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30화 (28/250)

불야성 (5)

소가주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가고.

서문이현을 통해 망나니라는 소문을 퍼뜨렸으며.

호북성 무한에서 광증에 가까운 행동을 이어 간 이유가 바로 눈앞의 양귀비쟁이에게 있다.

서문경은 노인을 붙잡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노인이 보기에 이상적인 망나니가 되어야 한다.’

꽤 오랫동안 이 짓을 하다 보니 관록이 행실에 녹았다.

떠오르는 행동과 언행을 그대로 토했다.

“꽃은 무슨 꽃이야? 설마 당신…….”

“쉬잇, 쉿. 따로 이야기하지.”

“뭔 소리야! 붙잡혀 가고 싶지 않으면 다 내놔야지.”

눈을 희번덕거리며 노인의 어깨를 잡았다.

역시나 왜소한 외견에 비해 알찬 근육이 자리 잡혀 있다.

노인의 안색이 일변하려는 찰나에, 서문경은 취월루 안쪽을 곁눈질했다.

“저기 있는 도사 놈 보이지? 당신이 보기엔 어때 보여?”

“……빼빼 마른 것 같군.”

“꽃 좋아하게 생기지 않았어? 저 새끼, 술도 잘 마시고 방탕하거든.”

서문경은 히죽 웃으며 노인이 든 주머니를 툭툭 두드렸다.

한량이나 다를 바 없는 몸짓에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머니를 뒤로 홱 뺐다.

“이게 무슨 짓인가!”

“어차피 팔 거잖아. 내가 관군한테 말해서 잡아 봐야 지금 가지고 있는 것밖에 가지지 못하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나도 쟤도 즐길 건데, 기왕이면 다른 친구한테도 나눠 주려고. 좋은 건 나눠야 좋은 거잖아.”

그 말에 노인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막돼먹은 인간인 줄 몰랐다는 시선이었다.

“천무학관의…… 후기지수한테 팔겠다는 거냐?”

“쉬잇, 쉿!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서문경은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노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양귀비를 태우는 손장난을 보여 주었다.

전생 시절, 서문세가의 소가주로 살면서 이런 사람을 주의하라고 배운 지식.

그 지식은 현생에서도 잘 써먹을 수 있었다.

“…….”

노인의 눈에 담겨 있던 일말의 의심조차 사라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서문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 번으로 끝낼 거 아니잖아, 앞으로 좀 땅겨 줘.”

“……기억해 두마.”

“아. 일단 가지고 있는 건 주고 가. 어느 정돈지 맛은 봐야 할 거 아냐?”

“……끌끌.”

노인이 건네는 양귀비 주머니를 순식간에 잡아챘다.

이것으로 그와 볼일은 끝이다.

서문경은 이제 슬슬 취월루로 돌아가 봐야 한다는 듯, 턱짓했다.

“다음에 보자고.”

“어디서?”

“내가 따로 숙소를 잡을 테니까, 알아서 찾아와. 그럴 능력도 없으면 팔지 말고.”

“오냐.”

노인이 피식 웃으며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무공만 뛰어나지 그냥 망나니에 불과했구나, 하고 안심했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양귀비에 중독시켜서 마교의 종복으로 만들겠다는 속셈도 깔려 있으리라.

서문경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허공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다 들었으면 슬슬 나오시오.”

휘륵, 탁.

옆 건물에서 떨어진 거지가 인상을 찡그렸다.

“보고 있는 걸 알면서 그랬단 말이냐?”

“그렇소.”

“대체 왜?”

“거지 선배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안 들키려면 이목을 끌어야 하지 않겠소. 뭐, 나 대신 쫓아갈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서문경의 말에 거지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못 들은 척하지 말고 얼른 쫓아가십쇼. 안 그러면 거지 선배를 양귀비쟁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 말에 거지는 '씨X'이라고 중얼거리곤 소매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냈다.

호북성 분타주의 인장.

이틀 뒤에 찾아가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쪽지였다.

“난 줬다! 이 개 같은, 싹수없는 망나니 놈아!”

“읽었수다.”

서문경이 빙긋 웃으며 쪽지를 찢으니, 거지가 욕을 주절거리곤 노인의 뒤를 쫓았다.

거리에 홀로 선 서문경은 취월루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틀 뒤면…… 너무 늦지.”

연준호와 주백경이 얼마를 처마시든 술값은 기녀가 내줄 것이다.

그렇다면 취월루에 굳이 되돌아갈 이유가 없다.

서문경의 발걸음이 동정호와 가까운 전각으로 향했다.

‘호북성의 분타주, 개방에서 방주 다음으로 중요한 자리.’

