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40화 (38/250)

분심조화결 (5)

‘마침 수련장에 하민이 밖에 없으니까.’

근래 무영신투는 주백경과 함께 어딜 사라져선, 녹초가 된 주백경을 업어 오곤 했다.

자기 딴에는 잡기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나중에 주백경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

머릿속에서 고민을 지운 서문경은 성하민에게 다가갔다.

“대련이나 한번 할까?”

“좋아.”

분심조화결을 연습하던 성하민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무영신투의 수업에 함께 참여한 이후로 팔 일.

그동안 그녀와 수많이 대련하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야 전생의 기억이 있지만, 이 아이는…….’

순수하게 괴물이다.

병장기를 쥐면 대강 어떻게 휘두를 줄 알았고 자신이 펼친 기예나 기교를 눈으로 읽었다.

그런 상대이기에 양무연의 창법을 연습하기에 좋다.

서문경은 무공사전의 책장을 넘겨댔다.

사륵, 사르륵…….

“항상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무슨 의식 같단 말이지.”

빈 책장을 쳐다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눈치다.

가끔은 고개를 슬쩍 들이밀어서 무공사전을 노려보기도 했다.

성하민이 가진 재능이 워낙 비범한지라, 몸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대련 도중에 얻은 정보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라.

서문경은 머릿속에 기억한 것을 떠올렸다.

[성하민 – 열두 살]

[신을 담을 그릇. 어느 무공을 배워도 자연스럽게 본질을 투과하는 재능과 본질을 체현할 육신을 가지고 있다.]

[보유 무공 : 성락구검(星落九劍)]

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서술은 대체 뭘까?

어쩌면 사천에서 마교가 노린 건 불규칙 다수가 아니라, 성하민이 아니었을까?

이제 와서 묻기도 난처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남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같은 학관의 동기로 충분하지 않나.

서문경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목창을 쥐었다.

“선공은?”

“당연히 약한 내가 먼저지.”

성하민이 수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비해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이 혜성과 같다.

쩌정!

땅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 흙이 물을 머금은 시기임에도 그러했다.

‘무공사전에 쓰인 게 사실이라면 별다른 신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언제 저렇게 강해진 걸까?

서문경은 왼눈을 찡그리며 성하민과의 거리감을 맞췄다.

임전무퇴(臨戰無退).

서문세가의 가훈 하나를 떠올리면서.

촤르륵…….

왼손으로 무공사전의 책장을 열었다.

양가창법-위.

양무연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 머릿속에 도해처럼 펼쳐졌다.

오른손의 목창을 자연스레 앞으로 내지르니.

‘이합(二合) 봉점두(鳳點頭).’

창극(槍戟)의 극점.

가장 연약하나 날카로운 일점이 성하민의 미간을 향했다.

동공은 서문세가의 것으로 대체했으나 속도는 뒤지지 않았다.

“……하.”

성하민이 짧은 숨을 내뱉었다.

두 무인의 경계가 맞닿는 찰나.

이 순간을 벗어나지 못하면 서문경의 창법이 변화하고 연계될 것이다.

성하민의 예감과 직관이 서로 뒤섞였다.

“일소낙생(一嘯落生).”

성락구검의 현묘한 초식이 허공을 수놓는다.

봉점두가 극점의 찌르기라면 일소낙생은 기검과 철검이 동시에 교차하는 일격.

‘처음부터 창극을 부수겠다는 거냐.’

서문경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뒤이어 안법을 운용하여, 시퍼런 광망이 휘감겼다.

입술 끝이 교묘하게 뒤틀렸다.

성하민의 손목과 아주 작은 힘줄의 움직임마저 훤히 보였다.

“어디, 해 봐.”

창극을 기꺼이 주고 어깨를 취하리라.

사합(四合) 철소추(鐵掃箒).

내지르던 목창을 아래로 휘돌렸다.

갑자기 공력의 운용을 바꾸는 셈이었지만, 삼단전의 흐름이 꼬이는 일은 없었다.

