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쟁이 창 (1)
양무연의 어린 시절.
따사로운 햇볕 아래, 선선한 바람.
그림자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
두 눈을 감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심상이다.
“무연아.”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린 양무연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응!”
그것이 꿈이든, 잠깐의 명상이든.
열네 살의 양무연은 심상을 멈추지 못했다.
닻을 내린 배처럼 과거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딸, 양가창법의 중간에 비어 있다고 했었지?”
“응, 근데 다른 삼촌이나 오빠들은 나보고 거짓말쟁이래! 주변에서 막 띄워 주니까 뵈는 게 없다고…….”
“그런 험한 말은 또 어디서 배웠니.”
힘없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어린 양무연은 아버지가 웃으니까 좋아서, 까르르 웃었다.
“나 더 많이 아는데!”
“……무연아.”
“응!”
“아빠랑 헤어지더라도, 양가창법을 제대로 배우길 바라니?”
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냥 목소리가 슬프기만 했다.
어린 시절엔 저런 걸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와의 나들이.
그것만으로 기뻐서 주체가 되질 않았으니까.
그래도 저 물음이 이상하긴 했나 보다.
“아빠랑 왜 헤어지는 건데?”
“여기선 완벽한 양가창법을 배울 수 없거든.”
“그럼 잠깐 못 보는 거네?”
“…….”
침묵이 길었나, 짧았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린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연민이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화가 나서, 양무연이 고함을 질렀다.
“멍청한 사람!”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직계로 입양되면 다시는 방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하물며 본가에서의 생활은 불행하기까지 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가만히 대기하시면 됩니다.”
하인의 말씨는 정중했지만, 뿌리 깊은 연민이 있었다.
방계에서 온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있어요?”
“……어르신께서 찾아오실 겁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
그 시간 동안 양무연은 창문 밖으로 세상을 보았다.
“오늘도 체력 단련이야?”
“하아…… 진짜 지겹다.”
창밖에선 직계의 아이들끼리 청춘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동안 양무연은 잊혔다.
직계끼리만 양가창법의 가르침을 공유했고 방계의 아이는 뒷전이었으니까.
나쁘게 말하자면 사람처럼 보질 않았다.
개나 고양이.
혹은 관상용 분재 같은 것.
“식사하세요.”
“주무실 시간입니다.”
본가의 하인에게 들을 수 있는 두 마디.
식사와 잠자리가 좋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목창을 쥐는 일 또한 없었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나날이었다.
“넌 누구야?”
얇은 벽 너머.
옆방에서 다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무연은 그가 너무 반가워서 눈물을 흘리다가, 여러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한 가지 희망을 보았다.
“내 방에 개구멍을 하나 팠거든. 네가 창문으로 하인의 위치를 봐주면 수련장을 훔쳐볼 수 있어.”
자신과 똑같은 방계 출신 입양아.
그도 마찬가지였다. 배우지 못했다.
가르쳐 봐야 언젠가 방계로 되돌아가서 유출할 거란 믿음과 차별이 있었다.
그래서 방계끼리 뭉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무슨 수업이었어?”
“찌르기였는데…… 왼발을 축으로 두고 오른팔에 회전을 담아서 휘두르더라고.”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줘.”
“아! 으으……. 그러니까…….”
옆방 아이가 수련장을 훔쳐보고 오면 양무연이 본 것을 해석한다.
그렇게 두 방계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창법을 배웠다.
눈으로 혹은 감으로.
제대로 배우는 일은 바라지도 않았다.
멀리서 훔쳐 배운 것으로 원본을 따라 하고자 했다.
그것이 어언 반년.
양무연은 양가창법의 육합을 스스로 깨우쳤다.
‘……그래도 뭔가 어설퍼.’
방계의 양가창법을 조금 더 보강했다.
그뿐이었다. 창법의 진수(眞髓).
일격필살의 한 수는 수련장에서 펼치지 않았다.
너희가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무의미한 노력을 보고 조소하는 것 역시.
그 사실과 마주하게 된 건 일 년이 지났을 때쯤.
하인이 말한 어르신, 즉 중년인이 양무연을 찾아올 때였다.
“이제 주제를 깨달았겠지.”
“……직계의 창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거요?”
“그래. 앞으로 집안의 소사를 돌보는 일을 배울 것이다.”
“그건 안 돼요!”
