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 (3)
주백경은 서문경이 골목에서 나오는 것을 지켜보며 민무늬 가면을 고쳐 썼다.
처음에는 흰 가면이었으나, 지금은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하물며 양손에 낀 수투(手套 : 장갑)는 어떠한가?
무인의 피로 완전히 물들었다.
폐가로 위장한 흑도 방파를 일소한 까닭이다.
“끄으으…….”
고통 섞인 신음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하는 답을 쉽게 해 주지 않았으니.
주백경은 차가운 눈으로 흑도 무인을 흘기다가 피로 물든 수투를 보았다.
수많은 무인이 포진한 흑도 방파에 조용히 침투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스승.
천무학관의 무영신을 보고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공자님만 아니었다면 이런 사내를 스승으로 삼지 않았을 거라 여겼지.’
그래 봐야 도둑놈.
어찌하여 천무학관의 무사부로 있는지도 모를, 행실이 불량한 남자였다.
하물며 가르치는 게 남의 집을 털기 위한 잡기가 아닌가?
조금 전까지는 그리 헐뜯었지만, 실전을 겪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평범한 무사부가 아니야.’
무영신이 가르쳐 준 암행술(暗行術)은 겨우 셋.
벽호공, 변용술, 무영보.
그것만으로 불야성의 흑도 방파에 침투했다.
신분이나 얼굴을 들키지 않고서 전원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크흑, 이러고도 곽노께서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서문경이 마주한 노인의 정체와 불야성에 존재하는 흑도 방파의 구성, 숫자까지.
모든 정보가 빼곡히 적힌 명부를 입수했다.
서문세가에 보내면 호북성의 치안을 다스리면서 호북 무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터.
‘여기서 끝내기엔 조금 아쉬운데.’
어느새 서문경에게 물들기라도 한 걸까?
주백경은 본디 자신이었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감행했다.
“적마께서 이제 너희는 필요 없다고 하셨다…….”
핏자국으로 가득한 가면과 시뻘건 수투.
만인의 모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외형을 이용해, 과거에 마주친 마인을 사칭하는 것이다.
그 시도에는 몇 가지 확신이 있었다.
‘나도 번화가에서 마주쳤었으니 이놈들도 이 주변에 마인들이 있다는 걸 알겠지. 또, 공자님이 천무학관에서 마주친 게 적마의 하수인이랬으니까.’
이미 아는 것을 토대로 사실감을 더한다.
주백경은 양손에 공력을 끌어 올렸다.
피에 젖은 수투를 뜨겁게 데우듯 하여, 번화가에서 마주한 마기를 모방했다.
거무튀튀하고 더러우며 피 냄새가 가득한 기운.
살기가 가득한 광경에 흑도 무인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흑도 방파의 결속력은 목숨 앞에서 한없이 가벼운 것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어떨까?’
서문세가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강호를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경험이라.
주백경은 호기심을 꾹 억누르고서 왼손으로 애꿎은 벽을 후려쳤다.
쩌억!
시뻘건 자국이 벽 중앙에 찍혔다.
당장 너희를 한 줌의 혈수로 만들겠다는 위협처럼 보이도록.
……꿀꺽.
고요한 장내에 침 삼키는 소리만이 울렸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 필사의 고민이 흔들리는 동공에서 엿보였다.
이에 주백경은 낚싯대를 던졌다.
“가치를 증명해 보아라.”
“예?”
“적마께선 살 가치가 있는 자에게 자비로우시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떡밥에 걸고서.
주백경이 가면을 매만지는 사이, 한 무인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지랄! 어차피 살려 둘 생각 따윈 없잖으냐!”
“마음대로 생각해라. 기회는 줬으니.”
어차피 얻을 건 다 얻었고 홍등까지 흔들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낚싯대를 던졌을 뿐.
곽노가 돌아오기 전에 모두 정리해야 한다.
속으로 셋을 센 주백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흑도 놈들답지 않게 입이 무겁군. 하면 저승에서 곽노나 기다리고 있거라.”
스윽.
주백경이 치켜든 주먹을 보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걸까?
줄곧 불신하던 무인 몇몇이 두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조아렸다.
“저, 정말입니까? 살려 주신다는 말, 믿어도 됩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주백경은 팔짱을 끼고서 공력을 운용했다.
수투가 열기에 달아오르며 피 냄새가 한층 더 짙어진다.
