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쟁이 창 (3)
“양무연, 당장 나오지 못하겠느냐!”
장대한 기골, 선이 굵은 얼굴에 한쪽 뺨과 입가를 가로지르는 상처.
서문경이 보기에 이립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남자였다.
‘젊은 무사부인가? 오늘 무연이가 수련장에 얼굴조차 안 비쳤다더니 찾으러 왔나 보네.’
열정이 대단한 무사부인가 보다.
개입하지 않고 자연히 넘어가려는데 남자가 자신을 손가락질했다.
“어이! 서문 씨 놈아!”
“……놈?”
나이깨나 처먹었다고 한들 겨우 이립일진대 말버릇이 못돼먹었다.
서문경이 고개를 흘낏 돌리자, 남자가 팔짱을 끼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어디서 배운 예의냐?”
“……선배?”
“모르느냐? 네 선배인 이 학년, 양철심(楊鐵心)이다.”
“저 얼굴로?”
기가 막혀서 한 소리에 남자, 양철심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정곡에 찔린 것처럼 침묵하는 걸 보니 평소에 자주 들은 소리인 모양.
다짜고짜 서문 씨라고 하대한 걸 제대로 갚아 줬다.
서문경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거, 그래서 선배는 여기까지 왜 왔소?”
“……쯧. 오늘은 너와 놀아 줄 생각으로 온 게 아니다.”
“무연이랑?”
“그래. 바로 어제, 네놈이 양가창법을 펼쳐서 백련의 콧대를 짓눌러줬다지?”
자기 집안사람이 졌다는데 묘하게 기쁜 듯한 목소리.
후배가 있는 곳에서 저 정도면 양무연과 단둘이면 어떨까?
‘천하다는 말이 쓰여 있던 편지, 쟤가 쓴 거 아니야?’
의구심이 솟구쳤지만 해결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다.
서문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내가 어제 창법으로 양무연과 비무하기는 했지.”
“큭…… 역시 주제도 모르고 나댔구나.”
“하지만 무연이는 지지 않았어. 오히려 고리타분하던 틀을 부셨지.”
“틀을 부셨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짚이는 데가 있는지 양철심이 캐묻는 목소리가 묘했다.
하기야, 천무학관에 오기 전에 서로 앙금이 있었을 터.
그것이 한 살 터울이라면 더더욱.
서문경은 은근히 양철심을 놀리듯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글쎄…… 적어도 선배가 아는 양무연과 다를 거요. 비무하거나 따질 생각이면 고이 접어서 버리는 게 낫겠지.”
그 말에 양철심이 주변을 흘낏 곁눈질했다.
천무학관을 오가는 사람과 일 학년 몇몇.
특히 남궁세가의 후기지수. 고검 남궁명의 눈빛에 호기심이 있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듯. 양철심이 팔짱을 끼며 호방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 봐야 양가창법을 더욱 정심하게 익힌 내가 밀리진 않겠지.”
저놈이 괜한 허세를 부리려다 자충수에 빠졌다.
서문경은 눈을 빛내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무할 생각이요? 내 알기로, 선후배끼리의 비무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데.”
“…….”
“이십구 일 뒤에 학년 간 비무가 있는 걸로 아는데. 무연이한테 볼 일이 있으면 그때 풀지 그러시오.”
멍청한 놈.
서문경은 속으로 양철심을 비웃었다.
물론 주둥이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얼굴을 가리거나 몰래 오는 노력 정도는 해야 했다고 보오.”
“……시끄럽다.”
“뭐, 그래도 여기까지 행차했으니 안부는 전해 드리겠소.”
“이건 가정사 문제야! 무사부들도 이해해 줄 것이다.”
“가정사라니?”
“너한테 양가창법으로 패하였는데 당연히 직계의 창법을 익힌 내가 지도를 해 주어야지!”
저렇게 말하면 창법에 차별이 있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 아닌가?
외견은 나이를 먹었는데 머리는 아이답게 천진난만하다.
서문경은 양철심을 경계했던 과거를 후회했다.
“자, 그럼 가정사인 걸 무사부한테 인정받고 오십쇼.”
“……놈!”
