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쟁이 창 (2)
앳된 얼굴에 쓸데없이 화려한 영웅건, 생기를 머금은 눈.
도사면서 무공과 도경을 수련할 시간 동안 옷을 하나라도 더 입어보는 남자.
천무학관에서 이런 후기지수는 단 한 명뿐이었다.
곤륜파의 삼대제자, 운룡(雲龍) 청겸.
그는 천무학관에서 탈출할 개구멍을 찾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맙소사…… 그 백련을 울리다니!”
갑자기 울면서 뛰쳐나오는 양무연과 망연히 서 있는 서문경.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하나 나오지 않는다는 백련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서문경이 무슨 짓을 했기에 저럴까?
‘망나니가 드디어 일을 벌였구나. 이건 특종이야!’
개방에 찾아가서 정보를 팔면 신상 의복을 살 돈이 나올 터!
호북성 분타는 입이 무거운 것으로 유명하니 들킬 위험도 적다.
청겸은 이미 거금을 얻은 사람처럼 웃었다.
‘그나저나 생각이 많은 모양이군. 평소라면 내 기척을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텐데.’
하기야, 여자를 울려 놓고 생각이 없으면 망나니를 넘어서 쓰레기가 아니겠나.
자기 멋대로 이해한 청겸은 서문경을 뒤따라갔다.
‘으엑, 천무학관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초가집, 하나도 정돈되지 않은 수련장.
그리고 무영신투의 위장 신분, 무영신의 추레한 모습까지.
‘잡기술? 다른 걸 제대로 배워도 모자랄 판에 금나수라도 배우는 건가?’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여기…… 수련생이 몇 없다!
기껏해야 두셋. 그마저도 수업이 매일 있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천무학관 외곽에 있어서 눈에 띄질 않았다.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음습한 공간이었다.
‘개구멍 하나쯤 있어도……?’
좀 더 둘러보면 나오지 않을까?
역시 망나니답게 몰래 빠져나갈 곳을 찾아둔 모양이다.
수련장의 위치를 기억한 청겸이 나중을 기약하며 나가려던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너!”
자기 숙소에 있던 양무연이 수련장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그것도 두 눈이 탱탱 부어서는, 화를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문경에게 비무를 청했다.
명가의 무인답게 항상 고고하고 표독스러웠던 백련답지 않았다.
청겸은 저도 모르게 풀숲에 숨었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래?’
양무연의 등장에 무사부와 호위로 보이는 남자가 행동을 멈췄다.
천무신성 성하민까지도 수련을 멈추고서 둘을 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양무연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과 기색, 기도에서 무형(無形)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오직 청겸만이 의아할 뿐이었다.
‘……왜 갑자기 비무하는 거지? 저 망나니는 왜 양가창법을 펼치는 거고?’
수련에 절실하지 않은 청겸으로선 모르는 세계였다.
그녀가 상단전의 심상(心象)을 퍼 올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은 직계의 양가창법을 새롭게 창안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고로, 청겸은 표면적인 장면만 이해했다.
‘서문경 저놈이, 양가창법으로 굴욕을 주고 있구나!’
보이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창법의 현묘한 이치를 모르는 이상, 서문경이 양무연을 어떤 길로 이끄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두 철창이 치열하게 부딪치고 있었고 서문경이 근소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딱 그 정도만 알아차렸다.
‘역시…… 천무학관에 입관한 이유가 저런 거였구먼.’
자연스레 청겸의 오해가 깊어졌다.
* * *
이튿날.
“그거 들었어?”
“아, 그 이야기 말이지.”
천무학관에 불길한 소문이 퍼졌다.
-서문의 망나니가 백련에게 마수를 뻗쳤다!
-눈물을 흘리며 도망쳤던 양무연이 서문경과 양가창법으로 비무를 벌였다더라!
그 소문의 장본인.
서문경은 매 순간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에 억울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니, 내가 언제 마수를 뻗쳤다고?”