양무연의 외침에 중년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뱀 같은 시선이 건방진 방계의 전신을 쓸어 올렸다.
양무연이 순간 주춤하여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중년인은 의외라는 듯 보는 시선을 달리했다.
무심하던 눈동자에 활기가 돋았다.
“방에서 어떻게 창법을 배운 것이냐?”
“……예?!”
“속이려고 하지 마라. 익힌 것을 펼쳐 보아라.”
양무연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창법을 펼치든 펼치지 않든 중년인에게 문초를 당하리란 것을.
‘어쩌지.’
양무연의 눈동자가 고민으로 흔들리는 그때였다.
“양가의 그릇이 종지만 해서야! 내가 구술로 가르쳐 줬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지난 일 년 동안 수련장을 훔쳐봐 준 아이였다.
양무연의 눈동자가 화등잔처럼 커졌다.
“……진실인 모양이군.”
그새 자신의 반응을 살핀 것일까?
중년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양가 특유의 폭발적인 보신경.
양무연은 그것을 수십, 수백 번 곱씹었다.
잠시 후.
“그 애는 죽었다.”
중년인은 해갈할 수 없는 분노를 씹어 삼키는 듯했다.
일 년의 감금으로 눈치가 늘어난 양무연은 거짓말인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았다.
‘양가에 잠깐 들렀던 고수라고 했지.’
자기 이름을 바꾸면서 고수의 제자로 들어갔다고.
……왠지 슬퍼졌다. 이제 그를 만나도 얼굴을 모르니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슬픔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
양무연은 눈에 힘을 잔뜩 주며 의지를 드러냈다.
“정식으로 입적(入籍)시켜 주세요.”
“……뭐?”
“과정은 바르지 않았지만, 저도 양가에요. 양가의 창법을 익혔고요. 아저씨 눈에도 어설프진 않을 거예요.”
“어쭙잖은 실력을 보였다간 내쫓아 버리겠다.”
중년인의 으름장에도 양무연은 최선을 다해 펼쳤다.
일합에서 육합.
육합 안쪽, 무한히 이어지는 연환과 변환.
그 사이에 중년인이 잠깐 보였던 보신경을 담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오십여 초식인가.
“……그만.”
중년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는 양무연을 직시했다.
방계의 건방진 어린아이가 아닌, 한 사람의 창술가.
양무연을 보는 시선에 감탄과 탄식.
“본가에서 태어났으면 대성했을 것을.”
……또, 연민(憐愍)이라.
세 번째 마주하는 연민에 양무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저 중년인의 처분을 기다리며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긴장되고 무섭다.
설움이 눈물샘을 자꾸 채우는 것 같았다.
그때 중년인이 입술을 떼었다.
“왜 방계에 배움을 안 베푸는지 아느냐?”
“모르겠어요.”
“과거, 양가가 군부였을 시절에 방계의 반역이 있었다. 피해를 수복하느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방계와 완전히 갈라서야만 했지.”
“……예.”
“본가에 남고자 한다면 셀 수 없는 시험과 차별, 의심이 따를 것이다. ……그래도 남겠느냐?”
저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본가에 정식으로 입적해도 차별은 남는다.
직계와 수련장의 위치가 다르고 가르치는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하인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비급을 보는 일조차 없겠지.’
어린 양무연과 심상을 지켜보는 양무연.
두 양무연은 속으로 눈물을 쏟아 냈다.
이때 마음속에 한 가지를 정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연민은 받지 않을 거야. 비참해지니까.’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표독스럽게 가시를 세우고 자신을 지키겠다.
……분명 그리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심상에서 벗어난 양무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서문경.
그의 눈빛에 연민이 담긴 순간 나오는 말이 있었다.
“……나랑 비무하자. 진지하게.”
거절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물을 흘리던 동기가 갑자기 눈이 돌아가서 싸우자고 들면 거리낄 만했다.
그러나 서문경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지 뭐.”
오히려 잘됐다는 듯.
서문경이 수련용 목창이 아니라 철창을 내밀었다.
어쩌면 이상한 건 자신이 아니라 그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정말 철창으로 할 거야?”
“이쪽이 더 개운할 테니까.”
‘목창이 아니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자칫 잘못하면 크게 다질지도 모르는데, 서문경이 괜한 오기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가 첫 초식을 펼치기 전까지는.
“진왕마기(秦王磨旗).”
