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35화 (33/250)

입관 (5)

그날 밤.

숙소에 돌아간 서문경은 곧장 주백경을 찾았다.

“주 무사.”

“예, 공자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이제 막 수련을 마친 듯.

땀에 푹 젖은 주백경이 어린 주군을 맞이했다.

하지만 서문경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주 무사, 내가 분명 사천에서 구했던 아이들…… 잘 돌보라고 하지 않았나?”

“제가 지시하기로 가족이 있는 아이에겐 생활비를 넉넉하게 주었고, 여읜 아이는 한 달 동안 지켜보면서 먹고살 기술과 여비를 주었습니다.”

“딱 둘로 나눴단 말이냐?”

“혹시 말없이 떠났던 아이를 말씀하시는 거면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주백경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공무라는 것이 원래 범례로 나누어서 이루어지기 마련.

하나 서문경이 아이들의 처결에 관해 신경 쓰라는 말이 있어, 한 달이나 서문세가에서 직접 품었다.

군문답지 않게 안온한 처리였다.

하지만 그걸 거절하고 나간 아이까지 어찌 돌보란 말인가?

“그랬군.”

주백경의 설명을 들은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천무학관으로 간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을 때니까.

애초에 여자아이가 홀로 호북성 무한까지 도착한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렇지만 애석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떽! 그래도 네가 알아서 잘 관리했어야지!”

“……그걸 정리하고 본가에서 공자님과 출발한 겁니다. 뒷일은 다른 문관에게 맡겼고요.”

“조그마한 여비로 무한까지 와서 천무학관에 입관까지 했다더라! 그 재능을 서문세가가 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

“그 온정을 저한테 조금이라도 베풀어 주시면 안 됩니까?”

“너는 내가 직접 무공을 가르쳐 줬잖아!”

“……쩝.”

꼭 이럴 때만 되면 무공을 가르친 생색을 낸다.

주백경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쨌든 좋은 숙소를 마련하여 시비까지 붙였으면 된 거지요.”

그 말에 서문경이 주춤하여 물었다.

“그걸 네가 어찌?”

“가주님의 명에 따라 공자님과 동행하는데, 어디서 무얼 하시는진 항상 파악해 두지요.”

“……거참 든든하구나.”

말과 표정이 완전히 다르다.

주백경은 서문경의 얼굴에서 마뜩잖다는 감정을 읽었다.

드디어 우위를 점할 약점을 찾아서인가, 미소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무공 스승이시긴 하나, 저는 공자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호위입니다. 방계를 찾아가 그 아이의 처지를 보살피라 명한 것도 알고 있지요.”

“재산을 관리하는 호위라…….”

“예.”

“그래, 그렇다면 말이야.”

서문경은 히죽 웃으며 주백경에게 다가갔다.

“주 무사가 내 돈으로 매일 술이나 처먹다가 기절했던 건 괜찮고?”

“……그, 그건 공자님께서 강요하셨으니까!”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세상 사람이 그걸 믿어 줄까?”

아뿔싸.

주백경이 입을 꾹 다물자, 서문경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좋은 시도였어. 그래도 아직 한참 멀었지만.”

“끄응…….”

“뭐, 내 위치나 가는 곳을 파악해 두는 건 잘하고 있어. 항상 그렇게 해.”

그 말에 주백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천무학관에 마교가 있노라고, 우리가 그들을 찾을 거라고.

서문경이 말했던 것을 단박에 떠올렸다.

저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일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마교가 공자님을 노린단 겁니까? 입관 시험 때 생긴 일로요?”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한두 번 마주친 것도 아니니까.”

“적이 어디에 있는지, 누군지도 모를 무림에서는 본가로 되돌아가기도 벅차니 기호지세(騎虎之勢)의 형국이 되었군요.”

기호지세.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형세를 뜻한다.

이미 마교에게 대적한 이상, 중도에 멈출 수 없다는 의미.

주백경은 한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여전히 가주님의 힘은 빌리지 않으실 생각이군요.”

“아버지가 나서면 뿌리 뽑기 어려워질 테니까.”

“……마교가 공동의 적이긴 하다지만, 너무 완벽히 하려고 어려운 길을 가시지 않나 싶긴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답을 낸 것인지, 주백경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래도 고집 강한 공자의 길을 따르기로 한 모양.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은 미안함을 느꼈다.

