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 (1)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공소심은 깜짝 놀라서 적마를 곁눈질했다.
‘이딴 꼬맹이를 진심으로 인정했다고?’
겨우 며칠이지만 적마가 어떤 인간인지 알았다.
이 자의 기준은 터무니없이 높다.
산동성의 권문세가가 가문을 내놓는다고 하여도 자격이 부족하다고, 절정 고수가 충성을 맹세하여도 실력이 부족하다고.
까다롭게 사람을 분별했다.
그들이 두 무릎을 꿇고서 입교를 청해도 받아 주질 않았다.
‘심지어 나도, 수로채와 척안룡의 정보를 팔아서…… 이번 일에 수하를 모두 희생시킨다는 조건으로 입교할 수 있었는데!’
저깟 놈이 대체 뭐라고?
겨우 열네 살 애새끼한테 적마는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열등감이 계속해서 치솟았다.
당장 적마에게 따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의 성정을 건드렸다간 반드시 죽을 테니까.
적마와 마주하면 누구나 그러할 텐데.
“……하, 하하!”
소년은 적마를 존중하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적마가 언제 출수할지도 모르는데, 끅끅 비웃어 댔다.
그러다가 돌연, 공소심마저 깜짝 놀랄 말을 주절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다 끝났나?”
“……으음.”
적마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로선 흔치 않은 일이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야 적마의 심기를 건드리진 않을 테니까.
오걸이나 강호십대고수로 불리는 자들조차 마찬가지였다.
동격에 이른 마도 고수의 심기를 함부로 건드릴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년, 서문경은 그 상식을 서슴없이 깨트렸다.
“약자 주제에, 실성한 것이냐?”
적마는 소곤거리듯 물었다.
아주 작게 말했을 뿐인데,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 기괴한 감각에 주백경이 어깨를 움츠렸다.
십수 년 동안 군부의 훈련을 받은 어른조차도 적마의 목소리에 실린 한기를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온갖 미친 잡설을 주절거리는 놈들이 모이는 곳이 마교인데, 거기 입교하면 나도 미친놈이 되겠지.”
서문경은 도리어 어깨를 꼿꼿이 펴고서 대답했다.
적마의 목소리에 실린 음기나 혈기 따위가 두렵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 당당함에 어깨를 움츠렸던 주백경이 검을 꽉 말아 쥐었다.
“잠시 못 볼꼴을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그럴 수도 있지. 저놈 앞에선 누구나 그럴 거야.”
서문경의 음색이 주백경을 달래는 듯했다.
도대체 어느 쪽이 도련님이고 호위란 말인가?
공소심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애초에 적마 앞에서 저렇게 의연할 수가 있다는 게 이상했다.
허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적마를 두려워하지 않는 듯해서.
“……불운이다.”
적마는 두 사내를 보고 고개를 털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늘이 본교를 돕는구나.”
재능이 뛰어나다, 타고난 기골이 좋다는 둥.
여러 명성을 지닌 후기지수야 긴 세월 동안 수없이 마주하였다.
적마에게 있어 천재란 일개 범부(凡夫)와 비슷했다.
하지만 눈앞의 서문경은 어떠한가?
“수년이 지난 뒤에 마주하였다면 지금처럼 무력하게 죽지는 않았을 테지.”
단순히 운이 좋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운명이 점지해 준 것이다.
훗날 마교의 큰 재앙이 될 천무신동을 제거할 기회를.
적마는 희미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꼼지락거렸다.
“기뻐해도 좋다.”
“……뭐?”
갑자기 저게 무슨 소린가 해서, 서문경의 입가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꽈드드득!
짐승이 심심풀이로 나무를 긁듯.
……혹은 어린아이가 재미로 종이를 찢어발기듯.
나무로 엮은 부둣길이 일거에 무너지고, 시야 한쪽에 붉은색이 칠해진다.
본능적으로 서문검법을 펼치고 나서야 공격의 실체를 깨달았다.
‘적영창(赤影槍)!’
오랜 세월 동안 무식하게 쌓은 적혈마공으로 의념의 창을 빚어, 강하게 휘둘러 친다.
간단히 휘두르는 것마저 웬만한 고수의 성명절기에 버금갈 정도.
서문경의 팔뚝에 오한이 스쳤다.