가장 가까이 있던 무인이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마를 땅에 쿵 내리찍었다.
“제가 보고 들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이번 거사에 협력하는 무인 중에 신분을 숨긴 놈이 있는데……”
신분을 숨긴 놈?
마교가 개방을, 그것도 호북성 분타주를 공격하는데 신분을 숨기고서 참여하는 놈이 있단 말인가?
누군지 몰라도 속내가 아주 시꺼먼 놈이겠지.
주백경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무인을 채근했다.
“살고 싶거든 주둥이를 끝까지 놀려라.”
“그, 그것이…… 살려 주신다는 말씀을…….”
“허, 이놈.”
주백경은 살기 짙은 미소를 드러냈다.
본디 그는 전장에 나서기 위해 훈련된 병사이자 일공자 서문경의 호위.
피를 봐야 할 때 망설일 남자가 아니었다.
스각!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무인의 목이 날아가고, 피가 벽을 적셨다.
주백경의 얼굴에도 한 됫박이나 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럴수록 야차처럼 굴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더 망설일 자 있느냐?”
“허, 헉!”
“말하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겠다.
어차피 다 죽이면 그만이니까.”
촤악!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단 한 명. 말하는 자가 있다면 살려 주마.”
당연하지만, 거짓말이었다.
흑도의 존재 또한 대명에 있어 불순한 것.
눈앞에 천하를 어지럽히는 버러지가 있는데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주백경의 눈동자가 한층 더 스산해졌다.
* * *
“수로채의 배신자가 신분을 숨긴 채 마교와 협력하고 있답니다.”
“……뭐?”
믿지 못할 것을 들었다는 듯. 서문경의 어조가 높아졌다.
장강수로십팔채.
그들은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형제처럼 여긴다고 들었다.
‘전생에 척안룡이 마교에게 피의 복수를 감행한 것도 같잖은 우애에 있지 않았나.’
도적놈끼리 호형호제하는 꼴이라지만, 설마 그들 사이에 배신자가 생길 줄이야!
서문경은 그제야 노인에게 나던 악취를 떠올렸다.
“노인에게 짠내가 나던 게 그 이유였나.”
거적때기에서 나던 바다 냄새.
그게 수적과 접선하던 부두에서 배었다면 그럴 만하다.
거기까지 정보를 짜 맞추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호북성의 흑도, 수적, 마교. 쓰레기끼리 잘도 뭉쳤구먼.”
“지금이라도 형주부의 지부대인과 휘하 현령을 부르는 건 어떻습니까? 성벽을 오르는 것 자체가 눈속임이고, 수로가 본체라면 관리의 힘을 빌리는 게…….”
호북성 총독까지 부르기엔 시간이 모자라다.
주백경의 제안은 서문세가에서 가르치는 정석 그 자체였다.
평범한 문제라면 지부대인을 호출하는 것만으로 해결되기 마련.
하지만 서문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와 나. 그리고 이번 일에 연루된 무림인끼리 해결한다.”
“……예?”
주백경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가 표정을 고쳤다.
그만큼이나 서문경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무림의 자존심을 존중하겠단 겁니까?”
“그래.”
“아니, 그…… 지부대인의 권한으로 수로를 막고 색출하면 사흘 안에 해결될 일이 아닙니까?”
서문세가에서 배운 것과 서문경의 지시가 충돌한다.
쉽게 해결할 방법을 배제하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아서, 주백경은 무심코 되물었다.
이에 서문경은 부드럽게 웃었다.
“좋은 질문이다. 항상 내 말에 설설 기어서 걱정되던 참이었는데.”
옥화산에 오르자고 해도 충성.
마교와 싸운다고 해도 옳은 일이라니까 그러려니.
주백경은 늘 서문경의 하명에 의문을 품지 않고 행하기만 했다.
그래서야 하수인에 불과하다.
서문경은 주백경이 한낱 장기짝이 되지 않길 바랐기에, 되물은 걸 꾸짖지 않고 설명을 덧붙였다.
“강호에 빚을 지울 거야.”
“……개방을 비롯한 무림에 말입니까?”
“그건 시작점에 불과하지. 나한테 꾸지람을 듣고 뚱해진 천무학관주와 소문만 믿고 칭얼거리는 멍청이들의 인식을 바꿔야, 나중에 손을 잡을 수 있을 거 아니야?”
“아.”
그 말에 주백경은 과거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무림과 함께 마교를 몰아낼 것이라던 서문경의 포부.
