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야성 (2)
마당 안, 봄바람에 살랑이는 매화나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매화가 천천히, 그리고 자유롭게 낙하한다.
이리저리 낙하하는 매화잎 사이로 연준호가 걸어갔다.
그러다 툭, 하고 매화잎 하나가 연준호의 뺨을 두드렸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가 매화의 연분홍색으로 물드는 듯했다.
‘저게 모두가 극찬한 천재의 격조인가.’
안정된 보신경에 담긴 정종의 견고한 흐름이라.
서문경은 연준호의 모든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깨어지지 않을 듯했다.
강대한 힘과 마주하여도 빗겨 흘러낼 기교가 땅바닥에 남아 있었다.
-발자국이 거의 남질 않았습니다.
주백경이 감탄하여 전음을 속삭였다.
본가에서 출발할 때였다면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터.
서문경은 괜스레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잘 보았다. 저 녀석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아.
-무엇을 말입니까?
-‘어떻게 해야 잘 걸을 수 있을지’. 그걸 좀 더 숙하게 파고든다면 걸으면서 매화잎 하나 찌그러뜨리지 않을 거야.
아직 열네 살임에도 자기가 추구하는 보법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것만으로 무인으로서 축복 받을 일이건만, 스스로 경지를 개척할 재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만인에게 열등감을 안겨 주고도 남을 천재.
‘아직은 미숙해 보이지만.’
천무학관에서 졸업하기까지 삼 년.
소년이 청년으로 장성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시작해도 될까?”
연준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볍게 내쉰 입김에 화산파 특유의 자색 기공이 내비치는 듯했다.
서문경은 마땅히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칼이 낙화하는 매화 사이에 내려앉았다.
연준호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에 연분홍색이 점점이 퍼졌다.
서문경이 익히 아는 기공이었다.
‘자하신공(紫霞神功).’
화산파 장문인이 직접 가르치는 제자만이 잇는 무맥이라고 들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사가 사문에서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인지라.
서문경은 기감을 넓혔다.
전조없이 닥칠 검무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휘르르…….
연준호가 왼발을 옆으로 내디디며 검을 느릿하게 휘둘렀다.
이름 높은 도문의 검무답게 허례가 넘쳤다.
매화검법의 편린이 조금씩 담겼을 뿐인 춤이었다.
하지만 서문경은 보았다.
‘가벼운 검식 하나하나에 담긴 격조, 허례 사이의 칼날.’
또, 낙화하는 매화와 뒤섞여지는 도사라.
아득하고 아득해지며, 점점이 피어나며, 칼날에 매화의 향기가 스민다.
끊이지 않는 화검의 연무(演舞)이자 연무(演武).
왜소하고 여윈 연준호의 존재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좋은 구경이다.”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연준호보다 고강한 고수를 수없이 보았음에도 그러했다.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날리는 매화의 향기.
그 아래에 휘둘러지는 칼날이 나비처럼 노니니.
아직 가다듬어지지 않은 매향지로의 편린이었다.
그의 검무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매화처럼, 진귀한 보석 파편처럼 비춰졌다.
이때 검무를 추던 연준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너의 연습을 지켜본 것은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었어.”
“뭐가 보였는데?”
“겉으로 보기엔 고서를 펴고 닫는 것뿐이었지만, 누군가와 싸우면서 하는 동작처럼 보였거든. 미련해 보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본질을 꿰뚫었단 말인가?
서문경은 속으로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너랑 비무하면서 그러면 어떤 기분이겠어?”
“무시당하는 것 같겠지. 짜증이 좀 날 수도 있고.”
“그거뿐?”
“응. 그 정도.”
연준호가 검무를 서서히 멈추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것을 본 주백경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배워 가려다 만 것이 많은 듯했다.
당연한 일이다. 군문과 화산파의 무학은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서문경은 주백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연준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막 놀라진 않네?”
“사숙이 말씀하시길, 천하에 기인이사가 많댔으니까. 너 같은 애도 있는 거겠지.”
“……네 사숙이 어떤 분인지 뵙고 싶네.”
“아마 놀라실 걸. 세상에 참 별종이 많다고.”