‘죽이려고 휘두른 것도 아니야. 저건 그저……!’
창끝의 끈 뭉치 따위로 서문경 주위를 뭉개 버린 것뿐.
아직 창날을 겨누지도 않았다.
이것이 칠로두.
강호에서 말하는 일류나 절정과 비교할 수 없는 폭력이었다.
“내 절기를 보고, 기쁘게 죽는 것을 허락하마.”
적마가 시뻘건 입술로 서문경의 죽음을 논했다.
그 직후에 장포가 가볍게 흔들렸다.
저승사자의 창날이 서문경과 주백경을 향해 휘둘러졌다.
……스윽.
고요한 소리가 지나갔다.
마공이 아니라 도가의 무공처럼.
파공성이나 주변을 뒤흔드는 일 따위는 없었다.
다만, 서문경의 안색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귀갑검진!
육성으로 전할 시간조차 없다.
목 아래서 우그러진 소리를 주백경에게 쏘았다.
그렇게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서문경과 주백경이 서로 등을 맞댄 순간.
쿠콰콰콰!
시뻘건 마기가 두 무인의 영역 안쪽을 침범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뻔뻔하게도.
-주 무사!
서문경의 전음에 주백경이 곧바로 방어 초식을 펼쳤다.
번검유회에서 이어지는 검견불퇴.
검막으로 막아 내고서 손목의 기교로 마기를 빗겨 낸다.
주백경의 기예는 두 달 전과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에 가까웠다.
하지만 적마의 경지는 그런 것 따위를 아득히 초월해서…….
‘이 시기부터 탈마였다고?’
세간에서 말하는 마공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경지.
탈마에 이르면 피를 탐하지 않고도 혈영공을 펼칠 수 있으며, 마기가 스스로 정순해진다.
자신과 주백경의 힘으로 넘어설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서문경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
분기가 분연히 치솟았다.
‘미친 새끼도 아니고, 누가 마공을 보고 기쁘게 뒈져?’
적마가 어떤 놈인지 안다.
고귀한 핏줄을 가진 척, 누구보다 고상한 척하지만 결국 오만한 성정을 지닌 마인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알기에 화가 켜켜이 쌓였다.
“쓰레기가.”
적마의 과거도 안다.
전생에 마교와 대적하면서 모든 수단을 다 써 봤기에 알았다.
서문경은 방어 초식을 연거푸 펼치며 입술을 달싹였다.
“노예이자 고아가, 피가 특별하다고 출세한 주제에 고고한 척은.”
“……!”
누구도 모를, 민감한 과거가 찔려서인가?
적마의 눈동자가 한순간 뒤흔들렸다.
목소리가 닿았다.
그걸 본 서문경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적영창에서 발한 마기와 의념 절초를 흘리느라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좋은 옷을 걸치고, 수많은 버러지가 떠받들어도 네 과거가 달라지진 않지. 안 그래?”
“……서문세가를 멸문시킬 이유가 생겼구나.”
적마는 무심한 표정으로 적영창을 멀리서 휘둘렀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심적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와 마주한 서문경과 주백경은 뼈저리게 알았다.
-공자님, 지금 이거…….
-네 생각이 맞아.
살기가 다르게 변질하였다.
귀갑검진을 관통해서 죽이려는 게 아니라, 조금의 쉴 틈도 없이 두들기는 것에 가깝다.
주백경은 살갗에 스미는 원한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다간…… 이대로 버티다가 내상으로 죽을 겁니다.
거북이의 등껍질을 부수기보다 침투경으로 내장에 상처를 죽을 때까지 누적시킨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아주 긴 시간 동안 겪게 해 주겠다는 원념.
주백경의 걱정에도 서문경은 점차 둔탁하게 쌓이는 내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놈이 우릴 무시하고 있잖아.
경지의 차이는 불변.
서문경이 제아무리 관존이었다고 한들, 삼십 년 공력으로 전력을 다하는 적마를 이길 순 없다.
-긍지나 자존심은 아껴 둬.
그딴 걸 귀하게 여겨서야 마교에게 질 수밖에 없으니까.
서문경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에 이기는 놈이 웃는 거야!
누군가는 구차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명예를 중시하는 명가의 무인이라면 자진을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러지 않았다.