방주야 어디든 가면 눈에 띄지만, 분타주는 안 보이는 자리에서 개방의 결속을 유지하는 중요한 자리다.

특히 호북성의 분타주는 무림의 중심에서 개방을 조율한다.

개방주처럼 고강하지 않으니, 노출되는 순간 사파 고수의 협공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지가 있지 않을 만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둥지를 틀기 마련인데.

‘정의맹에 합류하였을 때 들었었지.’

동정호와 가장 가까운 전각.

호북성 무한에서 제일 비싸고 호화로운 건물.

그 최상층에 분타주가 머물고 있을 터였다.

서문경은 그곳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천무학관의 정문을 지나치고, 범상치 않은 무인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호화로운 전각의 정문에 도착하니.

“멈추어라!”

“누굴 찾아왔느냐!”

갑주를 입은 두 무림인이 서문경의 발목을 잡았다.

가당찮은 짓이다.

서문경이 보기에 그들이 걸친 갑주는 서문세가에서 폐품으로 취급할 쓰레기였다.

“비켜.”

“감히……!”

“나 서문경이다. 네가 입은 갑주, 대명의 율법에 어긋나는 건 아느냐?”

“……어, 음.”

“다섯만 세겠다.”

하나, 둘, 셋.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주니 두 무림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를 비켰다.

서문경은 그를 스쳐 지나가며 피식 웃었다.

“내가 지금 소가주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라.”

“가, 감사합니다!”

무림인의 인사를 받으며 전각으로 입장하니 무수히 많은 계단이 보였다.

언제 저걸 하나하나 올라가나.

잠시 고민하던 차에 화려한 치장을 걸친 여자가 다소곳이 걸어왔다.

“어느 분을 찾아오셨는지요?”

“최상층.”

“……그분께선 부재중이세요.”

“아닐걸. 항상 바빠서 못 나가고, 나갈 수 있어도 안 나갈 텐데.”

서문경의 말에 여자가 슬며시 웃었다.

연기가 제법 자연스럽다.

여러 훈련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개방도처럼 보이진 않네.’

이마저도 호북성 분타주가 꾸민 위장 중 하나이리라.

찰나의 침묵이 지난 후에 여자가 뒷말을 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기별을 드린 후에…….”

“그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겠지. 표정이 왜 그래,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그 말대로, 여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로지 분타주와 방주,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어찌 아느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서문경은 여자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올라간다. 헛짓하면 불 지를 거야.”

“……함께 가시지요.”

여자가 선심을 쓴다는 듯 말했지만, 서문경은 그 의도마저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없으면 대피하라는 신호니까.’

이것까지 말하면 ‘서문세가’라서 안 게 아니라, 개방주가 딴생각을 품었다고 오해할 터.

패를 적당히 숨기기로 했다. 서문경의 눈이 길게 늘어진 벽에 걸린 그림과 시를 보았다.

“이건 누구의 심미안이지?”

“저예요.”

“잘 배웠군. 일단 시성과 시선이 걸려 있으면 품위가 넘쳐 보이거든.”

개방의 건물처럼 보이지 않게끔.

서문경은 실룩 웃으며 진의를 적당히 생략했다.

못 알아들을 여자가 아닌지라, 그녀의 호흡이 순간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단타를 쏟아 냈다.

“내가 어리다고 무시할지도 몰라. 그때 내 편 좀 들어줄 수 있겠나?”

“……저는.”

“중요한 일이야. 무림의 존속이 달린 문제라고.”

“양귀비 주머니를 드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그 말에 서문경은 크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노인에게 받은 양귀비를 그대로 들고 와 버렸다.

“이러니까 정문의 무림인이 나를 막았구먼.”

“전각에 양귀비 냄새가 나면 큰일이니까요. 아무리 서문세가의 공자님이라고 하여도, 저희가 피해를 본답니다.”

개방이 소유한 건물인 걸 들킬지도 모르니까.

서문경은 여자가 왜 조급하게 나타났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민폐를 부린 거였구먼.’

할 말이 없어서 궁벽해졌다.

뒷머리를 벅벅 긁은 서문경이 눈웃음 지었다.

“미안하게 되었소. 일이 급해서 그만.”

“주머니는 저한테 맡기고 가세요. 분타주님께서 노여워하실 거예요.”

“못 줘. 추종향을 묻힐지도 모르잖아.”

“……예리하시네요.”

그렇게 대답하는 여자의 얼굴에 교묘한 미소가 있었다.

서문경은 이곳이 호북성 무한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게 무림이지.’

말 한마디에 숨겨진 장도, 사소한 행동에 담긴 의도.

지금까진 너무 순수한 사람만 만났다.

검치는 괜한 허례가 없는 고수였고 연준호는 나이가 너무 어렸으니까.

