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일여 (3)
검명(劍鳴)이 스산하게 울었다.
장강에 짙게 깔린 안개가 순간 뒤로 떠밀리는 듯했다.
묵직하고도 경쾌한 경파.
칼을 뽑는 것만으로 서문경의 경지를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내력이 약한 수적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우윽…….”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만히 앉아서 검붉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지 않았나.
소년이 흘린 경파만으로 흑선채 전체에 경종이 울렸다.
저러한 짓은 생사현관을 돌파하여 삼단전의 균형을 이룬 절정고수만이 가능했다.
“고, 고명(高名)이 어떻게 되십니까?”
너무 어린 나이에 경지를 이루어 노화가 멈춘 고수이리라.
자기 멋대로 판단한 공소심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서문경은 들어 줄 생각조차 없었다.
“놀이가 끝났냐고 물었었지?”
“그것은…….”
“어디 흥겹게 놀아 보자.”
서문경은 무공사전을 바닥에 놓은 채 검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철판으로 덧댔다는 검은 선체.
재주가 뛰어나다고 한들 부술 수 없다고 이죽이던 목소리를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저런 놈들의 무공 따위, 수집할 필요도 없어.’
저 가소로운 오만함부터 부숴야겠다.
서문경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네 소꿉장난 이름이 흑선(黑船)채라고 들었는데, 내가 이름을 바꿔 주마.”
“큭! 돛을 펴라!”
“앞으로 파선(破船)으로 부르지.”
서문경은 오른발을 어깨만큼 뒤로 빼며 호흡을 깊게 당겼다.
생사현관을 이제 막 타통하여 목에서 아직도 피 냄새가 감돌았다.
하지만 자신 앞에서 온갖 수모를 감내한 주백경보다는 덜했다.
그러니까. 고통을 인내하고서.
중단전에 호흡을 응축했다.
번천광검결에서 유일하게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구결의 이름을 머릿속에 염했다.
‘천결. 그리고.’
어렴풋이 엮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초식을 손끝에서부터 펼친다.
다시 한번, 신공 절학인 금강심과 부동경의 힘을 빌리니.
서문경은 시퍼렇게 물든 눈으로 정면을 보았다.
검게 칠해진 뱃머리를 노려보며 숨을 훅 내뱉었다.
검을 뻗으면 닿을 거리를 남겨 두고서 주백경에게 말했다.
“주 무사, 힘들어도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아라. 너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초식이다.”
서문검법 이초, 일검적심.
철갑과 거궐혈을 꿰뚫는 찌르기에 천결을 접목하니.
“일검적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천경(穿經)이라 한다.”
열의와 분노.
두 감정을 한 호흡에 담는다.
천결의 검형(劍形)을 일검적심에 담도록 하여, 한 번의 찌르기로 끝나지 않았다.
쿠궁― 쿵!
날카롭게 정련한 검기가 선체를 깊게 찔렀다.
그 길이가 무려 십칠 척.
나룻배보다 긴 상흔이 선체 하단을 꿰뚫고, 철판은 종이 찢기듯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공소심의 미소가 짙어졌다.
“겨우 그거냐?”
이대로 밀어붙여 나룻배를 찌그러뜨린 다음, 수공(水功)으로 괴롭혀서 죽인다.
그거라면 절정고수라도 별수 없었다.
흑선채의 수적들도 승리를 예감하고서 히죽 웃었다.
서문경은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쩌저적……!
절정고수는 의념을 삼라만상에 덧씌워 유형화시킨다고 하였던가?
이변을 느낀 수적이 공소심에게 외쳤다.
“채주님!”
“왜?”
“배, 배가 뒤로 기울어집니다!”
“뭐라고?”
공소심이 서둘러 배 끝으로 달려갔다.
단 한 번의 찌르기.
그것으로 끝났을 터인데, 참혹한 광경이 그를 반겼다.
“이럴 수가……!”
쩌적, 쩍.
둥그렇게 꿰뚫린 상흔에서 하나둘씩 떨어지는 나무판자와 건량 자루.
공소심은 공포에 떨었다.
서문경이 펼친 것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경지에 있는지 알아 버렸다.
“자, 잠깐! 멈춰 주십시오! 보상하겠습니다!”
“무엇을 주든 말이야.”
서문경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삼단전의 균형을 맞추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귀는 뚫려 있었다.
그가 주백경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짧게 덧붙였다.
“내 호위를 건드리고 무사할 생각은 말아야지.”
점차 기울어지는 배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저대로 도망치게 둘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건드렸다면 걸맞은 상처를 남겨 두어야 무림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법이다.
‘죽일까?’