군문의 아들로 태어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왜 망나니가 되었는데?’
마교가 방심하길 원했다.
무림의 가치 돋친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망나니니까, 소가주에서 스스로 내려온 애새끼니까.
‘마음껏 그렇게 생각하라고 해.’
한때의 명예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대업을 이루는 동안 겪는 치욕은 오히려 스승으로 여긴다.
단 한 번. 적마의 가슴에 칼을 박으면 그만인데.
쿨럭, 서문경의 입가에 핏물이 배어 나왔다.
적영창을 몇 번 쳐 내는 것만으로 내장이 걸레짝처럼 됐다.
과거로 돌아와서 두 달, 조금도 쉬지 않고 수련해도 이 모양인가?
……그렇지 않아.
서문경은 약해지려는 내심을 다잡았다.
고개를 작게 내젓고서 심지가 굳은 눈빛으로 적마를 노려보았다.
-주 무사.
-예?
-네가, 길을 열어.
적마가 휘두르는 공세를 둘이서 막기도 급급한데 어찌 혼자 길을 열란 말인가?
주백경은 잠시 고민했지만, 입술을 달싹였다.
-명령이면 어쩔 수 없죠.
적마나 공소심이 들었다면 웃음을 터트렸을 대화였다.
하지만 서문경에겐 날카로운 송곳이 있었다.
지금 당장은 손가락 한 마디보다 짧을지라도, 죽기 직전에 천마에게 닿았던 절초가 있었다.
또, 두 달 동안 얻은 신공이 있지 않나.
‘천주심경, 분심조화결…… 번천광검결에 무연창인가.’
참 많이도 배웠다.
누군 하나를 대성하기 위해 평생을 쏟는데, 열심히도 발버둥 쳤다.
서문경은 속으로 쓰게 웃으며 검을 다잡았다.
손목으로 기교를 부렸다.
카가강!
전력을 다한 화경에 거북이 껍질을 두드리던 마기가 한순간 사방으로 찢겼다.
“……!”
적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위기감은커녕, 하수의 발버둥이 우습다는 듯 조소를 흘리며 적영창을 재차 휘둘렀다.
스가각!
적영창의 출수에는 거리감이 없었다.
휘두른 순간에 서문경과 주백경의 목을 포함해 다섯 사혈을 점했다.
그 사이를 주백경이 몸으로 틀어막았다.
“……후읍.”
호흡을 크게 들이 내쉬어 천지간의 기운을 삼단전에 옮겨 담는다.
정제되지 않은 자연기를 그대로 동공의 운행에 실었다.
핏줄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적마의 공세에 입은 내상이 적지 않았고, 애초에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은 기운을 다룬다는 게 자살 행위니까.
그러나 주백경은 서문경의 호위다.
‘길을, 연다.’
명령을 받은 이상 행하는 것이 도리.
주백경은 눈, 코,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검을 놓치지 않았다.
“……쿨럭!”
칼날이 선홍색 핏물로 물들었지만, 동공의 운행을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강하고 억세졌다.
필사의 집념이 상단전에 기거한 쇠기둥을 꺼낸 것이다.
서문경이 뜬금없이 오르자고 한 옥화산에서 얻은 기연, 천주심경.
그것을 선홍색 칼날에 싣고서 강하게 휘둘렀다.
콰쾅, 쩌저적!
주백경이 힘을 잃고 기울어지는 것과 동시에 적영창의 기세가 꺾였다.
그 광경을 본 공소심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가세하겠습니다!”
“허하지 않는다.”
적마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적영창을 쥐었다.
화풀이도 이쯤이면 되었다.
검이 닿기 전에 죽인다.
적세염천(赤世染天) 팔섬(八閃).
여덟 갈래의 마기로 서문경을 난자하려는 그때.
“네 이놈!”
부두 너머, 동정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촤악!
파도를 꿰뚫고 날아오는 기병(奇兵).
두 개의 창을 억지로 합친 듯한 무기가 적마와 공소심의 백회혈을 동시에 노렸다.
“흑선채주, 감히 형제를 배신하였느냐!”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인 척안룡 담정.
교활하고 약삭빠른 미소를 가진 외안의 사내가 오늘, 여태껏 보지 못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