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 (4)
양회광의 대답은 다음 날 아침에 도착했다.
“값 싸고 좋은 물건 하나 사실라우?”
개방의 징표인 매듭이나 허름한 옷을 걸치지 않은 보따리 상인.
여태껏 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팔았는지 이마에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마주한 서문경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헛소리 하지 말고 본론부터.”
“……거, 누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성질 급하긴. 말은 또 왜 이렇게 짧아?”
상인의 친절한 미소가 무너지고, 개방도 특유의 괴팍한 인상이 드러났다.
잠시 툴툴거렸던 그가 자연스레 의문을 드러냈다.
“근데 어찌 아셨대?”
“딱 봐도 거지 같아서.”
“아니, 듣는 거지 기분 나쁘게 그럴 거요?”
“보통 날 보면 어른을 찾지 않을까?”
“…….”
그 말에 개방도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안색까진 숨길 수 없는 법.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그의 실수를 겸허히 용서했다.
“뭐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 고맙네.”
“그것보다 용건.”
“아…… 아, 그래!”
개방도의 보따리에서 양회광이 직접 쓴 듯한 쪽지가 나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독자적으로 처리하겠다라…… 빚을 지긴 싫다 이건가? 역시 영민해.’
양회광과 서로 얼굴을 마주했던 건 아주 잠시.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했으나 어떤 사람인지 대강 알아차린 듯했다.
무리는 아니다.
겨우 열네 살짜리 소년이 자기 위치를 파악하고 홀로 찾아왔으니, 대범다고 여기긴 했을 테니까.
‘근데 이거 어쩌나. 난 거절한다고 받아들일 사람이 아닌데.’
또 한 가지.
호북성 분타주까지 성공한 마당에야 당연히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겠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서문경은 눈앞의 개방도에게 물었다.
“이거 줄 때, 분타주의 분위기가 어땠지?”
“그걸 내가 말하겠…….”
“방금 실수한 거, 바로 일러바칠까?”
“……공자께서 군부에 말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죠. 헤헤.”
저리 비굴하게 말해도, 양회광이 자신에게 언질을 넣으라고 시켰을 것이다.
서문경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아직 마교가 소극적으로 움직이니까 너무 무르게 보는구먼.’
능력이야 우수하지만 마교를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다.
괜히 주백경이 지부대인을 제안했을까?
마교가 마교로 불리는 데엔 이유가 있다.
‘내가 괜히 본가에도 숨긴 줄 아나.’
마교가 가진 악의, 만인을 타락시키는 수단.
그건 단순히 양귀비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무인이라면 누구나 탐하는 것을, 마교는 가지고 있었다.
서문경은 개방도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물었다.
“단시간에 내공을 증진할 수 있는 영약이 있다면 먹을래?”
“뜬금없이 그게 무슨…… 당연히 먹지요!”
“개방을 배신하라고 해도?”
“그건 좀. 그렇죠? 아니 이거, 분타주께서 시킨 겁니까?”
“한 삼십에서 사십 년이면 어때?”
서문경 자신이 자소단으로 삼십 년 공력을 얻었다.
그 이상의 공력을 얻으려면 얼마나 값비싼 영약이 필요할까?
하물며 그걸 완전히 소화하는데 도와줄 고수의 존재는?
개방도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정도만 하십시오. 농이 심합니다.”
“정색할 정돈가?”
“…….”
개방도는 대답하지 않고 떠났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양회광이 직접 보낸 심부름꾼마저 영약에 대한 욕심을 조금이나마 드러냈다.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 수로채의 배신자란 잡것도 그 꼬임에 넘어갔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 * *
언제부터였을까?
흑선채주 공소심이 장강수로십팔채를 위해 피 흘린 나날을 후회한 것이.
의형제라고 여겼던 채주들에게 적의를 품기 시작한 때가.
-공소심 이놈, 언젠가 임자 만날 줄 알았어!
-겨우 열네 살짜리 애새끼한테 무명지 힘줄이 끊겼다지?
-퇴물 소리 들을 때 고향으로 떠나야 시체라도 보존할 텐데 말이야, 클클.