한 걸음 전진하며 휘두르고 사선으로 올려 치는 강격.
양가창법이었다.
그것도 직계나 방계가 아니라 자신이 펼치는 것과 같았다.
“……너!”
아무리 천무신동이고 재능이 넘치는 동기라지만, 저건 선을 넘었다.
이번 기회에 콧대를 꺾어 버릴까?
양무연은 입술을 고집스럽게 비틀었다.
“발초심사(撥草尋蛇).”
“백사농풍(白蛇弄風).”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대처가 자연스럽다.
서문경의 반격과 마주한 양무연은 잡념을 없앴다.
뒤이어 양가의 보신경을 사지에 집중했다.
카가가강!
일곱 초식, 수십 번의 격렬한 부딪침.
땅에 양발을 박아놓은 채 서로의 요혈과 손목을 노리는 난타전.
두 철창과 두 무인의 눈동자에 불꽃이 튕겼다.
“…….”
“…….”
초식명을 외는 절차조차 무시했다.
창술가로서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에게 창을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양무연은 답답함을 느꼈다.
‘조금도 먹히질 않아.’
자기 자신과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어딜 노려도 반격이 돌아오거나 가볍게 몸을 뒤틀어서 피하곤 했다.
그리고 가끔.
쩌억!
양가의 폭발적인 보신경을 응용한 것 같은 회천각이 후두부를 노리곤 했다.
‘각법의 운용도 나랑 비슷해.’
발등의 각도를 좁혀서 낫처럼 휘두르는 일격.
그마저도 자신과 닮아 있었다.
“……뭐 하자는 건데?”
“…….”
서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창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 모습에서 양무연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날 따라 해서 짓밟아 주겠다는 걸까?’
첫날에 표독스럽게 굴어서 원한을 품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철창을 택한 것이다.
이쪽이 더 개운할 거란 말까지 했으니까.
‘벌이구나. 못되게 군 벌.’
마음이 쓰라렸다. 상처받지 않겠다고 이기적으로 굴었던 대가가 돌아오는 건가 싶었다.
양무연은 입술을 깨물곤 변칙을 더했다.
스가각!
창대 끝으로 흙을 서문경에게 쳐냈다.
“……!”
창법에서 벗어난 더러운 일격에 순간 주춤하는 서문경.
양무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흐읍!”
서문경에게 파고들며 크게 휘둘렀다.
그 뒤에 두 가지 심산이 있었다.
창의 가장 약한 부분인 중간을 부러뜨려서 쌍창(雙槍)으로 연계를 이어 가느냐.
혹은 권각술 싸움으로 넘어가느냐.
어느 쪽이든 좋다.
‘진흙탕 싸움이라도 서문경을 이길 수 있다면……!’
양무연의 집중력이 극한까지 고양된 순간.
일생 중 처음으로 심적권청의 영역에 접어드니.
시간 감각이 모순되며 서문경의 생각이 들리고 읽히는 듯했다.
-처음으로 양가창법의 형식(形式)을 깼구나.
상단전이 징징 울리는 것 같았다.
서문경의 상단전 수련이 얼마나 깊고 심후한지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같은 후기지수로 치부될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선이 찰나 동안 마주쳤는데.
짓궂게 웃은 서문경이 철창을 느릿하게 휘둘렀다.
연꽃이 춤을 추는 듯.
양무연은 그의 철창에 속절없이 밀려 나가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건, 저 모습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베낀 양가창법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아니, 원본인 양가창법보다 앞섰다.
느릿한 창의 움직임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게 있었다.
‘저건 내 창법이야. 그것도 내가 언젠가, 만들 가능성의.’
양무연은 서문경이 한순간 펼친 창의 궤적을 눈에 담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휘르르…….
빠르고 매섭기만 하던, 집념과 원념으로 휘두르던 창에 여유가 생겼다.
“어디, 제대로 베꼈나 볼까?”
빙긋 웃은 서문경이 다시 철창을 강하게 쥐었다.
양무연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 심상에서 벗어나게 해 줄 남자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서문세가의 망나니란 소문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틀리면 볼기짝이라도 맞을 줄 알아.”
……망나니는 맞을지도 모른다.
양무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서문경에게 돌진했다.
시간으로 한 시진.
초식으론 이백하고도 삼십칠.
양무연은 서문경과 함께 무연창(舞蓮槍)을 창안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