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26화 (24/250)

불야성 (1)

-준호가 살아 있었다면 화산파는 달라졌을 거요. 관존.

약관이 되기 전에 매화검법에 매향의 검형을 일으켜, 매향지로를 개척했다던 화산파의 신진 고수 연준호(演俊豪).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도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천무학관에서 무사히 졸업만 했다면 삼존이 아니라 사존(四尊)이 되었을 거라고.

어쩌면 장삼봉처럼 절세고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모두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화산파와 척지고 있던 종남파조차도 연준호의 부재를 애석하게 여겼다.

‘……그 연준호가 쟤라고?’

서문경은 다시 한번 연준호의 위아래를 훑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여윈 몸에 가까스로 걸쳐진 도복.

거기다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도사가 아니라 어디 아픈 애처럼 보일 지경이다.

자신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연준호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십니까?”

“음…… 솔직히 말해도 되나?”

“예.”

서문경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종아리를 차면 부러질 것 같고, 검을 똑바로 쥐어도 흘러내릴 것 같아. 밥부터 먹이고 싶고 그러네.”

“……하하, 하하하하!”

그 말에 연준호가 대소했다.

크게 웃다 못해 파안대소하며 배를 붙잡았다.

“역시 군문의 공자셔서 그런가, 솔직하십니다. 보통은 막역해지고 나서야 그런 말을 하거든요.”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다른 동문도 자꾸 뭘 먹이고 그랬으니까요. 잘되진 않았지만.”

“먹어도 살이 안 찐다? 누가 들으면 부러워하겠는걸.”

그 말까지도 익히 들었다는 듯, 연준호가 고갤 끄덕였다.

“제가 무인이라서 문제지요. 외공을 수련하고 싶어도 살이 안 붙어서 근육을 단련할 수가 없으니.”

“천무학관에 가면 외공부터 배울 건가?”

“뭐…… 그곳이라면 부족한 점을 채워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연준호의 목소리에 묘한 기대감이 있었다.

천무학관.

각 문파에서 걸출한 후기지수를 보내어 서로 교분을 나누고 절차탁마하는 교육의 장.

워낙 입관 시험이 까다롭다 보니 한 기수마다 열 명 내외로 진행되곤 했다.

그렇게까지 들어가려는 이유가 바로 천무학관에 있는 무사부들이었다.

“올해는 소림의 고수 중 한 분이 천무학관으로 차출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이라면 체형을 교정하는 법을 알겠지요.”

“……과연.”

서문경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대명에 이르러 소림사와 거리가 멀어지긴 했지만, 그들이 가진 무공체계는 깊은 역사와 뛰어난 외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무공사전에 꽂혔다.

‘싸우는 도중에 무공사전을 흘낏거릴 방법도 알려 주지 않을까?’

솔직하게 말해서, 호북성 의창까지 오면서 꾸준히 연습했지만 잘되질 않았다.

손대중으로 원하는 책장까지 넘기는 촉각, 급박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시선의 분산.

그걸 완벽하게 해내기가 어려웠다.

요컨대 기교에 가까운 잡기(雜技)가 필요했다.

“혹시…….”

무사부 중에 잡기에 능한 사람이 있느냐.

그렇게 물어보려는 도중에 익숙한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분은 누굽니까?”

이제 막 씻고 내려온 듯, 깨끗한 얼굴의 주백경.

그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주연호를 쳐다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설정.”

‘존댓말 해 놓고 뒤늦게 형·동생처럼 굴겠다고?’

서문경의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연준호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지 않나.

주백경이 제발 눈치 빠르게 행동했으면 했지만, 역시.

“문경아, 친형을 두고 어딜 가느냐?”

기대를 감쪽같이 배신해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대사까지 구리다.

이에 연준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곤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서문세가에 일공자가 따로 있었던 겁니까?

예의가 어긋날까 싶어 전음으로 물어오는 연준호.

어린 나이에 전음이 능숙한 것이 퍽 신기했지만, 지금은 주백경의 행실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서문경은 허허 웃는 척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 무사.”

“……예?”

“얘 안다.”

“……그렇군요.”

한순간 적막이 가라앉았다.

