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 (2)
인정하기는 싫지만, 양회광은 유능한 거지였다.
보름 사이에 불야성에서 거래되던 양귀비를 절반 이상 불태웠으니까.
하물며, 그 소식을 물어 온 사람이 군문의 애새끼이자 매일 술판이나 열던 망나니라면?
‘나 같으면 안 믿고 꺼지라고 했을 텐데, 하긴. 이러니까 내가 가주 깜냥이 아니었지.’
지금쯤이면 서문휘가 소가주가 되었으려나?
피식 웃은 서문경은 매일 밤 기록하던 서책을 꺼냈다.
“천무학관에 다니면서 어떻게 이걸……?”
주백경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불야성에 떠도는 소문을 비롯해 병사의 순찰 시간대와 경로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매일 천무학관에 출석하는 사람 같지 않게.
서문경은 주백경의 경악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주 무사가 놀랄 정도면 딴 놈들은 상상도 못 할 거야, 그치?”
“아니…… 전혀 몰랐습니다.”
상식적으로 겨우 열네 살인 소년이 저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서문경의 내용물은 마교가 가장 경계하던 관존이었다.
천마를 비롯한 칠로두 모두와 수 년 동안 싸워 온 기억.
그 경험은 어린 육체의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았다.
“매일 천무학관에 다녀도 눈과 귀는 열어 둬. 하루라도 귀찮다고 늘어지면 뒤처지는 거야.”
“그건…….”
“이곳, 무한이 언제 전장이 될지 모르잖아.”
그 말에 주백경은 번화가에서 마주친 마인 무리를 떠올렸다.
그들이 번화가에서 칼부림을 부렸으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서리쳐졌다.
두 눈을 부릅뜨고서 주먹을 꽉 쥐었다.
“공자님께서 주변을 계속 감시하셨던 겁니까?”
“언젠가 마교가 행동하리란 생각은 있었지. 그랬는데…….”
“너무 화려하게 움직였지요.”
주백경의 미간이 좁혀졌다.
마교의 존재가 천하에 드러난 이후, 서문세가를 비롯한 군문과 무림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거늘.
어째서 성벽을 탔을까?
주백경이 품은 의문을, 서문경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해결했다.
“그쪽을 봐달라는 거야.”
“미끼라는 뜻입니까?”
“그래. 성벽은 그저 눈속임이고, 아마 진짜 의도는 따로 있을 거야.”
서문경은 어딜 나가려는 듯 외투를 어깨에 걸치곤 어느 항아리를 열었다.
안의 내용물을 본 주백경이 저도 모르게 기함했다.
“어, 언제 이렇게까지!”
항아리의 절반을 수북하게 채운 양귀비.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고 알려진 마물(魔物)이 여기에 왜 있단 말인가?
주백경은 자연스레 떠오른 것을 입에 담았다.
“언제부터 양귀비에 중독되신 겁니까?”
“내가 무슨 중독?”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많이 모으실 리가 없지요!”
“진정해. 내가 진짜 중독자면 왜 보여 줘?”
이건 어디까지나 불야성에서 접촉한 마인과의 연결점을 유지하기 위한 거래일 뿐이라고.
서문경의 설명에 주백경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 공자님께서 왜 방계에 자주 출입하셨는지 알겠습니다.”
그것도 적잖은 은원보와 전표를 요구했다나.
슬슬 본가에서 그 이유를 요구하던 참이다.
주백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불야성 때처럼 향락이나 주독에 빠졌나 해서 고민이 깊었다.
“전 또, 다른 오해를…….”
“이제 소가주도 아닌데 미쳤다고 방계를 핍박했겠어?”
“……?”
“아니,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전엔 분명 기녀를…….”
“오해라고 몇 번을 말해?”
서문경은 가볍게 투덜거리며 양귀비 항아리에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손톱 사이로 양귀비의 냄새가 밸 때까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냄새를 맡았다.
당장 오늘도 양귀비를 태운 사람처럼 보일 작정이었다.
“주 무사.”
“예, 공자님.”
“내가 자정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동정호에서 가장 가깝고 화려한 전각으로 가. 거기서 얼쩡거리면 개방이 접촉해 올 거야.”
“제가 뒤따라가면 안 됩니까?”
염려가 가득한 물음에 서문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한테 양귀비를 판 놈은 주 무사의 얼굴을 몰라. 지금은 그걸 이용할 때가 아니야.”
서문경에게 있어 주백경은 호북성에서 가장 믿을 만한 칼이자 심복.
