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야성 (3)
“사람이 무슨 쥐 떼보다 많군요.”
주백경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호북성 무한.
드넓은 동정호만큼이나 수많은 인파가 넘실거렸다.
의창에서 출발하여 아흐레(9일)인가.
그동안 연준호에게 무한이 얼마나 큰 성도인지 들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압도될 지경이었다.
“저 중에 절반이 무림인이라고 생각하니…….”
“아니, 그러진 않을 거야.”
서문경은 주백경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무림인이 많다곤 해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보단 적어. 무한에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은 장사치거나 사공, 표사일 걸.”
“얼추 정확하네.”
연준호가 얇은 손가락으로 동정호 주위를 가리켰다.
“옛말에 죽기 전에 동정호에서 뱃놀이하고, 장가계를 올라보라는 말 때문에 놀러 오는 사람이 많거든. 땅길, 물길이 뻥 뚫려 있어서 표국이 자리하기도 쉽고.”
“오…….”
주백경이 워낙 촌놈처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통에 어딜 가기가 민망했다.
하지만 서문경도 연준호에게 많은 걸 의지하긴 했다.
‘현 강호의 구도를 아예 모르니까…….’
아무래도 전생에선 폐관 중이기도 했고, 무림에 대한 일은 의도적으로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옥화혈사를 떠올린 게 기이할 정도였다.
‘듣고 보니 옥화혈사가 얼마나 위험했던 일인지 알게 되었고 말이지.’
공동파와 청성파, 그리고 곤륜파.
세 도문이 맺은 동맹이 워낙 견고하여 강서무림의 결속력이 무림 역사상 최고라고 하였다.
특히 북적과 사교를 막는 걸 도왔는데, 이게 전생에선 옥화혈사로 인해 무너진 것 같았다.
그 확신이 들기까지 대화하다가 시간이 조금 지체되긴 했다.
“쉬는 게 이틀이고, 여기까지 오는데 아흐레니까…… 입관 시험이 끝나기까지 보름 넘게 남았네?”
연준호가 슬그머니 눈치를 줬다.
원래는 이십 일 동안 놀 수 있었는데, 천천히 걷느라 십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원망이 담긴 시선.
여기까지 오면서 너무 친해진 모양이다.
서문경은 억지로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그래도 줄 안 서고 금방 들어왔잖아?”
“서문세가가 강성하긴 하더라. 예전에 나도 줄을 서고 들어왔었는데 말이야.”
의창보단 무한의 문지기가 더욱 군율이 엄격하긴 하나, 결국 대명의 녹봉을 먹고 사는 처지.
군문의 정점인 서문세가의 일공자를 두고 줄이나 똑바로 서란 일갈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주백경은 그에게 깊게 공감하고 있었다.
“공자님께서 워낙 마음이 급하시고…….”
“주 무사도 편하게 들어왔잖아?”
“크흠.”
“평소였으면 그러지 마셔야 한다고 했을 사람이 침묵했으면 공범이지.”
“……흠, 흠.”
주백경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하니, 서문경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빼물었다.
“그래. 나만 나쁜 놈이지. 나만 죽일 놈이고.”
“아닙니다!”
“아니긴 해.”
“…….”
자연스럽게 침묵하는 주백경을 보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서문경은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지금은 한낮이라 보이진 않지만, 밤이 되면 환하게 빛날 골목이 보였다.
“연 도사, 준비됐나?”
“물론이지. 천무신동.”
서문경과 연준호가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뭔 짓인가 했지만, 어려서 가능한 헛지랄 아니겠나.
그렇게 어려진 인생을 즐기고 있는데 주백경의 표정이 영 아니었다.
“왜 그리 죽상이야?”
“누가 들으면 저는 빼놓고 가시는 줄 알겠습니다.”
“아…… 애들끼리 놀겠다는데 어른이 끼네.”
“제가 끼지 않으면 가주님께 혼납니다…….”
주백경은 침울한 표정으로 서문경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본가에서 출발할 때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여기에 동년배인 연준호가 끼니까 세 배가 힘들었다.
“이래서 육아가 어렵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애야?”