채주들은 곱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상심하지 말라고 던진 농담일 뿐.
하지만 다른 놈들은 어떤가?
‘서문경, 그놈에게 당한 이후로 위엄을 잃었어.’
흑선채주 공소심은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하루아침에 부채주가 자신의 자리를 노렸다.
약탈금의 분배를 조정하자는 놈도 생겼다.
그런 고로, 공소심은 장강에서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몸으로 느꼈다.
하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웃기지 마라.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흑선채주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던가?
이제야 인생이 폈다.
장강의 협객이 되어 수로를 자유롭게 누빌 미래가 있었다.
분명히 그러했는데.
‘그 애새끼만 아니었어도……!’
천무신동 서문경.
그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열등감과 울분이 치솟는다.
‘서문세가의 도련님 주제에, 그 나이에 의념을 체현하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세상이 불합리하다지만, 정도가 있지……!’
복수는 언감생심.
무명지가 멀쩡해도 정면에서 이길 수가 없다.
어떻게든 암습한다고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뒷배인 서문세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자칫 잘못 건드리면 수로가 막힐지도 몰라. 네가 참아라.”
총채주인 척안룡이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가슴속은 여전히 타는 듯이 뜨거웠다.
그 열기가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이 있었다.
“사실은…… 총채주께서 따라붙으라고 하셨어.”
줄곧 친우로 지냈던 수적 하나가 진실을 토로하는 날.
공소심에게 광증이 일어났다.
“이런 X발!”
꼴 보기 싫던 부채주와 휘하 수적 일곱을 때려죽였다.
그래도 갈증은 차지 않았다.
자신에게 농담을 던졌던 채주들까지 미워졌다.
“이딴 게 의형제라고? 네가 참아? 하, 하하하!”
결국 힘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 아닌가?
공소심은 그날로부터 강해질 방법을 수소문했다.
척안룡의 눈 밖에 나고 말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따위 가족 놀이에 안주할 생각이 없으니.
그렇게 찾아내고 만 것이다.
“원하는 것이 본교에 있다면 따르겠는가?”
“……물론!”
마교와 마주한 그날로부터.
공소심은 흑선채주라는 자리를 버렸다.
* * *
“마교는 무슨 영약을 재배하는 토지라도 있는 겁니까?”
“주 무사의 상상력처럼 건전한 게 아니야.”
서문경이 숙소 구석의 항아리를 가리키자, 주백경은 눈가를 좁혔다.
바로 어제, 양귀비가 한가득 담겨 있던 걸 확인하지 않았던가?
“환각이라도 본다는 겁니까?”
“아니, 공력이 늘어나긴 해. 하지만 고갈되는 죽는 공력이지.”
“……!”
그 말에 주백경은 두 눈을 부릅떴다.
서문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깨달은 것이다.
단기간에 수십 년의 공력을 발휘할 수 있으나, 죽음을 맞이하는 힘.
그건 바로…….
“선천진기 말입니까?!”
“마교가 주는 영약을 먹으면 선천진기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공력과 강제로 뒤섞이거든.”
“허어……!”
“중독성도 강해서 먹는 순간 그대로 마교의 종복이 되는 셈이지. 아, 수로채 소속이라면 벌레까지 넣었을지도 몰라.”
천하에 그리 사특한 것이 존재할 줄이야!
주백경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맙소사…… 한데 공자님께선 어찌 그리 자세하게 아십니까?”
“내가 괜히 납치당했겠어? 아니까 그랬지.”
미래에서 회귀했다고 할 수도 없는 일.
어차피 마교와 대화하지 않을 마당에, 서문경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고는 뒷말을 이어 갔다.
“중요한 건 이제 셋이야. 그놈들이 분타주의 위치를 아느냐, 모르느냐. 그리고 우리가 선수를 칠 수 있느냐.”
“어느 쪽일 것 같으십니까?”
“최악 쪽.”
“……그렇겠지요.”
당연한 것을 먼저 떠올린다.
마교는 왜 붙잡힐 위험을 각오하고 성벽에서 시선을 끌었는가?