분심조화결의 심유한 공능 덕택이었다.

이는 성하민도 마찬가지였다.

“화무도간(花武跳澗).”

철소추를 빗기며 거리를 뛰어넘는 기량이 참으로 기껍다.

서문경은 짓궂은 미소를 짓곤 창을 연거푸 휘둘렀다.

카강! 카드드득……!

그렇게 성하민과 수십 초를 교환했다.

짬짬이 생각을 떠올렸다.

전생에 본 양가창법과 비교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원본과 초식명이나 펼치는 방식은 같지만, 양무연이 덧붙인 부분이 많아. 아마 이걸 덧붙이면 어떨까 고민했겠지. 서문창법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양무연의 양가창법은 양가창법이되, 자기만의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고민의 흔적이 창법에 고스란히 녹았다.

잡스러운 동작을 더 걷어낸다면 원본보다 훨씬 나았다.

‘이래서 하늘을 부숴야 한다고 적혀 있었나.’

[어린 나이에 각고의 노력을 통해 벽을 넘어섰으나, 창법으로 대성하려면 하늘을 부숴야 한다.]

양무연에게 하늘이란 양가창법일 터.

그 하늘을 눈대중으로 어중간하게 배운 것도 이상했다.

만일 연준호처럼 친한 사이였다면 직접 물어봤을 터였다.

‘나중에 가까워진다면 귀띔이나 해 둘까.’

생각을 정리한 서문경이 대련을 멈췄다.

“이쯤에서 멈추자.”

“중간부터 딴생각이나 하더니…… 오늘도 뭐 끝까지 가진 않네.”

성하민이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수업을 시작한 뒤로 일주일.

승패를 가릴 정도로 진지하게 싸우지는 않았다.

그 이유야 간단했다.

“끝까지 가려면 천무학관이 아니라 다른 데서 해야 할걸.”

성락구검이야 천천히 수집하면 그만.

굳이 수련장을 부숴서 무영신투와 틀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나중에 싸워 주지 않을 것도 아니고.’

서문경이 빙긋 웃자 성하민도 뜻을 꺾었다.

“알았어. 학기가 끝나면 그때 하자.”

“고마워.”

“됐어…… 동기들이랑 친해질 생각이나 해.”

“갑자기?”

“열흘이나 지났는데도 친하게 지내는 게 나랑 준호 정도잖아.”

그 말에 서문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대련을 순순히 그만둔 이유가 바로 저거였다니.

‘아버지한테 괜한 오해를 사서 창피당한 거 이후로 두 번째로 부끄럽네.’

이대로라면 성하민에게 친구 없는 외톨이로 보이게 될 터.

낯빛이 굳은 서문경이 수련장에서 떠났다.

이왕 창법을 수련한 거, 양무연과 안면을 익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흐윽, 흑…….”

천무학관의 담장 근처.

그곳에서 양무연이 흐느끼고 있었다.

평소 표독스럽기 그지없는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인지라, 혼자 울 곳을 찾은 것 같았다.

‘아, 이거 어쩐다.’

그래도 일단 달래 줘야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

서문경은 일부러 발을 굴렀다.

“크흠, 흠.”

헛기침하며 양무연에게 다가가려는데, 눈이 화등잔처럼 커진 그녀가 서둘러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괜히 미안해졌다.

이런 일에는 워낙 경험이 없어서 실수가 잦았으니까.

서문경은 양무연이 흐느끼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저건.’

천할 천(賤).

수십 조각으로 찢긴 종잇조각 중에서 눈에 띄었다.

신창양가의 후기지수면서 창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유와 연관된 것일까?

‘왜 눈대중으로만 익혔는지 궁금해지긴 하네.’

남의 사연인 걸 알지만 흥미가 솟았다.

가전무공을 제대로 전해 받지 못했음에도 자기 영역을 개척한 양무연에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곧바로 뒤쫓아 갈 생각은 없었다.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이면 모를까. 백련이라는 별호까지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필요할 때 말하겠지.’

가진 능력이 많은 것과 오지랖을 떨어대는 건 다른 문제.