꾸준한 수련으로 인해 전과 다른 무위를 쌓은 그였다.
무영신투에게 배운 신묘한 잡기 또한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니.
‘지금 당장은 도둑놈 기술이나 배웠다고 불만이 가득하지만, 막상 써먹으면 엄청난 걸 얻었다고 기뻐하겠지.’
주백경이 듣는다면 피를 토할 말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배우고 있는 것을.
속으로 빙긋 웃으며 주백경의 어깨를 두드리던 그때.
“방금 떠오른 게 하나 있습니다.”
주백경이 눈을 빛내며 한 가지 방책을 꺼냈다.
* * *
빛이 환하게 빛날수록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이다.
호북성 무한의 불야성.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와 붉게 빛나는 등불들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가 썩어 가는 냄새와 피로 한가득 젖은 골목이 있기에.
그 양면성은 교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불야성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밝은 정경에 머물렀다.
아예 어둠을 보기 싫다는 듯이, 겁에 질린 사람처럼.
“……천치 같은 것들이지.”
어두운 골목 안쪽.
가죽 포대에 앉은 노인이 홍등 아래서 불나방처럼 노니는 인파를 관찰했다.
‘언제 오느냐, 서문세가의 천치 망나니야.’
서문경에 비해 노인의 신분은 비천하나, 그를 아는 이들은 이렇게 불렀다.
곽노(槨老).
양귀비는 물론이오, 정보를 팔거나 관인과의 밀약을 주선하기도 했다.
사파와 마교 사이에 줄을 대고 있는 흑도 고수.
곽노는 근래 한 가지 문제에 시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망나니 놈과 접촉하고 나서 개방이 붙기 시작한 것 같은데.’
개방과 곽노.
그 둘은 부딪쳐서 득을 볼 일이 없기에 서로를 모른 체하고 살았다.
하지만 보름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서문경과 거래를 튼 직후.
그때부터 개방이 집요하게 뒤를 캐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한 건 아니야. 그놈은 행실에 비해 너무 고귀한 신분이니까…… 개방이 신경 쓰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면 끝까지 의심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곽노는 어쭙잖은 확신에 빠지지 않았다.
무림에서 오래 살면서 체득한 버릇 중 하나였다.
오늘은 서문경의 의중을 헤아려 보리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얼굴의 주름을 찡그렸을 무렵.
“안 그래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 더 흉해졌잖아?”
잔망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곽노는 고개를 들어 골목에 들어선 남자를 확인했다.
어깨에 대충 걸친 외투, 묘하게 퀭한 눈.
그 시선이 자신이 깔고 앉은 가죽 포대에 꽂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톱 아래에 양귀비 잔여물이 끼어 있다.
곽노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늙어 가는 것도 서러운데 서문 공자께선 왜 옹졸한 속을 뒤집는고?”
“쉿.”
서문경이 주위를 흘깃거리곤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앞으로 거래하기 싫어?”
“……끌끌.”
곽노는 거친 웃음소리를 흘리며 골목 바깥의 홍등을 확인했다.
스륵, 스륵.
홍등이 두 번 흔들렸다.
서문경에게 동행인이 없다는 뜻.
그것을 확인하던 찰나에 망나니가 성질을 부렸다.
“뭘 그리 처웃어! 그럴 시간에 물건이나 보자고.”
허장성세 섞인 폭언에 갈급함이 담겨 있다.
곽노는 속으로 서문경을 비웃었다.
‘겨우 열네 살짜리가 버틸 수 있는 유혹은 아니지.’
명가의 소가주였다고 하나 마교가 공급하는 양귀비는 질이 다르다.
정심한 심공을 수련한 도사조차도 보름 내에 자신을 찾아올 정도였으니까.
당장 서문경의 입술을 보면 심하게 부르트지 않았나.
곽노는 느긋한 어조로 운을 뗐다.
“천무학관주와 대척하고, 양가의 아이를 꺾었다지?”
“지금 그게 중요하나?”
서문경의 말대답에 곽노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긴 서문세가가 아니야. 성질만 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
“그리 움츠러들 필요는 없어. 내가 설마 귀한 손님을 손찌검하랴!”
곽노가 안색을 바꿔 끌끌 웃으니, 서문경이 울컥하려다 손가락 끝을 덜덜 떨었다.
그걸 보고서 곽노는 확신했다.
‘자기 혼자 그렇게 사더니, 완전히 갔군.’
어린 나이에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은 대단하나, 결국 거기까지란 소리.