뒤이어 얼굴이 시뻘게진 주백경이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서문경은 그를 향해 피식 웃었다.

“민망하지?”

“……이렇게 된 이상 제 소개를 먼저 해야겠지요.”

주백경은 연준호에게 두 손을 모아 올리며 정중히 인사했다.

“저는 서문세가의 무사이자 일공자님의 호위인 주백경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못난 모습을 보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반가워요. 저는 화산파의 삼대제자, 연준호라고 합니다.”

“도사분이셨군요.”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주백경의 표정이 밝아진다.

서문경이 보기엔 그저 딱할 뿐이었다.

낭인이 퍼트리는 것보다 도사끼리 쑥덕거리는 게 더 빠르니까.

아마 저 녀석이 사문으로 돌아가면 삼사일 안에 강북 무림 전부가 주백경을 알아볼 것이다.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연준호에게 언질을 남겼다.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니 같은 길을 향하는 동도(同道) 아닌가?”

“그렇지요.”

“서문세가의 무사는 보통 얼굴을 숨기기 마련이라, 연 소협께 양해를 좀 구하고 싶은데.”

“……아, 그렇습니까?”

그 말에 연준호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친분을 쌓을지언정 결국은 군문과 무림.

상황에 따라 반목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모습이었다.

‘훗날 마교가 나타나면 저런 생각이 깡그리 지워지겠지만.’

지금 말해 봐야 미친놈 소리밖에 더 듣겠나.

서문경은 연준호를 지나쳐 가며 말했다.

“밥이나 한 끼 하지.”

분위기가 어색해질 때면 역시 식사가 최고였다.

* * *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천무학관으로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다가 의외의 말을 들었다.

서문경은 귀를 쫑긋 세우곤 연준호를 흘낏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아까 대화로 군문과 무림으로 선을 그었다고 생각했거늘.

동행하자는 말에 호의가 얽혀 있었다.

연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빼물며 재차 말했다.

“예. 사숙이 말씀하시길, 사람을 사귀는 데 신분이나 위치는 상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숙인가.’

대체 저놈의 사숙은 무슨 별종인 건지.

저렇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데 성의 없이 대답하기가 그랬다.

서문경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네가 안 될 거야.”

“왜입니까?”

“입관 시험까지 이십구 일 정도 남았잖아? 그동안 호북성 무한의 번화가에 있을 거거든.”

“……!”

연준호의 미소에 실금이 갔다.

호북성 무한의 번화가, 쉽게 말해 불야성.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불타는 홍등과 청등.

술에 취한 남자의 고성과 비파음, 여자의 웃음소리가 떠도니.

도사가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물며 구파일방의 걸출한 후기지수라면 더더욱 멀리할 장소였다.

서문경의 짓궂은 미소가 짙어졌다.

“도사가 가기엔 너무 자극이 강하니까.”

“……공자의 나이도 열넷이지 않습니까?”

“나야 옆에 주 무사가 있으니까 안심이지!”

서문경은 호탕하게 웃으며 주백경의 등을 때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연준호가 갑자기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으니까요.”

“아니, 뭐?”

“예?”

서문경과 주백경이 동시에 기함했다.

도사가 무슨 술과 여자가 많은 곳으로 간단 말인가?

그것도 이제 열네 살일 녀석이?

서문경은 완전히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와, 완전…… 까졌네?”

“사숙께서 말씀하시길, 무림으로 가거든 여러 경험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 새끼, 사숙 거짓말 아니야?’

자기가 불리하다 싶으면 이름도 모르는 사숙을 꺼내서 말을 덧붙이는 게 이상하긴 했다.

그렇다고 사숙의 함자가 뭐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

‘찜찜하긴 한데, 거절하는 것보다 근처에 두고서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막말로 술을 잔뜩 먹여서 기절시키면 될 일 아닌가?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공자님!”

주백경이 깜짝 놀라서 외쳤지만, 이미 정한 뜻을 꺾을 순 없다.

다만 한 가지가 의심스러워서 물었다.

“그런데 연 소협, 돈은 많이 가지고 있나?”

“이십구 일 동안은 넉넉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하는데,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전생에서 여러 도사와 마주하면서 알게 된 경험이었다.

서문경은 연준호의 전낭을 흘낏 보았다.