서문경은 어디까지나 전생의 기억을 가진 고수이지 해결사가 아니다.

다만 기억에 담아둘 만은 했다.

‘일단은…… 나중에 다시 가르쳐 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창법을 좀 연마해 볼까.’

서문경은 천천히 수련장으로 향했다.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그게 아니라니까! 손이 그렇게 굼떠서 어쩌냐!”

“아니…… 쉽지 않습니다.”

무영신투가 주백경에게 여러 손재주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는지 모를 지경.

서문경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자꾸 어딜 가나 했더니만 뭐라도 가르치고 있긴 하나 보네.’

아무래도 주백경에게 근기가 있으니 가르칠 맛이 난다.

조금이라도 게으르거나 꾀를 쓰려고 들었다면 호북성까지 오는데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무영신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둔한 거 빼곤 괜찮은 애네.

-주 무사가 그래도 성실합니다.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근기가 좋다는 건 무인으로서 대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양무연은 주백경보다 더 재능이 있으니까.

훗날 마교와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시작해 볼까.’

서문경은 목창을 쥐었다.

* * *

“……창피해.”

양무연은 침소에서 몸을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망나니라고 헐뜯었던 서문경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켰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언젠가 찾아와서 협박할 것 같았다.

‘하지만 비무대에선 친절했는데…….’

자신의 창법에서 부족한 부분을 짚고 추가할 묘리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것만으로 창을 대하는 견식이 넓어졌다.

양가창법을 완전히 따라할 시간이 짧아질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서문경의 소문이 떠올라서…… 괜한 불안함이 떠올랐다.

‘나를 속이려는 거겠지.’

언젠가 돌변할 것이 뻔했다.

본가의 사람들처럼,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매도하고 깎아내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먼저 표독스럽게 꾸짖어 버리는 것이 낫다.

“어차피 망나니잖아. 내가 나쁘게 굴어도 괜찮을 거야. 어차피 적은 많았잖아…….”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글귀가 있었다.

한 학년 위에 있는 신창양가의 직전제자.

양철심(楊鐵心)이 보내온 편지였다.

천한 것 주제에 천무학관에 들어갔느냐!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남들에게 창피를 당하느니 내 손으로 끊어 주마.

삼십 일 뒤, 학년 간 비무 날. 나는 너를 지명하겠다.

보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설움이 차올랐다.

찢어 버리지 않고서야 버틸 수가 없어서, 곧장 천무학관 외곽으로 갔었다.

쫘악, 쫘아악!

수십 갈래로 찢어도 차오른 설움은 나아지질 않았었다.

침소에 누운 지금까지도.

‘대체 몇 년을 괴롭혀야 그만둘까, 언제 흥미가 사라지는 걸까.’

침소를 눈물로 적셨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아서 창가로 다가갔다.

후웅, 휘익─!

유쾌하다. 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 소리를 따라서 양무연이 고개를 돌렸다.

“……어.”

멍청한 음성을 내버리고 말았다.

멀지 않은 장소에서 서문경이 목창을 휘두르며 끊임없이 동공을 행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장면을 들켰다는 생각보다는 궁금증이 커졌다.

“저게 서문창법인가?”

군문의 가전창법에 흥미가 갔다.

신창양가의 창법과 무슨 차이가 있을지 비교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눈물 흘리는 광경을 보이지 않았던가.

‘지금도 눈이 부어 있을 텐데.’

나가기가 싫어졌다.

나중에 마주칠지언정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강인하구나.”

서문경의 창법에는 갖은 묘리가 담겨 있었다.

회천과 발경을 위시한 기본적인 기교와 사희(蛇戱) 같은 눈속임 역시.

상대를 죽이기 위한 형으로 가득했다.

자신과 비무할 때 얼마나 봐주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양무연이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때.

“…….”

서문경과 시선이 순간 마주쳤다.

한데 그의 눈동자가 어딘가 익숙했다.

아주 예전, 그러니까……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너!”

연민(憐愍).

양무연이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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