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관 (1)
“그나저나 너, 팔자 폈더라. 내 돈으로 다 처먹어놓고 끌려다닌 걸로 소문이 퍼졌던데?”
“……어쩌다가 그렇게 돼 버렸네?”
연준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대로, 서문경의 소문이 워낙 나쁘다 보니 자신은 억지로 끌려다닌 걸로 와전되었다.
정작 불야성을 제일 열심히 즐긴 사람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을 통하진 않았지만…….
생각이 허튼 데로 빠질 뻔했다.
연준호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커졌다.
“지금 그게 중요해? 겨우 하루 남았다고!”
“중요하지. 돈을 다 썼는데 나만 나쁜 새끼 됐잖아.”
진심으로 억울한 일이 아닌가.
서문경은 연준호를 흘겨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소기의 목표는 모두 달성했지만, 나름대로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건만.
불야성에서 지내는 나날마다 연준호만 인기가 좋았고, 주백경과 서문경은 꿔다 놓은 허수아비 처지였다.
‘그나마 주백경은 매일 술이나 마시다 자서, 주량이 늘기라도 했지.’
기녀가 먼저 무례를 저질렀다는 시작은 잊히고, 열흘의 술값을 받아 냈다는 결과만이 악명으로 남았다.
서문경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개방과 마교를 불러내려던 계획은 이루어졌지만, 잃은 것이 꽤 컸다.
“나랑 엮이려는 무사부나 학관생이 있기는 할까?”
슬슬 무인의 무공을 무공사전으로 수집해야 하는데, 서문경이 나타나면 거리를 슬슬 벌린다.
대화하기도 싫다는 뜻이다.
인식을 개선하지 않는 한, 가까워질 인연이 없다.
이에 연준호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있잖아. 후기지수 모임에서 좋은 친구라고 해둘게.”
“역시!”
매일 얻어먹더니 그래도 써먹을 데가 있긴 했구나!
서문경이 씨익 웃는 도중에 주백경이 끼어들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있지요. 두 분이 똑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너어는…….”
하루하루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을까.
서문경은 자연스럽게 주먹을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몸도 풀 겸 비무나 좀 하자.”
“윽…….”
주백경이 울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서문경의 억지 때문에 불야성에서 술을 마셨지만, 수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다.
스으윽…….
주백경이 한 걸음을 내디딤에 차곡차곡 쌓은 하단전의 공력이 동공의 행로를 따라 솟구친다.
서문경은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입관 시험 전에 몸 풀이 정도는 되겠네.”
항상 구박하고 무시하지만 두 달 동안 주백경은 무수히 발전하고 강해졌다.
초식은 자신에게 배우고, 부족했던 공력은 옥화산을 털어서 얻은 영약으로 보충하였으니.
동년배 사이에서 적수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
주백경의 눈동자에 잘 갈무리된 공력이 번뜩이는 듯했다.
“제가 선공을 취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서문경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순간에 주백경이 땅을 박찼다.
그들 옆에 있는 연준호로선 지루할 틈이 없어 즐거웠다.
다음 날.
서문경은 줄곧 지나치기만 했던 천무학관의 정문으로 향했다.
시선이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정말 지원한다고?”
“남사스럽군. 군문의 자제가 되어서 여기까지 온 것도 그렇고, 주루를 즐겼다는 것도…….”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말만 앞선다.
흑선채와 마찬가지로 무공을 수집할 가치가 없는 것들.
서문경은 번잡한 소릴 한쪽 귀로 흘리며 안쪽으로 향했다.
허나 그곳에 있는 무사부들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았다.
“자네가 천무신동 서문경인가?”
“그렇습니다.”
“들은 것에 비해 기도가 안정되어 있군.”
대체 뭘 들은 걸까.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지만, 초장부터 인상을 더 나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 왜, 연준호가 계속 걱정하지 않았나.
그렇게 삐딱하게 굴어서야 태도 점수에서 계속 깎일 것이라고.