그때는 너무 멀게 들려서, 이제 소년에 불과한 일공자를 믿겠냐는 의문도 함께 들었지만…….
“공자님의 생각을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빚으로 여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백경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관을 부르지 않는 것으로 무림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셈이지만, 겨우 열네 살인 소년에게 빚을 졌다곤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서문경에게 생각이 있었다.
“나한텐 대충 선물로 대신하려고 하겠지. 한참 만만해 보일 나이니까.”
“방도가 있으십니까?”
“어중이떠중이가 그렇게 생각해도, 윗사람이 빚으로 여기면 돼. 나머진 시간문제야.”
호북성 분타주.
호북성의 개방 분타주인 불휴개 양회광.
그가 빚으로 여긴다면 나머지도 서문경을 쉬이 보지 못한다. 그리되면 천무학관주도 혀를 차며 자기가 냈던 소문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생긴다면 단 한 가지.
“절대로 호북성 분타주, 양회광이 죽게 둬선 안 돼.”
그가 죽어서 생길 혼란은 들불처럼 번져서 강호 전체에 퍼지게 될 터.
하물며 서문경에게 강호의 교두보가 되어 줄 사람이었다.
‘기왕이면 이번 일로 둔걸 그놈이 제정신을 차리면 좋겠지만…….’
게으른 놈이 하루아침에 성실해질 리가 없지 않나.
서문경은 주백경에게 곧바로 전서구를 준비시켰다.
-마교와 흑도, 수로채 소속의 배신자가 손을 잡고 양귀비 사건과 연루. 분타주에게 앙심을 품은 듯하여 알림.
-거처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고 외부인을 주의할 것.
* * *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찾아오는 계절.
따사로운 햇볕이 창가에 드리워, 한 남자의 깊은 쌍꺼풀을 간지럽힌다.
그의 별호는 둔걸.
호북성 분타주 양회광의 제자이나, 제대로 된 수련조차 하지 않고 지금처럼 빈방에서 낮잠을 자는 게 일상이었다.
“세상에 천재가 그렇게 많으면 나 하나쯤 없어도 괜찮지 않나…… 쩝.”
최근 양회광이 갈구는 빈도가 늘었다.
서문경과 성하민의 존재가 이유였는데, 특히 양무연이 이 학년 선배를 손쉽게 꺾으면서 내버려 둔 제자가 무척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하기 싫은 것을. 왜 억지로 하려고 드실까?’
둔걸은 오른손으로 두 눈을 비비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퍼득. 퍼드득.
창가에서 계속해서 날갯짓해 대는 전서구 하나가 자꾸 귓전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다.
웬만하면 그냥 무시하고 잠을 청했겠지만, 어디서 뭘 그리 잘 처먹었는지 날갯짓이 우렁찼다.
“뭔 영약을 처먹었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보통 전서구라면 엄청나게 지쳐서 오기 마련인데, 저리 팔팔한 걸 보면 여러 마리를 거쳤거나 급하다는 뜻이니까.
‘사부는 너 따위가 볼 정보가 아니니까 보지 말라고 했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고, 말을 잘 들었으면 둔걸이라고 불리지도 않았다.
둔걸은 전서구의 콧잔등을 툭 때려서 기절시켰다.
굳이 때린 건 자신의 잠을 방해한 대가다.
“어디 보자……. 어?”
마교와 흑도, 수로채.
세 곳이 양회광의 목숨을 노린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둔걸은 저도 모르게 눈을 끔뻑거렸다.
현실감이 없었다.
평생 먹고 잘 생각밖에 없던 머리에 비정한 상상이 멋대로 끼어들었다.
“……진짜, 마교가?”
천무학관의 시험에 침투했다는 소식이야 들었다.
하지만 사부를 노린다니? 그건 무림과 전쟁을 논할 수준이지 않나?
둔걸의 상상에 살이 덧붙여지던 그때.
“뭘 또 네 마음대로 읽고 있냐? 당장 내놔라!”
양회광이 자신의 머리를 꽁 때리고는 전서를 읽었다.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남들에겐 알리지 마라. 알겠지?”
“……사부.”
“지랄 말고, 네가 끼어든다고 도움 안 되니까 학관에나 잘 다녀.”
안심하라는 듯.
양회광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의 제자인 둔걸은 알았다.
저게 진짜 웃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곳, 호북성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 역시.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