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일여 (5)
적마와 검치가 격전을 치르는 사이.
서문경은 주백경과 함께 오 층 높이의 객잔으로 향했다.
큰 객잔이라 그런지 접객하는 점소이의 몸가짐이 정갈하였다.
“얼마나 있다 가시겠습니까?”
“이틀. 큰 방 하나에 침소는 두 개로.”
그렇게 말하며 은원보에서 손톱만큼 떼 주니 점소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이, 이렇게 큰돈은…….”
“푹 쉴 테니까 기름지고 맛있는 걸로 네가 직접 올려.”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서문세가의 군병처럼 기합 있는 목소리로 답하고 사라졌다.
뒤이어 옆을 슬쩍 돌아보니 주백경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정말 이틀 쉬실 겁니까?”
“여독은 풀어야지. 호북성 천무학관에 거지꼴로 도착할 순 없잖아.”
“공자님이라면 정말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안 그래도 서문세가의 공자라서 첫인상이 나쁠 텐데 거지처럼 나타나면 더 꺼릴걸.”
천무학관은 무림의 후기지수가 모이는 요람이라고 하였다.
그곳에 군문인 서문세가가 입관 시험을 치르러 가니, 시선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본가에서 출발하기 전에 서문이현에게 부탁한 것도 있었으니.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듣든 나서지 마. 알겠지?”
“……하지만.”
“이건 명령이야.”
입술을 우물거리는 주백경에게 서문경은 엷은 미소를 보였다.
“괜히 무림의 권문세가나 구파일방 상대로 힘 빼지 말고, 수련에 전념하다가 내가 도와달라고 할 때 나서 줘.”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나중에 가주님한테 문책 당하면 그땐…….”
“알지, 알아. 내가 주 무사를 안 챙기겠어?”
“…….”
그 말에 주백경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왜 검치를 만나고 옥화산의 절벽을 올랐냐고 캐묻는 것 같았다.
‘혜광심어가 따로 없네.’
서문경은 멋쩍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때마침, 방을 확인하러 간 점소이가 쪼르르 내려왔다.
“따라오시지요!”
할 말이 뚝 떨어졌는데 참으로 다행이다.
서문경은 주백경을 잡아끌며 방으로 향했다.
끼익…….
열린 문 사이로 깔끔하게 정리 된 침소와 벽지, 가구가 보였다.
이 정도면 마음 편히 쉬다 갈 만하다.
“만족스러우십니까? 아니면 다른 방을…….”
혹여 마음이 바뀔까 싶어 노심초사하는 점소이.
그를 향해 서문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이만 가 보게.”
“옙! 음식은 금방 올리겠습니다!”
점소이가 아래층으로 쪼르르 내려가니, 서문경은 문을 쾅 닫고는 침소로 천천히 걸어가서 누웠다.
그 모습은 주백경도 마찬가지였다.
“으, 좋다.”
“안 씻냐?”
“조금, 조금만 있다가…….”
“그러다가 잠들겠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까지 오면서 편하게 자 본 적이 없잖습니까?”
그 말에 서문경이 씩 웃었다.
“하늘 같은 주군에게 따지는 거냐?”
“……아니요.”
대답하는 목소리에 강한 억양이 켜켜이 쌓여 있다.
왠지 더 놀리면 안 될 듯해, 서문경이 먼저 씻기로 하였다.
“요즘은 뭐 누가 상전인지 모르겠네. 쩝.”
“…….”
“농담이야!”
서문경은 손을 가볍게 내젓고는 욕실로 가서 쌓인 때와 먼지를 씻어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생각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과 부딪치겠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후기지수와 부딪치고.
언제 어디서 마교의 간자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주백경밖에 없다.
‘날 싫어할 사람으로 가득이네.’
서문세가의 도련님이 왜 천무학관에 입관했을까?
그 의문이 존재하는 한, 천무학관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을 테니까.
서문경은 냉정하게 자신의 무공 수위를 가늠했다.