“사실이 섞여 있으니 부정하기가 어렵겠군요.”
“주 호위, 웃냐?”
“……솔직히 웃기잖습니까. 웃지도 못합니까?”
왜 화풀이하냐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는 주백경.
본가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충정이 골수까지 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되었을까?
서문경은 주백경을 째릿 곁눈질했다.
자기가 호위를 저리 만들었다는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무영신한테 뭘 배우는 거야?”
“……그건.”
차마 입 밖으로 말하기 어렵다는 걸까?
잠시 주변을 둘러본 주백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벽을 오르는 벽호공이라던가, 그, 자물쇠를 여는…….
-대체 내 호위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짜증 섞인 말에 주백경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공자님께서 하는 짓을 보니 저한테 이걸 가르치는 게 낫겠다고 하지 뭡니까?
-……그래?
-공자님의 명예를 대체 뭘로 아는 건지! 함께 학관주를 찾아가지요!
-……음.
서문경은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앞으로 주백경과 함께 다니면서 도둑질을 안 할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 반응에 오히려 주백경이 당황스러워졌다.
-공자님, 왜 화내지 않습니까?
-뭐 하러?
-아니, 그 무사부가 저한테 자물쇠 여는 방법을…….
-언젠가 써먹지 않을까? 일단은 더 배워 둬.
-…….
쉽게 말해, 언젠가 도둑질을 하겠단 소리가 아닌가?
주백경은 자신이 도무지 무가의 일공자를 모시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주백경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르는 한편.
소문의 또 다른 주인공.
양무연은 상대하기 난처한 동기에게 붙잡혀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제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서문경이 가전무공을 조롱했다고요. 틀린가요?”
검객과 어울리지 않는 섬섬옥수, 새하얀 피부와 길고 곱게 기른 머리카락.
아미파의 삼대제자, 검봉(劍鳳) 유화.
그녀가 서릿발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양무연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잘됐어요. 천무신동이라곤 하나 망나니. 동기로 두긴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말은?”
“동기를 모아서 학관주님을 찾아가죠. 사문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좋겠네요.”
그 말에 양무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어제만 해도 ‘사문의 선배’에게 받은 편지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앓았으니까.
하지만 유화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가 알기로는 이 학년에 신창양가의…….”
“그만.”
양무연은 애써 침착한 척, 평소처럼 표독스러운 얼굴로 유화의 말을 막았다.
“천무신동과 무슨 일로 얽혀 있든 내가 해결할 일이죠. 아닌가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돕고 싶어요.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요.”
유화의 태도에 불가의 격조 높은 제자다운 자신감이 있었다.
신창양가의 방계로서 늘 뒷전이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양무연은 저도 모르게 올라오려는 열등감을 꾹 눌렀다.
“……쓸데없는 참견이에요.”
“그런가요.”
양무연의 불편한 심기를 뒤늦게 알아차린 유화가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속으로는 의아했다.
‘왜 서문 공자를 감싸는 것 같지?’
불과 일주일.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서문경과 그를 감싸는 연준호에게 불만을 품고 있지 않았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유화가 양무연에게 물었다.
“서문 공자가 가전무공을 조롱한 게 화나지 않나요?”
“실망이네요.”
“……예?”
“이름 높은 불가의 제자가 왜 소문만 듣고 확신하는 거죠?”
저 말이 퍽 당황스러웠다.
불야성에서 매일 술을 마시고, 기녀를 겁박한 추문까지.
여태껏 서문경의 소문은 늘 사실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백련이 서문 공자를 감쌀 줄이야!’
유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문이 다르게 와전된 건가요?”
“……음.”
그 말을 듣고 나니 양무연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서문경의 등장에 눈물을 흘리며 도망쳤고, 서로 양가창법으로 맞서 싸운 것도 맞다.
아마 타인이 보기에 서문경이 나쁘게 보이지 않았을까?