척안룡이야…… 정신이 나가긴 했지만, 말이 음험한 놈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여자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 안에 계세요.”

여자의 말에 서문경은 제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최상층에 도착해, 개방의 이인자를 만날 순간이 다가왔다.

“문이 크구먼.”

“단단하기까지 하지요.”

여자는 빙긋 웃으며 철문에 손을 대었다.

두드리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저것까지 분타주와의 신호인가 싶어서 침묵하니,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거북이가 떠오르는 중후함이라.

끼이이……!

철문이 열리며 끔찍한 쇳소리가 귀를 울렸다.

일부러 녹슬게 둔 것을 보니 취미가 참으로 고약한 작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나갈 수 있어도 안 나간다? 나를 무슨 겁쟁이로 보았느냐?”

하관이 수염으로 덥수룩한 거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일주일 전에 마주친 적이 있었다.

서문경의 눈가가 좁아졌다.

“직접 발로 뛰기도 하시는군요, 선배.”

“전례 없이 무림에 흙발로 들어온 공자님이라면 내가 직접 볼 만하지. 내가 호북성의 분타주인 불휴개다.”

취월루 옆 골목에서 마주쳤던 거지.

호북성 분타주, 불휴개(不休丐) 양회광(洋晦光)이 짓궂게 웃었다.

“자, 그럼 내가 이틀 뒤에 만나자는 걸 무시한 이유나 들어 볼까? 미리 말하는데, 되먹지 못한 이유라면…….”

“마교의 끄나풀이 호북성에 있소. 그놈이 양귀비를 팔아서 거금을 축적하고 있지. 선배가 숨통을 틀어막는 동안 내가 유일한 거래자로서 신뢰를 얻겠소.”

“……!”

난데없이 던진 말에 양회광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서문경에겐 믿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내가 사천에서 마인과 싸웠던 것은 알 거요. 그 후에 본가가 그들의 뒤를 쫓았지요.”

“그래서?”

“개방도가 보는 앞에서 양귀비쟁이와 접촉한 게 이상하지 않았소? 국법이 지엄한 걸 아는 놈이……?”

그 말에 양회광은 침음을 흘렸다.

여기까지 들으니 서문경이 왜 약속을 무시하고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양귀비쟁이 같은 마교의 간자가 개방에도 있다?”

“이틀 뒤에 왔다면 누가 내 뒤를 쫓았겠지. 본제는 오늘 하려고 왔소.”

“본제 이전에, 아까부터 왜 말이 짧냐?”

양회광이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서문경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관무불가침. 무림에서 흔하게 하는 말 아니오? 뭐, 존댓말을 듣고 싶다면 그렇게 해 드리리다.”

“쯧, 됐다!”

가볍게 혀를 찬 양회광은 서문경이 원하는 바를 곧바로 짚어 냈다.

“앞으로 그 양귀비쟁이를 감시하고 동향을 알려 주마. 남의 손 말고, 직접 전서구를 보내든가 해서.”

“개방 안에 있는 놈도 찾아내는 게 좋을 거요.”

“……어떤 썩을 놈인지!”

화를 버럭 낸 양회광이 묘한 눈으로 서문경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네 녀석 말이다.”

“뭐요.”

“소가주에서 스스로 내려왔다더니, 무림에 흙발로 온 게 마교를 막기 위해서라고?”

그 말에 서문경은 팔짱을 낀 채 히죽 웃었다.

“명색이 개방의 분타주인데, 직접 알아보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클클.”

교묘한 웃음소릴 흘린 양회광이 손을 내저었다.

“할 말 끝났으면 가라!”

“선물이나 하나 주시오. 이런 전각에 왔는데 빈손으로 나오면 의심할 놈이 있을 테니까.”

“꺼져!”

“함께 온 소저께 받겠소.”

서문경이 두 손을 가볍게 모아 올리곤 철문 밖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 줄곧 침묵하고 있던 화려한 치장의 개방도도 자리를 떴다.

최상층에 홀로 남은 양회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뜩이나 바쁜데 서문세가에서 용이 나타났구먼.”

둔걸을 천무학관에 억지로 가게 만들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러다 문득 마교의 실체를 끌어낼 방도를 떠올렸다.

“양귀비부터 틀어막으면 주둥이를 뻐끔거릴 때가 오겠지. 그때, 목줄을 틀어쥐면 되는 거야.”

양회광이 음흉하게 웃었다.

* * *

열흘 뒤.

연준호가 서문경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체 시험은 언제 치러 갈 거야? 난 사흘 전에 끝냈다고.”

“마지막에 합격해야 인상에 남지.”

서문경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일.

천무학관의 입관 시험을 치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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