“아닙니다…….”
심지어 서문경은 상전이지 않나?
물론 무공도 가르쳐 주고 좋은 것도 먹여 주고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주백경은 앞서 걸어가는 서문경을 뒤따라갔다.
“어디로 가십니까?”
“일단 이 근처 객잔에 묵고, 해가 지면 나와야지.”
이제 겨우 열네 살이면서 술을 즐길 생각이 가득해 보인다.
하물며 서문경 옆에 있는 동년배 도사는 또 뭘까?
대단하긴 대단하다.
두 소년 모두 제 나이답지 않은 경지와 재능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래서 더욱 밉상일 때가 있었다.
“그동안 우리 주 무사 수련이 어디까지 됐나 볼까?”
“……아.”
보통은 반대이지 않나?
서문경에게 정강이를 얻어맞을 생각에 벌써 몸이 으슬으슬했다.
주백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여독이 남아 있어서…….”
“천천히 걸어왔잖아.”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서…….”
“온종일 동공을 행할 수 있는 무인의 발에 물집이라고? 확인해 볼까?”
“……후우.”
주백경의 입에서 탄식과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오늘은 멀쩡히 걷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침울해지는데, 옆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크흡, 흠.”
열흘여 전부터 일행으로 합류한 연준호.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주백경의 시선을 피했다.
“……재능이 없는 게 죄인가.”
주백경이 저도 모르게 한 말에 서문경이 곧바로 대답했다.
“죄는 아니지만, 넘어서야지.”
“노력하겠습니다.”
주백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난 시간 동안 수행한 천주심경의 높이가 어느덧 허벅지.
검기상인에 머물러 있던 무학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지만, 서문경을 따라잡기엔 너무 멀었다.
* * *
그날 밤, 취영루.
“그때 사숙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연준호가 말을 한마디씩 할 때마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났다.
용모가 준수한 소년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좋은 걸까?
기녀들은 연준호가 밥만 처먹어도 웃고, 뭘 마시면 잘 마신다고 난리였다.
‘역시 관상이 틀리질 않아.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역시, 기생오라비 같아.’
서문경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속이 뒤틀렸다.
안주를 팔기보단 어린 동생을 대하는 듯한 접객이었으나, 어린 건 자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괜히 심술이 나서 술에 잔뜩 곯아 버린 주백경의 옆구리를 찔렀다.
“주 무사.”
“……으음.”
“호위가 술이 이렇게 약하면 어떡해? 보통 말술로 뽑지 않나?”
이런 술 쓰레기가 다 있나.
몇 번을 찔러도 주백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말쑥하게 생겨 놓고는 기녀와 대화 한 번 제대로 잇지 못하고 쩔쩔매는 꼴이 퍽 괴로워 보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을 두고 그냥 술에 푹 젖어 버리면 어떡한단 말인가?
기가 막혀서 그를 가만히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연준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계속 수줍어하시더니 기절해 버리셨네요.”
“호호…….”
“히히…….”
정작 공짜로 처먹는 연준호가 온갖 향락을 다 취하고 있으니.
기녀들은 연준호가 풍기는 명문 도가의 격조와 순수한 심성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이러다가 돈만 내는 거 아냐?’
서문이현에게 부탁해서 퍼뜨린 소문.
자신이 술과 여자를 즐기는 망나니란 것을 공고히 하려고 오긴 했지만, 이대로 돈만 퍼 주는 것도 아니꼬운 일이다.
서문경은 기가 차서 허허 웃고 말았다.
“나랑은 안 놀아 줄 거야?”
“하지만 공자님은 자기 이야기만 쭉 하시는걸요…….”
“맞아, 맞아…… 자꾸 누나들을 놀리려고 하시고…….”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면서 배려가 없단다.
서문경은 입술을 삐죽였다.
전생에 여자와 연이 없었듯, 이번 생에도 똑같이 흘러갈 것 같았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연 도사.”
“응? 왜 불렀나?”
“생각해 보니 다른 후기지수들은 별호가 있었잖아, 넌 뭐 없어?”
“있지. 매화옥검(梅花玉劍)이라고.”