양철심이 주먹을 꽉 쥐었다.
명가의 직계 무인답게 오만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서는, 당장 자신에게 비무를 청할 기세였다.
‘그래! 마, 한 번 붙자!’
서문경은 양철심이 얼른 달려들길 바랐다.
양무연의 창법과 직계 창법이 얼마나 다른지 호기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양철심에게 제재를 가할 기회이니까.
‘서문창법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야.’
저놈의 쓸모없는 대가리를 창대로 두들겨 주리라.
그렇게 양철심이 달려들길 기다리고 있던 그때.
“잠시만요.”
낭랑한 옥음이 일 학년 구획을 울렸다.
서문경은 고개를 돌렸다.
숙소에서 내려온 양무연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겨우 하루 만에 가슴 속 응어리가 풀린 것일까?
표독스러운 겉치장과 벽을 허문 듯. 은은한 미소 안에 여유가 담겨 있었다.
“양가의 무인이 되어서 남한테 화를 풀진 않겠지요?”
“……오냐. 네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양철심이 콧김을 내뱉곤 양무연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우니 가장 먼저 체구의 차이가 드러났다.
안 그래도 장대한 기골을 가진 양철심과 단련한 몸이라곤 하나 평범한 체구의 양무연.
양철심의 그림자만으로 양무연의 전신을 가리고도 남는다.
‘그래도 역시 창법에서 가장 중요한 하반신, 종아리와 허벅지의 근육은 양무연이 더욱 뛰어나다.’
쓸데없이 단단하기만 해서야 화려한 기교를 행할 수 없다.
서문경이 보기에 양철심은 병사가 딱 맞았다.
혼란한 전장에서 저런 놈이 휘두르는 철창이라면 눈먼 선봉대 수십은 맞아 죽고도 남을 테니까.
하지만 주로 일대일로 싸우는 무인이라면 어떨까?
결과가 눈에 선했지만,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변화하도록 도와준 이상,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책무이고 책임이겠지.’
서문경은 양무연을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양무연도 엷게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 * *
양무연이 신창양가의 본가에 정식으로 입적한 이후, 처음으로 마주해서 이겼던 상대.
양철심은 직계 창법을 익힌 아이 중 최고 기대주였다.
-저 아이는 창법을 익히기 위해 태어난 것이 분명하오!
-어릴 때부터 타고났지. 오성이 부족한 게 흠이긴 하지만, 부모가 만들어 준 기골이 뒷받침해 주겠지.
타고난 신체, 가주와 가까운 촌수라는 배경.
이제 막 입적한 양무연이 다가갈 수조차 없는 위치에 있었다. 아니, 애초에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했다.
하지만…… 그가 먼저 다가왔다.
“네가 위창(僞槍)이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이냐?”
“……응.”
혹여나 양철심이 화를 내지 않을까.
양무연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뭐. 창법을 그렇게 시작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겠지.”
“화는, 안 내?”
“내가 뭐 하러. 방계긴 하지만 너도 양가의 핏줄이잖냐.”
상대방을 깔아보는 태도에 독선이 가득했지만, 성격이 호방하고 언사가 시원시원했다.
……그래서 이겨도 될 줄 알았다.
“그저 창을 따라 하는 네가, 감히 나를 상처 입혀?”
부러진 목창을 내던진 채 자신을 노려보는 양철심.
한쪽 뺨과 입가를 가로지르는 상처에 피가 줄줄 났다.
그의 시선에 강한 분노와 미지의 공포가 있었다.
저게 구술로 익힌 수준이라면 제대로 배운다면 어떨까?
그 가능성은 상상하기조차 싫다는 듯.
노골적인 증오를 뱉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작은 소문이라도 들린다면 당장 내쫓아서, 거지꼴로 만들어 주마.”
“…….”
하필이면 그날 비가 와서 전신이 축축하게 젖었다.
지금 생각하면 양철심에게 그런 권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기대주일 뿐.
창법을 구술로 배운 양무연에게 패배했단 사실이 퍼지면 자그마한 명성마저 사라질 신세였다.
하지만 그때는 한창 본가의 위세에 꿀려 있던 시절이었다.
“……말하지 않을게.”