“얼마나 가졌는지 봐도 되겠지?”

“깜짝 놀랄 겁니다! 괜히 욕심내지 마십시오!”

자신만만하게 자기 전낭을 건네기에 혹시나 했다.

하지만 전낭을 열자마자 서문경과 주백경은 탄식했다.

“오…….”

“아하…….”

기준이 틀려먹었다.

하루하루 벽곡단이나 처먹으며 마구간에서 자도 만족스러운 도사 기준의 이십구 일.

이깟 돈은 불야성에서 하루면 언제 돈이 있었냐는 듯 전낭이 휑해질 것이다.

그런데도 연준호는 자신만만하게 허리에 손이나 올리고 있으니.

‘이래서 도사 놈들이란…….’

자기네 도관을 짓는 건 돈을 퍼부으면서, 밥 처먹고 사는 건 청빈을 넘어서 극빈이다.

서문경은 짠하다는 눈으로 연준호를 보았다.

미래에 절세고수가 되든 말든 지금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연 소협.”

“하하, 이런 거금은 처음 보시겠지요?”

“이 정도론 불야성에서 하루도 못 놀아.”

“……거짓말!”

연준호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산이나 해안이나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을진대, 동정호가 옆에 있다고 하여 뭐가 다르단 말이오!”

“그 생각부터 틀려먹었다고 생각해.”

“……아무리 내가 세상을 모른다지만, 그만 놀리시오!”

그 말에 주백경이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공자님께선 지극히 정론을 말씀하였습니다. 소협께서 가지고 계신 돈으론 무리입니다.”

“그럴 수가!”

큰 충격을 받은 연준호가 탁자를 내리쳤다.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제법 신비로운 영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겨우 열네 살이었고, 세상 물정 모르는 도사였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우스워서 웃었다.

‘저게 화산파의 미래라고 불린 연준호란 말이지.’

천무학관에서 맺는 인연이 생각보다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계산적으로 따지는 게 아니라, 어쩌면 정말 친우로 삼아 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이 많아지려는 찰나에 연준호가 입술을 떼었다.

“……저기.”

“왜?”

“그…… 제가 나중에 갚을 터이니, 무한에 지내면서 쓸 돈 좀 도와주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동갑인데 아직 불편하게 말하고 있잖아? 친하지 않다는 소리지.”

“그, 그럼…….”

“편하게 지내자고. 친구끼리 도와줄 순 있으니까.”

“공자, 아니. 경아!”

크게 감동했다는 듯, 연준호가 서문경의 손을 맞잡았다.

“고맙다! 이 일은 잊지 않고 꼭……!”

“손 빼. 차갑다.”

“어, 그래.”

연준호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맞잡았던 손을 풀었다.

서문경으로선 당황스러웠다.

‘내가 군문인 걸 알면서 이렇게?’

관과 무림은 불가침하나 알력 싸움이 없는 게 아니었다.

진무신을 모시는 무당파라면 모를까, 화산파의 유력한 후기지수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내가 나중에 뭐로 갚으라고 할 줄 알고 이러냐?”

서문경이 물음에 연준호가 엷게 웃었다.

“말은 사납게 해도 큰 걸 바라진 않을 것 같아서.”

“……이놈 봐라?”

짐짓 화난 척 인상을 찡그리니 연준호도 웃음을 그쳤다.

대신에 자신을 달래겠다는 듯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밥도 잘 먹었는데 검무라도 보여 줄까?”

“검무?”

“응. 그거면 좀 탕감이 될 것 같으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사숙이 ‘금을 주고서라도 볼 검무’라고 하셨거든.”

‘이쯤 되면 언제까지 사숙을 우려먹나 궁금해질 정도네. 뭐, 그래도 흥미가 동하긴 해.’

지금은 어리숙하지만, 미래엔 매향지로를 개척한다는 도사 연준호.

그의 어린 시절 검무라면 봐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서문경은 젓가락을 탁자에 놓고서 마당을 턱짓했다.

“어디 한번 볼까?”

“좋지.”

연준호가 창백한 손에 입김을 호호 불며 마당으로 나갔다.

그의 손아귀에 어느새 목검이 쥐어져 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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