“……잘생겼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야.”
막상 듣고 나니 더 재수 없어지는 것은 착각일까?
서문경은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탁자를 엎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사 주는 걸 취소하기엔 도량이 너무 좁아 보인다.
‘저 새끼, 진짜 아무리 봐도 도사가 아닌데.’
연준호보다 몇 배는 더 살았을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었을까?
부들부들 떨다가 물 잔을 노려보는 찰나.
어디선가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서문경은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고 기감으로 시선의 위치를 가늠했다.
‘옳거니.’
적어도 오늘은 술값을 날리지 않는 날이 되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문경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척하며 취월루 밖으로 나갔다.
“하하…….”
“주인 나오라고 해!”
“우우욱!”
여러 소음이 귀를 어지럽혔다.
거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어 어깨를 부딪치는 둥 사소한 시비가 붙기도 했다.
서문경은 그 사이에서 오롯이 명정했다.
취월루 안에서 느낀 기감에 의지하고서 걸었다.
저벅, 저벅.
술에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
어설픈 걸음으로 한 골목으로 향했다.
가게와 멀지 않았다.
“한 푼만 줍쇼……. 한 푼만 줍쇼…….”
수염이 덥수룩해 얼굴의 하관이 안 보이는 거지가 두 손을 내밀며 동냥해 왔다.
허리띠의 매듭은 보이지 않는다.
빼빼 마른 손가락은 연준호와 비슷할 정도.
서문경은 동공이 풀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서 히죽 웃었다.
“안녕?”
“안녕하십니까요…….”
“이야기 좀 할까?”
그 말을 하며 서문경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거지의 멱살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동작이 유려하게 이어졌다.
동공이 풀린 듯했던 눈동자는 어느새 곧아져 있으니.
거지가 몸을 강하게 뒤틀었다.
찌지직……!
멱살을 붙잡았던 옷깃이 완전히 찢어졌다.
거지의 동작에 취팔선보의 교묘함이 있었다.
그렇게 서문경과 거지의 거리가 조금 멀어졌다.
세 걸음 사이의 대치.
거지가 황색의 기운을 수양명대장경에 담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대충, 능력껏.”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거지에게 손가락질했다.
“애초에 날 감시할 걸 알았는데, 주변 경계만 잘하면 그만이지.”
“그 경계가 쉬우면 개방이 구파와 동렬에 있지 않았겠지.”
경악스러울 정도로 날카롭게 정련된 기감이다.
거지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서문경을 흘겨보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이냐?”
“군문의 일공자가 천무학관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모르겠고, 실력은 제법 있고, 연준호와 친분이 생겼고. 뭐 하는 새낀지 궁금했을 거 아니야.”
서문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면 어디서 훔쳐보는 짓 말고, 나중에 자리를 따로 잡아서 직접 만나는 게 어떻겠어? 괜히 서문세가랑 척지고 싶진 않잖아?”
“어린놈이 참으로…….”
“말에서 밀리면 흔하게 나오는 소린 거 알지?”
“……그놈 참, 말 한번 맵다. 알겠다. 분타주한테 전하마.”
거지가 고개를 끄덕이곤 골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로써 개방과의 접점을 만들었다.
서문경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다른 놈도 얼른 찾아와야 할 텐데.’
무한의 번화가, 불야성에서 만날 사람은 개방만이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다가 취월루로 돌아가니, 꼴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우…… 우리 공자님이 내주실 거요…….”
아직도 술이 덜 깨서 비틀거리는 주백경.
“이건 화산파의 도복이요. 함부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오.”
술값을 옷으로 대신하란 말에 정색하는 연준호.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서문경은 그저 허허 웃다가 가게 안쪽으로 걸어갔다.
“고, 공자님!”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가!”
주백경과 연준호가 마치 영웅과 마주한 듯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서문경이 자연스럽게 미소를 빼물었다.
“이게 나지.”
술도 제대로 못 먹고, 놀지도 못한 쩐주.
그 사실은 속으로 묻어 둔 채 전낭에서 은원보를 꺼냈다.
‘젠장.’
속이 쓰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