순수하게 두려웠다.
맨몸으로 원래 집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으니까.
뒤이어 자신을 무릎 꿇리고 확언까지 받고 나서야, 양철심은 만족했다.
“좋아. 앞으로 비밀로 가져가는 거다. 알겠지?”
“……응.”
“공식적인 자리에선 나한테 지는 거야.”
“알겠, 알겠어요.”
“좋아.”
양철심에게 이긴 그날부터 괴롭힘은 더 심해졌다.
창법을 배우는 시간에 아무것도 모르는 하인이 오질 않나, 정신 수양을 빌미로 온종일 참선하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양무연은 양철심을 두려워하게 됐다.
이곳이 신창양가가 아닌, 천무학관이어도.
‘몇 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네.’
양철심과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손끝이 저렸다.
이대로 창을 쥘 수나 있을까, 까마득한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평생…….’
기껏해야 양철심보다 뒤떨어지는 모조품.
그 소리를 들으며 살 순 없었다.
늘 이길 수 있는 상대에게 모욕을 당해서야 창을 쥔 의미가 없다.
양무연은 숨을 깊게 골랐다.
불안하고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듯했다.
‘또, 나를 봐주는 사람이 있잖아.’
서문세가의 망나니이자 천무신동.
서문경이 평소처럼 무신경하고 심드렁한 표정이 아니라 진지하게 자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응원하고 있어. 분명.’
말로 듣진 못했지만, 어제 긴 시간 비무한 사이였다.
마지막엔 심적권청이라는 영역에 도달했다.
눈빛으로 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밑바닥까지 드러난 자존감을 남에게 의지하는 꼴이라지만 이게 어딘가.
양무연은 양철심에게 몇 년 동안 보이지 못했던 웃음을 드러냈다.
“선배 말이 맞아요. 오늘 일은 가정사죠.”
“잘못했다고, 더욱 창법에 매진하겠다고 비는 게 아니라 매를 맞겠다?”
“가끔은 지도받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요. 매를 맞게 될진 모르겠지만요.”
“……천무학관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감히 나한테 맞먹으려고 드니 말이야.”
양철심의 눈썹이 팔자(八字)로 휘었다.
예전엔 저 표정만 봐도 두려움이 엄습했는데, 지금은 딱히 그렇지 않았다.
‘뭐가 달라진 걸까?’
양무연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빙긋 웃었다.
알게 뭔가.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을.
당장 이 기분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창보다 혀가 길었죠?”
“뭐?”
“비무장으로 가서 결판을 내요. 누가 옳고 그른진 여기 있는 천무신동이나 고검이 봐주겠죠.”
양무연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조롱을 눈동자에 담았다.
“사실…… 예전부터 오빠를 윗사람으로 여겨도 될지 궁금했거든요. 처음 비무할 땐 저한테…….”
“닥쳐라!”
도발이 먹힌 걸까?
비밀을 꺼내려던 찰나에 양철심이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비무장으로 가서, 어디 하날 분질러 놔야 제정신을 차리겠구나!”
이젠 말조차 섞기 싫다는 듯. 양철심이 비무장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자니 과거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같아서 목이 탔다.
그렇게 가까스로 가라앉힌 불안이 도리어 올라오는데.
“야.”
서문경이 갑자기 말을 붙였다.
“그냥 하던 대로 해. 처음 본 나한테 고깝게 굴었을 때처럼, 뒷일 생각하지 말고 저질러.”
“뭐야 그게, 조언이야 욕이야?”
“둘 다? 적어도 저런 한심한 놈한테 지고 싶진 않잖아.”
“……풉.”
웃음을 터트린 양무연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올라오던 갈증과 불안이 싹 사라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고마워.”
“어제 그렇게 했는데 한심하게 지면 내가 곤란해. 약한 사람한테 이긴 것처럼 돼 버리잖아.”
“……그러게. 지면 안 되겠네.”
양무연은 마음을 다지며 양철심을 뒤따라갔다.
저벅, 저벅.
두 창술가가 말없이 비무대에 섰다.
창법의 천재가 망나니와 함께 가전무공을 재해석해서 만든 무연창.
그것이 천하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