는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풋, 그래.”
웃음을 터트린 서문경은 제자리에 서서 적마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왼손의 무공사전을 꽉 쥐고서, 두 무공의 합일을 가늠했다.
번천광검결의 번결과 가전검법의 일 초식 비검절우.
전자는 옥화산에서 밧줄을 상단전 의념으로 움직이게 할 때 써 봤고, 후자는 일평생 수련한 가전무공의 일부였다.
‘합칠 수 있을까?’
과거 검치의 번결을 보고 상단전 수련이 극에 이르지 않는 한 실전에서 쓰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는데.
제대로 연습조차 하지 않고서 다른 초식과 합일을 시도한다?
그 꼴이 우스워서 웃었다.
이제 보니 공소심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게 아니었다.
‘조금 억울하긴 한데, 여기서 적마랑 마주칠 줄 누가 알아?’
괜히 적마가 미워서 노려보았다.
전생에서부터 현생까지도 지긋지긋한 악연으로 이어진 놈이다.
가능하면 여기서 제거하는 것이 옳다.
서문경은 상반신이 피로 물든 주백경을 흘깃거렸다.
“버틸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대답하는 음색에 기운이 없었다.
전신을 급격하게 혹사하고 자연기를 끌어다 쓴 반동이 큰 듯했다.
하지만 주백경을 배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시작한다.”
서문경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아 상단전 심상으로 빠져들었다.
기진맥진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자신을 그림자로 검게 물들이는 강철의 기둥.
천주(天柱)를 높게 올려다보는 눈이 몹시 형형했다.
‘천하의 무공에 얽매이지 않는, 굴강하고 부동한 의지로 하늘에 맞닿으라고, 그렇게 적혀 있었지.’
옥화산에 있던 그 시가 사실이라면 천주는 무엇으로도 부서지지 않으나, 무엇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는 뜻.
굴강하고 부동한 의지.
그건 서문경이 가진 능력 중 천하의 어느 누구보다 가장 자신 있는 것이었다.
* * *
뇌전과 우레.
기병에 맞부딪치면 뇌전이 흘러 인체를 망가뜨리고, 쳐 낸다고 한들 작은 진동으로도 내부 장치가 우레처럼 발출된다.
담정의 무공은 오걸과 십대고수로 통칭되는 절대고수 중 특이한 편에 속했다.
선공과 후공. 두 가지를 동시에 점하는 특별함.
당대에 선상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호사가들의 평이 무색하게도.
“그깟 잔재주를 믿었느냐?”
적마의 목소리에 작은 조소와 실망감이 뒤섞였다.
시뻘건 장포에서 새어 나오는 검붉은 안개, 혈기와 마기가 뒤섞인 기운이 담정의 호흡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몸이 어떻게 되먹은 건지 뇌전을 아무리 흘려도 손가락 하나 마비되질 않는다.
심지어 자기 등 뒤의 서문경과 주백경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지 않나.
담정은 속으로 X발거리며 또 다른 기병을 쥐었다.
‘마인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뇌기를 다루는 무공도 평범한 무학과 동떨어져 있다지만, 마공은 하나같이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요컨대 적마의 경우, 목이나 심장을 꿰뚫려도 꿈쩍하질 않아, 머리를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약점을 저놈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젠장. 저놈의 안개를 밀어놔야 틈이 보일 텐데.’
자신의 절초를 쳐 내는 와중에도 머리를 보호하는 안개는 부동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 조그마한 덩어리에 담긴 마기가 공력으로 따지자면 일 갑자에서 이 갑자.
웬만한 절정고수가 전력을 짜내서 만든 호신강기라고 생각하면 오한이 돋는다.
‘어디 심산유곡에서 기어 나온 마귀 새끼가, 내 새낄 꾀어서.’
공소심이 죽인 채주가 무려 셋.
담정이 심혈을 기울여서 기른 수적 놈이 그렇게나 죽었다.
강하게 치솟은 분노가 하나뿐인 외눈에 불을 붙였다.
쿠르르…… 까가강!
적영창이 그리는 반원과 담정의 기병이 부딪친다.
공력의 차이는 분명했다.
생명을 수없이 처먹은 적마의 힘은 소림의 고승보다도 윗줄에 있었다.
하지만 무공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번민하여 만든 기예다.
쩌억!
적영창과 팽팽하게 맞물려 있던 기병의 손잡이를 왼발로 차며 억지로 휘돌렸다.
찰나 동안 시간을 벌었다.
손은 일찍이 놓았다.
“밀운경천(密雲擎天).”
담정의 양손에 내공이 소용돌이쳤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는 뇌전이 불씨를 연신 튕겨댔다.
여름에 가까워진 하늘의 열기.
그 열기에 맞닿은 불씨가 순식간에 용광로를 방불케 할 만큼 뜨거워진다.
화르륵!
담정이 내디디고 있는 부둣길의 나무가 스스로 타오를 정도.
검붉은 안개마저도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호오.”
무심함을 가장하던 적마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비웃음을 담은 듯, 애처로운 것을 보듯 해서.
담정의 인내심을 메마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냐, 쇳덩이에 가둬 장강 밑바닥에 가라앉혀 주마!”
전력의 뇌전이 담긴 밀운경천.
담정의 절초가 적마의 전신을 뒤덮으려는 순간.
파즈즉……!
뇌전이 순식간에 꺼졌다.
적영창이 아니라, 안개에 담긴 무언가가 밀운경천을 파해했다.
적마가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여기까지다.”
검붉은 안개에 숨겨져 있던 마공, 염정화기(染淨火氣).
적혈마공의 극에 다다른 적마만이 쓸 수 있는 의념절기가 밀운경천의 뇌전을 꺼트린 것이다.
이제 목숨만 취하면 된다.
단지 그뿐일 텐데.
“……뭐냐, 너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부동한 힘.
마기와 상극에 가까운, 마치 소림사의 신공을 연상하게 하는 힘에 적마가 고개를 돌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