곽노는 속으로 서문경의 등급을 내렸다.
천무학관 내부에 양귀비를 팔아치울 수단. 그거면 됐다.
“백련과 양가창법으로 비무를 했다지?”
“……그걸 어떻게!”
“놀라기는. 설마 천무학관에 내 눈이 없다고 생각했나?”
그 말에 서문경이 주먹을 꽉 쥐며 공력을 운용했다.
“협박이더냐?”
“끌끌, 거래를 하러 왔다더니 여전히 망나니처럼 구는군. 여긴 서문세가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곽노가 가죽 포대를 꽉 쥐고서 일어날 채비를 취하자, 서문경이 공력을 거두었다.
“아, 아니. 싸우자고 그런 건 아니야.”
“그럼 가만히 앉아. 애새끼처럼 발끈하지 말고, 차분히 이야기나 나누지.”
그 말에 서문경이 맞은편에 앉았다.
흐리멍덩하던 서문경의 눈동자에 순간 총기가 스쳤지만, 불행히도 곽노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 * *
서문경이 노인 맞은편에 앉은 지도 한 시진 째.
‘대체 언제까지 간을 보는 건지. 쯧, 저러니까 저 나이를 처먹고도 강호에서 살아남았나.’
조심성이 너무 많다.
양귀비에 중독된 열네 살 소년의 모범 그 자체를 보여 줬는데도, 노인은 계속해서 자신을 떠보며 개방과의 연결점을 확인했다.
심지어는.
“비무 이후 백련과의 친분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었던 이유가 양귀비를 팔아서라고?”
“그래! ……요. 그러니까 가전무공으로 패고도 친하게 지내는 거지. ……요.”
내심 양무연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무공을 만들었다고 말해 봐야 누구도 믿지 못할 텐데.
노인이 원하는 말을 꾸준히 해주면서 의심을 누그러뜨릴 작정이었다.
그 와중에 얻은 단서도 있었다.
‘……짠내?’
노인의 거적때기에서 짠내가 났다.
무한이 동정호와 가까운 도시라고 하나 부두에 가깝지 않은 한 이렇게까지 냄새가 배지 않을 것이기에.
서문경은 사소한 의심을 머릿속에 묻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서 대체 거래는 언제 하나?”
“……오늘은 없어.”
“뭐?”
“말 그대로야. 물건을 들일 상황이 아니거든.”
그 말에 서문경은 눈을 번뜩였다.
노인과 시선을 마주친 채로.
“성벽에 요즘 병졸이 왔다 갔다 한다는데 그건가?”
“허, 언제부터 질문을 허락했지?”
“그게, 솔직히 궁금하잖아. ……요. 본가에서도 이 일로 움직이고 있.”
시원하게 가문의 일을 내뱉어 버리곤, 입을 꾹 다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겨우 열네 살짜리.
그것도 천무학관주와 맞서서 대들 정도로 철없고 방종한 망나니가 할 만한 짓거리였다.
“……못 들은 걸로 해.”
“그러지.”
노인이 시원스럽게 대답했지만, 자신이 자리를 뜨면 곧바로 조사할 걸 알았다.
서문경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 웃었다.
‘몇 시진 안에 서문세가에서 정말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알겠지.’
그때 노인이 무슨 생각을 품을지 이미 예상했다.
‘겨우 이깟 꼬맹이가 개방 분타주와 연을 맺고 있을 리가 없다.’
지금이야 신중하지만, 자기 가문의 대소사마저 남 앞에서 말할 정도로 망나니란 판단이 들면 어떨까?
경계심이 누그러지고 자신을 하찮게 보기 시작할 때.
그 틈을 타 등 뒤에서 칼을 꽂으리라.
서문경은 속내를 숨긴 채 노인을 째릿 흘겼다.
“군부에 쫓기기 싫으면 오늘 들은 건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누가 어디다 말한 댔나? 의심 많긴.”
노인의 너스레에 서문경은 다시 한번 흘겨보고는 골목에서 떠났다.
괴벽에 가까운 의심과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
노인의 대응은 제법 훌륭했으나 빈틈은 있었다.
‘역시 성벽은 눈속임에 불과했단 거지.’
노인에게 얻은 단서를 정리한 서문경은 골목 바깥의 홍등을 쳐다보았다.
스륵.
한 번의 흔들림.
그것은 본디 서문경이 노인의 골목에서 떠났다는 신호였으나.
‘잘했다, 주 무사.’
서문경의 호위, 주백경이 제 할 일을 다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