번화가에서 마인들이 얼쩡거렸던 까닭은 무엇인가?
답은 하나다.
“이미 분타주의 위치를 아는데도 왜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겁니까?”
“내가 분타주한테 얼쩡거렸잖아. 현령이나 지부대인이 여기 있는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겠지.”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주백경이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자, 서문경은 아직 멀었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분타주가 어디 처박혀 있는지 아는데 누구랑 연락하는지 모르겠어?”
“서, 설마. 아까 그 개방도가 세작이란 겁니까?”
“떠보긴 했는데,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양귀비와 다르게 냄새로 알아차릴 수 있는 약이 아니다.
서문경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서 무공사전을 챙겼다.
“부두 구경이나 가자.”
만에 하나, 수로채의 배신자가 그곳에 흔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숙소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네가 여긴 무슨 일로……?”
천무학관에 출석할 때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둔걸.
개방의 제일 후기지수라는 놈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설마 양회광이 감시하라고 보낸 걸까?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지려는 찰나에 둔걸이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오해야! 무슨 생각을 하는 오해라고!”
누가 거지 아니랄까봐 눈치 하나는 빠르다.
서문경은 헛웃음을 흘리며 둔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
“으, 그게. 봐 버렸거든. 네가 보낸 전서구 말이야. 아, 오해는 하지 마. 내가 몰래 본 거니까.”
어린 나이에 너무 충격적인 내용이었던 걸까?
둔걸이 계속 말을 더듬어서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평소였다면 귀엽게 봐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아 아니었기에.
서문경은 얼굴에서 가식을 완전히 지웠다.
“개방의 분타주나 되는 사람이 마교와 얽혔으면서 전서구 관리가 그리 허술하다니, 실망스럽군.”
냉기가 잔뜩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둔걸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너야말로 이게 무슨 짓거리야.”
“……뭐?”
“분타주께서 허락한 일이 아닐 텐데, 나한테 무슨 말을 들으려고 온 거냐?”
여기서 확실하게 쏘아붙이지 않으면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따라올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둔걸을 강하게 꾸짖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평소에 학관도 제대로 다니지도 않는 놈이 뭘 할 수 있다고?”
“…….”
“지금이야 어리다고, 재주가 좋다고, 분타주의 제자라서 남들한테 천재 소릴 듣지 노력하지 않으면 언젠가 들통날 걸.”
아무리 명검이라고 한들 관리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검신이 무너지기 마련.
가진 재능을 갈고 닦지 않으면 과거에 빠져 사는 버러지가 될 뿐이다.
서문경은 으름장을 놓듯 둔걸을 어깨로 밀쳤다.
“뭐, 뭐야?”
둔걸이 반사적으로 공력을 운용했다.
힘으로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절반, 말로 얻어맞은 억울함 절반.
자기 딴엔 최고의 수를 펼쳤지만, 서문경 앞에선 무력하기만 했다.
투웅, 쩌억!
어깨가 밀쳐진 것만으로 다섯 장 넘게 뒤로 밀려나며 견정혈을 점혈당했다.
서문경은 안색이 굳은 둔걸을 흘낏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마인이라면 지금 넌 죽었어.”
“…….”
“지금의 무력함을 기억해.”
자기 사부의 목숨이 달렸음에도 끼어들 수 없는 무력함.
그 원인은 오로지 둔걸의 게으름에 있었다.
‘정신 좀 차리면 좋겠네.’
서문경은 둔걸을 지나치며 주백경에게 턱짓했다.
동정호와 인접한 부두 전체.
거리가 얼마나 될지도 모를 지역을 빠르게 훑으려면 심후한 동공과 상승의 보법이 필요했다.
-힘들거나 지루해도 투정은 안 받아 줄 거야.
-저도 놀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무영신투에게 각종 잡기를 배우며 한층 성장한 주백경.
그에게 등 뒤를 맡긴 채 서문경은 자신이 배운 것을 자각했다.
분심조화결과 무연창.
어쩌면 그 두 가지를 실전에서 쓰게 될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각오를 다진 채 짠내 가득한 부두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