완벽함을 도모하는 것도 있지만,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사실 무공사전 때문이기도 하지.’

천하의 기재가 모두 모였다는 천무학관.

그들의 무공으로 가전무공을 신공으로 엮는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서문검법과 번천광검결을 뒤섞은 초식, 천경에서 보았다.

하물며.

‘정말로 잡기(雜技)를 가르치는 무사부가 있을 줄이야.’

연준호가 말하길, 천무학관에서 유일하게 담당하는 제자가 없는 무사부가 있다고 하였다.

그가 가르치는 과목이 바로 잡기.

호기심에 가 보았던 후기지수들도 무사부의 태도를 보고 마음을 접었다던데, 과연 어떨까?

서문경은 주백경과 대화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 * *

다음 날.

서문경은 빈손으로 숙소를 나왔다.

천무학관에 출석하는 데 딱히 필요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학관 내에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

‘어제는 학관 내부 소개였고, 오늘은…… 수업 신청일인가.’

천무학관의 일상을 어떻게 꾸릴 것인지 정하는 날.

여름이 다가오는 까닭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푸르고 높았다.

쌀쌀했던 바람에 자그마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참으로 좋은 날씨다.’

엷은 미소를 빼 문 서문경은 곧장 옆집으로 향했다.

성하민을 그곳에 들였다.

혹여나 마교가 다시 노릴까 싶어서 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씨께선 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

시비가 난처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 일찍 가지 않으면 좋은 수업을 신청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거짓말에 능하지 못한 사람으로 들였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나 때문이구먼.’

하기야 자신의 소문이 워낙 나쁘긴 했다.

서문경은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심중이 연약하여 자그마한 것도 불안해할 사람 같았다.

“알겠다. 앞으로 성 소저를 보필해 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공자님!”

서문경은 안도하는 시비를 뒤로하고 천무학관으로 향했다.

이곳저곳, 벽에 남는 자리마다 방이 가득 붙어 있었다.

-검이란 무엇인가, 무학자의 시선으로 본 검술의 총결론!

-주먹을 알고 싶거든 따라오라!

-소림사 정현이 말하고 보여 주는 외공 수업.

-제갈세가는 진법의 기초부터 다르다!

천하의 기재를 가르치는 무사부들답게 열정이 대단했다.

서문경은 그것을 하나하나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잡기를 가르친다는 방은 보이질 않네.’

아예 제자를 들일 생각조차 없는 걸까?

잠시 집중이 흐트러지니 들리지 않던 조잘거림이 들려왔다.

“저 아이가 천무신동인가?”

“가능하면 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구먼…… 거절할 명분도 딱히 없고.”

“관주님께 찍힐지도 모르지.”

여기도 궁중과 다를 바 없나.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혹여나 천무학관주의 심기를 건드릴까 싶어서, 서문경을 제자로 들이는 걸 꺼려하는 듯했다.

‘역시 그날, 너무 세게 나갔나.’

학관주가 있는 자리에서 책임을 논하고 방비가 부실했던 것을 비꼬았다.

어디 그뿐이랴.

실제로 관리 몇몇이 나타나 천무학관을 훑고 가기까지 했다.

천무학관의 실권자와 친분이 있을 터이니 대충 엉덩이만 뭉개다 갔겠지만, 치욕은 남는다.

서문세가의 일공자가 가진 권위가 어디까지 통용되는가.

그걸 뼈저리게 본 이상, 제자로서 쉽게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쯥.”

서문경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가능하면 대련을 자청하여 그들의 무공도 맛보고 싶었는데, 마교의 위협을 주지시킨 대신 거리감이 생겨 버렸다.

‘뭐, 앞으로 바꾸면 되지.’

굳이 전전긍긍할 필요까지 없지 않나.

서문경의 시선이 여러 방을 훑다가, 딱 한 장만 붙은 걸 발견했다.

-잡기술. 외부인 청강 가능.

“……뭐지?”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어느 무사부가 가르치는지, 어디서 만나는지, 무엇을 가르치는지조차 없었다.

그냥 저 열 글자가 전부였다.

‘아, 이래서 호기심으로 가봤던 후기지수들이 마음을 접었나.’

제자를 거두는 자리에 성의 없는 방을 붙일 정도.

실제로 만나면 얼마나 더 귀찮아할지 대충 감이 왔다.

거의 내버려 두는 수준으로 방치할 게 분명했다.