‘의념과 심상을 다루는 솜씨는 초절정이나, 공력과 몸뚱이가 미진하여 제대로 다투기가 어려운 정도인가.’
척안룡을 기절시킨 건 어디까지나 심상 세계에서의 싸움이었고, 천주심경으로 전생의 심상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직접 마주 붙는다면 삼 초식 안에 죽는다.
그마저도 아주 잘 쳐준 거였다.
자존심까지 내려놓자면 일초반식 만에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놈과 싸우는 걸 전제로 한 게 잘못인가.’
전생에선 하수로 봤던 놈이건만.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자신의 한계를 가늠했다.
‘뭐, 후기지수는 물론이고 천무학관의 무사부와 붙어도 지지 않을 것 같은데.’
초절정고수가 어디 흔한가?
천무학관에 있는 무사부라고 해 봐야 벽을 뚫지 못한 절정고수가 대다수일 터.
‘기죽을 필요 없었네.’
자신감을 되찾은 서문경이 마지막으로 물을 몸에 끼얹고는 침소로 되돌아갔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고수들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호북성이면 무림의 중심이었지…… 그 사람들과 마주칠 수도 있으려나?’
무명신승.
한때 오걸의 위치에 있던 노도사, 진무신검(眞武神劍).
정의맹이 결성되던 때 무림을 대표한 초절정고수들.
그들과 일찍 만나서 가르침을 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 그 사람들 고개가 엄청 뻣뻣하겠지?’
무명신승은 마교가 환란을 저지르기 전엔 은자였고, 진무신검은 오걸에 속한 강자였다.
만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서문세가의 일공자와 얽히기도 싫어할 것이 뻔하다.
‘뭐 하러 무슨 오걸이니 천하십대고수 같은 걸 만들어서 무림인끼리 급을 나누는지.’
의념을 자기 마음대로 삼라만상에 휘두를 줄 아는 오걸.
그들과 다르게 아직 천하에 얽매여 있다고 하여, 천하십대고수.
그 외에는 명문의 장문인이나 명가의 가주, 장로 정도.
나머지는 서문경의 기준에서 고만고만했다.
‘눈은 높은데 나이가 어려져서 문제네.’
그래도 공소심 같은 일류 무인 정돈 손쉽게 이길 수 있다.
이 정도면 천무학관의 입관생 중 최강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하니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어린 애들 상대로 최강자가 무슨 소용이냐?’
몸이 어려지니 정신도 어려진 기분이다.
침소에서 일어난 서문경은 무공사전을 들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무공사전을 한 손으로 넘기는 연습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신기해서 그럽니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순박하기 그지없는 얼굴, 여윈 몸에 가까스로 걸쳐진 도복.
난생 처음 보는 놈이 격의 없이 다가왔다.
서문경은 인상 잔뜩 찡그리며 꺼지라고 노려보았다.
“거, 남 일에 신경 끄지?”
“마당에서 한 손으로 책장을 계속해서 넘기는 사람을 보면 호기심이 들 만하지요.”
“강호에서 호기심은 사치라고 배우지 않았나?”
“제 사숙이 말씀하시길, 호기심 없이 사는 건 꿈 없이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발 꺼지라고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 끈덕지게 들러붙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문경의 입술이 밉살맞게 비틀어졌다.
“꿈 없이 살아 볼래?”
“그게 무슨…….”
“괜한 호기심 품지 않게 해 준단 소리지.”
당장 권장법으로 다투어도 좋다.
서문경이 두 발을 어깨만큼 넓히자, 남자가 빙긋 웃었다.
“제가 졌습니다. 그래도 무례가 아닌 선에서 지켜보고 싶습니다.”
“아니, 뭐 이런 놈이.”
정강이를 차면 부러질 것 같은 놈이 강단은 이상하게 셌다.
서문경은 남자의 고집을 꺾는 것을 포기했다.
‘보다가 지치면 떠나겠지.’
……팔락, 팔락.
일다경 동안 서문경은 무공사전을 여닫는 데 집중했고, 사내는 그걸 묘한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어쩔 때는 오른손을.