연준호가 눈웃음 지으며 엄지로 자기를 가리켰다.
“나도 사문에선 별종이란 소릴 듣거든. 나 혼자만 그런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너나 나 같은 사람이 많으면 무림인 평균 수명이 엄청 줄어들 거야.”
“그런가? 하하.”
실소를 터트린 연준호가 어깨를 가볍게 휘돌렸다.
느릿하게 검무를 춘 피로가 근육에 쌓인 듯했다.
그마저도 서문경에겐 신기하게 보였다.
“외공을 배우러 간다고 해 놓고 제법 잘 알고 있는데?”
“내 몸이 약해서 신경을 좀 써야 해.”
자신의 약점을 무덤덤하게 인지하고 해결하려는 자세 또한 만족스럽다.
천무학관에 입관할 다른 후기지수도 저러할까?
괜한 의구심이 들었다.
서문경은 연준호와 함께 다시 객잔으로 되돌아가서 물었다.
“후기지수끼리 연락이 닿는 편이지?”
“뭐, 그렇지.”
“이번에 입관하려는 후기지수 중에 괜찮은 애들 있을까?”
“네 눈에 찰 만큼?”
하나를 물으면 둘을 알아차린다.
서문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준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릿속에 담은 별호를 거론했다.
“곤륜의 운룡(雲龍), 아미의 검봉(劍鳳), 개방의 둔걸(鈍乞), 남궁세가의 고검(孤劍), 신창양가의 백련(百鍊).”
“꽤 많네?”
그 말에 연준호는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한 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또, 신성(新星)이라.”
“너를 포함해서 일곱 명?”
“뭐, 아마 이번 기수는 열 명 미만으로 잡힐 것 같네.”
“왜?”
“이번에 입관 시험을 통과한 신성이란 녀석 말이야. 천무학관 역사상 처음으로 무소속 입관자거든.”
연준호가 혐오스러운 것을 떠올린 듯 인상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후기지수 중에 사람 가리는 것들이 많아서, 근본 없는 애랑 같이 다니기가 싫다나? 그냥 사문에 있겠다는 애들도 좀 있거든.”
“……설마 나를 포함해서?”
서문경의 말에 연준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의도치 않게 말해 버렸네.”
“진짜? 난 아직 통과도 못했는데?”
“천무신동이라는 별호랑 마인에게 이겼다는 전공이 있잖아. 또, 그…… 안 좋은 소문도 한 몫 했지.”
차마 장본인 앞에서 말하기가 어렵다는 걸까.
저걸 보니 아직 어리다는 생각이 팍팍 든다.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안 좋은 소문을 직접 거론했다.
“뭐, 술과 여자를 즐기는 망나니이자 고서를 들고 싸울 만큼 미친놈이라고?”
“……그치.”
“지금 생각하면 좀 옳은 것 같지 않아?”
“……약간은?”
무한의 번화가에서 보름을 넘게 지내겠다는 소리나, 한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연습까지.
그걸 다 듣고도 소문으로 치부하는 연준호의 깡도 대단했지만, 역시.
서문경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그 신성이라는 애. 대단하대?”
“대단하겠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공 없이 자기 스스로 무공 체계를 만들어서 합격했다는데. 지금은 천무신성(天武新星)으로 불린대.”
“나랑 뭐 별호가 비슷하네?”
“……신동이랑 신성이라. 음, 그렇네.”
서문경과 연준호가 서로를 보며 웃어넘겼다.
이 대화에 끼지 못하는 주백경만 홀로 물을 마시다가, 한 가지를 불쑥 물었다.
“신성은 공자님께서 가까이 지내실 것 같은데, 다른 후기지수는 어떻습니까? 호위로서 묻는 겁니다.”
“아. 그 친구들이요.”
그 말에 연준호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어떻게 말해야 직관적일까.
혼잣말을 몇 번 중얼거리다 두 명의 이름을 거론했다.
“개방의 둔걸과 남궁세가의 고검은 얼굴을 보기가 어려울 거예요. 자기 사문에서 억지로 쫓겨 나온 처지기도 하고, 사람을 사귀는 걸 어려워하거든요.”
“너보다?”