괜히 오기가 생긴다.

방을 뗀 서문경은 여러 말을 꿍얼거리던 무사부에게 다가갔다.

“이거, 잡기술 가르치는 무사부가 누굽니까?”

“……학관 외곽의 허름한 집에 있을 게야.”

“누군지를 물었습니다.”

“나도 몰라. 그냥 자길 낭인이든 도둑놈이든 마음에 드는 쪽으로 부르라고 했으니까.”

거짓말처럼 들리진 않았다.

진심으로 떨떠름한 사람 이야기를 꺼내듯.

표정이 편치 않았으니까.

후기지수끼리 소문이 나쁜 것처럼 무사부끼리도 그를 멀리하는 것이 보였다.

서문경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관주 눈치나 보는 사람의 식견보단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낫겠다.

서문경은 다른 방들은 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어차피 다른 무기술은 가전무공을 모두 익힌 것으로 충분했다.

그 와중에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 수업에 관심이 있나 했는데 다행이구먼.”

“나도 다행이네. 저런 사람한테 안 배워서.”

작게 주절거리니 귀 밝은 무사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래서 뭐 어쩔 것인가.

자신을 후기지수가 아니라, 서문세가의 일공자로 보는 이상 절대 건드리지도 못할 텐데.

서문경은 그에게 보라는 듯 빙긋 웃고는 외곽으로 향했다.

“거짓말은 안 했네.”

관리 한번 없이 방치한 수련장.

흉가에 가까운 오두막.

무림 최고의 학관에 걸맞지 않은 수련장이었다.

무사부가 마뜩잖게 여길 만했다.

하지만 서문경의 시야엔 다른 것이 보였다.

‘……저 글자는.’

오두막 앞에 뚜드려 박은 말뚝.

거기에 의미 모를 낙서가 있었다.

척 보기에 여러 글자를 하나에 겹친 듯했다.

보통이라면 무슨 글자를 겹친 것인지 알 수 없겠지만, 교묘한 차이가 있었다.

‘긁어 놓은 깊이와 필법이 아주 조금씩 다르다. 총 네 글자야.’

서예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다.

서문경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전생에 소가주로서 공부할 때 익힌 암호 중 하나였다.

먼저 봐야 할 것은 초서(草書).

가장 흘려 쓴 글씨, 초고에 흔히 쓰는 필법이었다.

“……무(無).”

그다음은 덜 흘려 쓰는 행서(行書).

조금씩 똑바로 쓰는 필법으로 변화하여 겹쳐 쓰는 암호문.

서문경의 미간이 좁혀졌다.

글씨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영(影).”

여기까지 읽었다면 나머지 두 글자는 직관으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서문경은 말뚝에 쓰인 글자를 모두 파악했다.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 시기에 어디 박혀 있나 했더니만.”

천무학관에 은둔하고 있었을 줄이야.

잡기술 무사부의 정체를 알아차린 서문경은 곧바로 성하민을 찾았다.

“으음, 음…… 뭘 배우지…….”

여러 방 앞에서 고민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조금 섭섭해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서문경은 성하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랑 수업 하나같이 듣자.”

“어, 어, 어어……!”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 눈을 크게 뜨다가, 성하민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못된 짓을 했던가?

서문경은 섭섭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내가 그리 싫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성하민은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놓고 얼굴을 마주하기가 부끄럽다고.

그녀는 애써 붉어진 얼굴을 다스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무슨 수업인데?”

“잡기술.”

“잡기술? 그런 게 있었어?”

“응. 나만 믿고 따라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서문경의 모습에 강한 확신이 있었다.

과거에 사천성에서 마인과 싸웠을 때처럼.

성하민은 그 뒷모습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공연히 떠오르는 사심이 있었다.

“우, 우리만?”

설마 둘이서 수업을 듣게 되는 걸까?

성하민의 설렘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서문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주 무사도 함께 들을 거야. 외부인도 가능하다니까.”

“……아.”

콩닥거리던 설렘이 싸늘하게 식었다.

성하민이 그러거나 말거나 서문경은 ‘잡기술’ 수업 신청란에 세 사람을 적어 넣었다.

“좋아.”

다른 수업은 자유 시간이 넉넉한 걸로 찾아볼까?

서문경이 그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서문 공자, 당신과 비무하고 싶어요.”

백련 양무연.

그녀가 자신을 똑바르게 쳐다보고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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