……소문이 최악인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양무연은 단어를 차분히 골라서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겁박당한 적은 없어요.”
“……?”
“눈물을 흘린 건 서문 공자 때문이 아니고, 도망친 건 그냥…… 당혹스러워서 그랬으니까요. 양가창법으로 싸운 것도…… 맞긴 한데…….”
‘……아무리 들어도 서문 공자가 이상한데?’
어쩌면 서문경에게 소문을 수습하라는 압박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유화의 눈빛에 의구심이 도드라지자, 양무연은 두 손을 강하게 내저었다.
“무공에 발전이 있었어요!”
“정말이요?”
“양가창법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가전무공을 부정하는 건가요?”
“아니요. 어제 가전무공을 재정립한 것 같거든요.”
정말로 서문경에게 무슨 짓을 당했구나.
유화는 양무연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랬군요.”
“믿는 것 같지 않는데요?”
“아니요. 저는 백련을 믿어요.”
“……저기?”
“저는 다음 수업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요.”
유화가 위화감이 짙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흔들었다.
어딘가 개운치 않은 헤어짐이었지만, 양무연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보내야만 했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소문은 더욱 악화되었다.
* * *
“기녀 겁박하던 버릇 못 고치고 백련한테 그 짓을 했다지?”
“가전무공을 금제당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인가?”
“그게 아니면 왜 양가창법을 등한시하겠나!”
창법을 미친 듯이 수련한다고 하여 백련(百鍊).
머리카락을 말총머리로 곱게 모아 묶은 외견과 창에 관한 진지함은 입관 이전에도 유명했다.
한데 그 양무연이 돌연 수련장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야 서문경에게 있을 거라 여겼고, 마지막으로 그녀와 대화한 유화가 미묘한 웃음을 보였다.
“역시 양가창법에 진 충격이 큰 모양이지?”
“서문세가의 힘센 망나니가 천무학관에 온 이유가…….”
소문이 또 다른 소문을 잡아먹고 커지기 시작하니.
……어느새 서문경은 무림을 부수기 위해 세외에서 찾아온 광인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됐다. X발, 내가 나쁜 놈이지.”
따갑기만 하던 눈총에 살기가 늘었다.
서문경은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다가 본가에서 호출당하는 거 아냐?”
“그건 안 됩니다.”
주백경이 진지한 표정으로 서문세가의 동향을 거론했다.
“가주님이야 공자님의 외유를 허락했지만, 가주님의 형제들은 좋게 보지 않고 계시니까요. 아마 불미스러운 일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는 무림으로 나가게 두지 않겠지.”
서문경은 여러 얼굴을 떠올렸다.
군문의 어르신답게 꽉 막히고 힘 센 삼촌들.
천무학관에 간 것만으로 얼굴이 시뻘게져서 화를 냈다고 얼추 들었던 것 같다.
‘무림에 배우러갔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한다고 했던가.’
하기야, 서문세가가 안 좋은 쪽으로 힘을 쓰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옛 무공을 구할 수 있으니까.
굳이 천무학관에 가서 부스럼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까닭을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라.
‘무연창을 보여 주면 되겠지.’
어제 비무 중에 함께 창안한 양무연의 고유창법.
서문경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무공사전을 펼쳤다.
[무연창(舞蓮槍)]
[가전무공에 갇혀 있던 천재가 껍질을 깨고 창안한 창법. 창으로 천하를 논하며 하늘에 도전하기에 충분하다.]
[직접 익히거나 책장을 소모하여 즉시 펼칠 수 있다.]
무예십팔반을 완성하는 여정.
전생의 천마가 이뤘다는 신화경을 넘어서기 위한 무공 중 하나가 되리라.
그렇게 희희낙락하는 도중.
“양무연은 어디에 있느냐!”
평소 마주치기조차 힘든 천무학관의 이 학년.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다짜고짜 일 학년의 구획으로 발을 들였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