‘어차피 칼질 가르치는 곳이 무슨 태도를 본다고…….’
여러 사건을 통해 무공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서문경에게 있어 무공은 살인술.
거칠게 베나 친절하게 베나 뒈지는 건 똑같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무사부가 몇 가지를 물었다.
“자네 나이가…….”
“열넷입니다.”
“익힌 무공은…….”
“가전무공 중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습니다.”
여러 질문에 대답하다 보니 무사부가 짐짓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평소 언행에 문제가 있다곤 하나, 임기응변으로 마인을 무찌른 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임기응변이 아니라 실력인데.’
묘하게 얕잡아보는 기색이 강하다.
서문경은 무림인이 군문에 가지는 인식이 이렇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냥 갑주 걸치고 육중하게 돌격하거나, 화살로 전쟁하는 줄 아네.’
무공이 무슨 강호인만 익힐 수 있는 것인 줄 아나.
서문경은 무사부에게 말대답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다행히도, 질문 세례는 적당한 선에서 끝났다.
“오늘은 입관 시험 마지막 날일세.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네. 안쪽에서 대기하게.”
“무슨 시험입니까?”
“유수행(流水行), 유등행(油登行), 불영행(不影行)으로 지원한 후기지수의 삼단전 기량과 정신력을 가늠할 걸세.”
시험 이름을 시원시원하게 말할 줄이야.
서문경은 입관 시험이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 무사부의 표정만 봐도 자긍심으로 가득했다.
‘시험장에 교묘한 진법이 설치되어 있겠지.’
천무학관 내부에 물이나 기름이 흐를 리가 없다.
하물며 그림자가 없다는 건 천지간의 섭리를 부정하는 일.
저 말을 들으니 도리어 한 가지가 걱정되었다.
“제가 시험을 망쳐 버리면 어떡합니까?”
“뭐라고?”
“요컨대…… 힘을 너무 써서 시험장을 부숴 버린다거나요.”
그 말에 무사부가 크게 웃었다.
“천무신동이라더니 자신감이 과하군. 웬만한 고수가 손을 써도 시험장은 끄떡하지 않을 걸세.”
“무사부님께서 보증하신 겁니다?”
보증이란 단어에 무사부가 순간 움찔하였으나, 어린 후기지수에게 밀릴 수 없어서 호기롭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내 보증함세!”
“……흐흐, 알겠습니다.”
보증을 받았으면 마땅히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서문경은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시험 대기실로 이동했다.
“후우…….”
“이제 다음이 난가?”
긴장감에 푹 젖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후기지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에 비해 서문경은 여유로웠다.
무슨 시험이 있건, 검치와 척안룡과 부딪쳤던 때보다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제 들어가려나. 한 시진은 넘게 기다려야겠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빨리 출발할 걸 그랬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데, 앞사람들이 금세 탈락했다.
일다경에 서너 명씩.
시험장에 들어갔다 하면 ‘못하겠어!’, ‘이걸 어떻게 해!’란 소리가 나왔다.
개중에는 너무 급했는지 엄마를 찾거나 살려 달란 외침도 들렸다.
“대체 뭐야?”
“……으으.”
“나, 나갈래.”
대기실에 있던 몇 명이 시험을 포기하기도 했다.
아직 어리니까 천무학관의 다음 기수를 노릴 수 있는 꼬마가 보통 그러했다.
그렇게 사람이 빨리 줄어들어, 반 시진.
“천무신동 서문경!”
“갑니다!”
서문경은 왼손에 무공사전을 든 채 시험장으로 입장했다.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쏴아아……!
하늘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옥색 폭포.
그 아래에 깊게 팬 골짜기가 서문경을 반겼다.
‘절벽이 없는데 폭포가 있다? 게다가 목조 건물 안에 무슨 골짜기야?’
제갈세가가 만든 환영진임이 틀림없다.