서문경의 물음에 연준호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둘에 비하면 나는 재담꾼이지. 반드시 출석할 자리가 아니면 나오지도 않을 걸.”
“그 정돈가…… 그래도 다섯 명이면 외우기 쉽겠네.”
“아, 그리고 내가 아는 걸 좀 더 말하자면.”
연준호가 머릿속의 정보를 끄집어냈다.
“백련은 수련을, 운룡은 멋을 부리는 걸 좋아해. 검봉은 가까이 다가가기 좀 어려운 성격이야. 나는…… 뭐, 보는 대로?”
“재담꾼이고 별종이다?”
“그거지!”
연준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한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언제 출발할 거야?”
“이틀 뒤에. 그때 같이 가자.”
서문경은 갑자기 생긴 동행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문득 천무신성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사문 없이 스스로 무학 체계를 만들어? 전생에서도 못 들어 본 것 같은데…… 만나 보고 싶네.’
천무학관에 입관하게 되면 만나게 되겠지.
서문경은 물을 마시고는 객실로 돌아가 편하게 누웠다.
* * *
‘천무학관으로 간다는 거…… 맞겠지?’
일찍이 검치에게 서문경의 행선지를 물었던 성하민.
그녀는 호북성 무한에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급급했다.
“하민아! 빨리 그릇 닦아라!”
“예에……!”
“손님 떠났다! 상 빨리 치워라!”
“하지만 아직 설거지가…….”
“아, 답답해! 그리 느려 터져서야!”
숙식을 제공하는 대신 일을 시키겠다던 중년인.
정말 감사하긴 했지만, 손님이 많은 주간에는 마인보다 독하게 굴었다.
무슨 사람을 강시로 생각하고 부려먹었다.
‘그래도…… 응. 다른 사람보단 낫지.’
그냥 일만 시키고 내팽개치려는 사람도 있었고, 험한 곳으로 밀어 넣으려던 악인도 있었다.
그에 비해 중년인은 그냥 일을 시키는 게 많았을 뿐이었다.
“하민아!”
“예! 금방 가요오!”
일주일 동안 이런 생활을 거치니 나름대로 일 머리가 생겼다.
스윽, 싸악!
하나하나 치우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그릇으로 탑을 쌓아서 가져가면 되는 것이다!
‘나 이제 제법 잘하는 걸지도.’
칭찬해, 아주 칭찬해.
성하민은 씨익 웃으며 여태껏 모아 둔 돈을 속으로 셈했다.
‘철검 하나 사서 가면 무시당하진 않겠지.’
서문경을 만나러 가는데 나뭇가지를 들고 갈 순 없지 않나.
……그런데 진짜 오는 거 맞을까?
불현듯 치솟은 불안감에 정신이 빠졌다.
그릇의 탑이 아래서부터 흔들렸다.
“어, 어어……!”
이대로라면 그릇이 와장창, 모아 둔 돈도 와장창, 욕도 와장창…….
정신이 아득해졌다.
성하민은 눈을 끔뻑이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시간이 점점이 느리게 흘렀다.
세상이 느려진 게 아니라, 심상 세계를 개진한 까닭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하지.’
그사이에 성하민은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 해야 그릇을 깨트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했다.
떠올린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내력의 실로 그릇을 이어 버리면 되는 거였어!’
성하민은 곧바로 하단전의 공력을 운용했다.
정말 쥐꼬리 밖에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스스슥…….
수십 개의 그릇 밑바닥을 관통하는 내력의 실.
맨 위까지 잇고 나서 오른손으로 잡아당기니 그릇의 탑이 팽팽하게 유지되었다.
“칭찬해. 역시 나야.”
이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뿌듯하게 웃은 성하민이었지만, 한 가지를 크게 실수한 걸 알지 못했다.
“그릇에 구멍 뚫은 놈 누구야!”
중년인이 낸 역정에 성하민은 뒷짐을 지며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몰라.’
애써 회피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중년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너니?”
“그럴 리가요! 저는 전혀……!”
“너구나.”
“……흐으.”
성하민은 중년인의 욕설을 한 시진 동안 들어야 했다.
그녀가 바로 천무학관 역사상 첫 무소속 입관자.
천무신성 성하민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