목울대를 보고 호흡의 깊이를, 등 근육의 움직임을 보고 외공의 수준을.
한데 무공사전을 든 왼손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너 뭐야?”
연습을 멈춘 서문경이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주제에 자신을 훑는 시선이 날카롭고 예리하였다.
그가 검을 들었다면 곧바로 공격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 기색을 알아차린 사내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저 흥미가 있어서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밥이라도 한 끼 사지요.”
“밥은 됐어.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까.”
“역시! 명가의 자제셨군요!”
내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남자.
서문경은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그러는 넌 천무학관에 들어가려고 온 거냐?”
“어찌 아셨습니까?”
그 말에 남자가 몸을 웅크리며 경계심을 보였다.
서문경이 보기에 참 우스운 작태였다.
“쓸데없는 곳에 호기심을 가지는 걸 보니 뒷배는 있고, 도복을 걸치긴 했으니 도사일 거고, 눈이 예리한 것이 안법 공부를 했겠지.”
“…….”
“얌마. 나 못지않게 너도 특이해.”
“……옳은 말씀입니다.”
남자는 금세 수긍했다.
“그럼 서로 신분이나 내력을 밝히면서 먼저 맞추는 사람이 이기는 건 어떻습니까?”
“뭘 걸고?”
“음…… 글쎄요. 생각나는 것도 없고, 그냥 재미로 하지요?”
그 말에 서문경은 속으로 안심했다.
솔직히, 자신의 신분은 대충 몇 마디 듣다 보면 누구나 유추할 수 있었다.
천무신동.
서문세가의 일공자.
그것만으로 천무학관에 입관하려는 무인들이 전부 다 아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차피 난 들킬 거고, 얘가 누군지나 알아야겠다.’
서문경은 속내를 숨기고서 남자를 턱짓했다.
“네가 먼저 하자 했으니, 먼저 말해라.”
“저는 강북 무림에서 왔습니다.”
“종남이나 화산, 무당파인가?”
“그런 식으로 대답을 유도하시면 안 되지요.”
“쳇.”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 서문경이 미리 떠올린 말을 뱉었다.
“나는 특이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그게 뭡니까? 정확히 말씀하셔야지요.”
“말 그대로인데 뭐.”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서문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렇게 나온다면…… 저는 검사라고 하지요.”
“나도 검사야.”
“도문의 제자입니다.”
“주먹도 쓸 줄 알지. 검만큼은 아니지만.”
“사문의 삼대제자입니다.”
“별호를 가지고 있어.”
유치한 설왕설래 도중에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별호.
소년이 가지기에 너무 큰 유명세이지 않나.
“아차.”
서문경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지만, 남자의 표정은 기세등등했다.
“천무신동 서문경. 맞습니까?”
“……아닌데?”
“끝까지 이러지 맙시다.”
“끄응.”
서문경이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빙긋 웃었다.
내기에서 이긴 것이 기뻤는지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제가 이겼군요.”
“…….”
“천무학관에 들어간다는 말도 사실이었고요.”
“그거 말고 더 들은 건 없어?”
그 말에 사내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제가 풍문을 좋아하진 않는지라.”
‘들었구먼.’
본가에서 출발하기 전에 서문이현에게 한 부탁.
그것이 발보다 더 빠르게 호북성에 이루어진 듯했다.
서문경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내가 지긴 했는데, 어차피 너도 천무학관에 들어갈 거 아니냐? 동기인데 이름이나 듣자.”
“으음……. 그건 그렇지요.”
남자는 자기소개를 하기에 앞서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여러 번 헛기침했다.
서문경이 보기에 그에겐 신비로운 기색이 있었다.
‘무림에선 영성(靈性)이라고 부르던가?’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가진 후기지수임이 분명하다.
그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화산파의 삼대제자, 연준호라고 합니다.”
약관이 되기 전에 매화검법에서 매향을 일으켰다던 도사.
연준호와의 첫 조우였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