일부러 천하에 없는 광경을 만들어, 후기지수에게 큰 압박감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서문경은 골짜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육합전성처럼 모든 방위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골짜기의 밑바닥에 있는 여의주를 취하면 다음 시험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아, 귀 아파.”
인상을 찡그린 서문경이 발끝을 슬쩍 물에 담갔다.
스륵…….
수면에 닿는 촉감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한기가 피부에 맞닿았다.
“어후!”
한겨울의 강물이 이러한 느낌이던가?
진법을 구성한 게 누군진 몰라도 감각을 희롱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서문경은 자연스럽게 천주심경의 의념 절초를 떠올렸다.
‘그냥 부수면 여의주가 내 앞에 있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머릿속에서 지웠다.
첫 시험부터 깽판을 치면 천무학관에서 좋게 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경지에 있으면서 왜 애꿎은 진법을 부쉈냐고 하겠지.
서문경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공법으로 해 주지 뭐.’
하단전 공력으로 전신의 호신기를 끊임없이 유지하여 한기가 침습하지 않게 한다.
방도를 떠올린 순간에 골짜기로 몸을 던졌다.
촤아악……!
큰 소리가 귓구멍을 울렸다. 청각에 환상을 심은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골짜기 안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그 인식을 머릿속에 심고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누군진 몰라도 악취미야.’
평범한 열네 살 후기지수가 이걸 버틸 수 있을까?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천무학관의 시험이 엄격하다곤 하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꽈악……!
어느 정도 깊게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수압이 전신을 덮쳤다.
이대로 아예 밑바닥까지 가라앉히겠다는 압박감.
참으로 정교한 진법이었다.
서문경은 숨을 훅 내뱉고는 물줄기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밑바닥으로 안내해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나.’
유등행과 불영행의 시험이 남은 이상, 기꺼이 응해 주리라.
서문경은 명정한 마음으로 아래를 훑었다.
‘저게 여의주구나.’
옥색으로 빛나는 구슬.
그것을 손아귀에 쥐는 순간, 천하가 뒤집혔다.
콰르르르──!
골짜기의 물이 순식간에 아래로 빠져나간다.
서문경은 순간 떠오른 감상을 말했다.
“이거, 심약한 놈이면 기절해 버리겠는데?”
천하가 뒤집히고 몸이 아래로 잡아당겨진다.
홍수나 해일에 휩쓸린 사람처럼 큰 무력함과 공황에 빠질 터였다.
이때 손을 허우적거리면 경험하는 것이 바로.
처억!
기름으로 이루어진 벽에 손등까지 파묻힌다.
“오…… 이게 유등행인가?”
서문경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렇게까지 정교한 진법이 그대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 직후에 모든 방위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벽의 정상에 오르면 다음 시험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아오. 시끄러워.”
서문경은 무공사전을 놓치지 않게 왼손으로 꽉 쥐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몸이 아래로 흐르는 기름에 떠밀리고 있었다.
“엄청나게 질척거리네.”
이것까지 정공법으로 올라갈 이유가 있나?
불쾌한 촉감에 넌더리가 난 서문경은 기름으로 이루어진 벽을 찼다.
쿠웅……!
정교한 장치 따위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순간 눈이 크게 떠졌다.
진짜 저질러버렸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무사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거! 저를 시험에 접수한 선배님이 보증했습니다! 망가지면 그분이 책임진댔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재빨리 올라가자.
서문경은 보신경을 펼쳐서 정상까지 빠르게 올라갔다.
그렇게 발이 땅바닥에 닿는 순간.
처억.
“……이게 불영행?”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나.
서문경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웃었다.
“후기지수한테 이런 진법을 펼치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
인지마저 뒤엉켜, 기감이나 오감이 통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합격 조건을 논하던 목소리마저 없었다.
“난감하네.”
대체 무엇을 하면 좋을까?
서문경이 제자리에 서서 골똘히 생각하는 한편.
……스윽.
조용히 서문경에게 다가가는 이가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