떠올린 순간 고개를 내저었다.
전생에서 척안룡이 왜 장강을 틀어막고 천마와 맞서 싸웠던가?
수로채를 죽인 값을 받아 내겠다고 그랬다.
그의 진짜 속내까진 모르지만, 적어도 자기가 말한 이유는 그러했다.
‘다락방에 있던 책장을 뒤졌다면 뭔가 알 수 있었을까.’
다음에 만난다면 그것으로 압박을 줘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흑선채를 모두 죽이면 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길이다.
서문경의 눈이 자연스레 가늘어졌다.
“주백경.”
“예, 공자님.”
“네가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벌을 내릴지 네가 정해라.”
그 말에 주백경은 무너지는 배에서 하나둘씩 뛰어내리는 수적 떼를 보았다.
통쾌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직접 저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켜야 할 서문경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아쉬움을 논했다.
“제가 혼자서 끝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됐고, 얼른.”
“……저는.”
주백경은 언제나 그렇듯, 바른 길을 논했다.
* * *
“그 정도에서 끝났으면 됐지.”
척안룡은 손톱을 정돈하며 입김을 후 불었다.
처음에는 흑선채가 침몰했다고 해서 걱정했지만, 공소심을 직접 보고 나니 긴장감이 확 풀리는 감이 있었다.
“무명지(無名指 : 넷째 손가락)의 힘줄로 목숨을 살렸으면 오히려 감사하다고 할 일이 아니냐?”
“…….”
“그것도 수적질 그만하고 농사나 시작하란 마음으로 그랬다며? 푸하하, 골 때리는 놈이구먼.”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습니다. 당장 뒤쫓아 가서…….”
“흑선채주야.”
공소심의 말을 중간에 끊은 척안룡이 안색을 굳혔다.
“네가 중경의 구역을 달라고 했을 때, 딴 놈들이 반대해도 밀어줬지?”
“……예.”
“안 주면 어디서 비명횡사할까봐 그랬다. 이번이 딱 그 처지가 될 뻔했고. 그놈도 내 얼굴을 봐서 적당히 그만둔 거야.”
“…….”
치욕을 느낀 공소심이 입술을 꽉 앙다물었다.
얼굴까지 시뻘게진 것을 보고, 척안룡은 혀를 쯧 찼다.
“속내를 감추는 건 또 못하잖냐. 공소심아, 어차피 네 무공엔 손색이 많았다. 무명지가 끊기긴 했지만 큰 흠은 안 돼.”
“참으라는 겁니까?”
“내가 그래도 총채주인데, 죽으라고 등이라도 떠밀어 주랴?”
그 말에 공소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척안룡에게 품은 서운함이 눈동자에서 뚝뚝 떨어졌다.
“두목이 나서면 되잖습니까!”
“그놈, 서문세가의 일공자다. 건드리면 관군이 수로채를 압박하겠지.”
“……허!”
공소심은 헛웃음을 빼물었다.
열등감과 울분이 턱 끝까지 치솟았다.
“그 어린 나이에 의념을 체현(體現)하는 경지인 데다, 서문세가의 도련님이라고요? 이게 무슨…… 말이 되는 겁니까?”
“살다 보면 별 개 같은 일이 있기 마련이지.”
척안룡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무신동 서문경.
처음 그놈을 마주했을 땐 가지고 놀기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내기에 져서 부하가 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피해 다녀야겠지?’
다락방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 거슬리기 짝이 없다.
어디서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재능만 있는 놈이 아니라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따라서 공소심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라앉은 배를 다시 건져 올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형제들이 괜찮은 걸 가져올 때까지 수련이나 해라.”
“……당분간 고향에서 쉬겠습니다.”
공소심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척안룡에게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척안룡은 생각했다.
‘저거 저러다가 헛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실의에 빠진 채주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여태까지 자주 봐서 알았다.
관군에게 수로채의 위치를 불고서 돈을 챙기거나.
혹은 사특한 무공을 배워서 되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거나.
‘저놈, 주제에 맞지 않는 야망을 가져서 예전부터 문제가 많았는데…….’
잠시 후.
척안룡은 공소심과 친하게 지내던 수적 하나를 불렀다.
“따라붙어.”
항상 장난스러운 표정에 살얼음이 맺혀 있었다.
* * *
장강을 넘어서고 맞이한 아침.
서문경은 창백한 얼굴로 주백경을 불렀다.
“내상에 좋은 약, 미리 봐뒀지?”
“예.”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주백경이 목함을 꺼냈다.
목함 끄트머리에 낀 종이에 상서로운 냄새가 배어 있다.
서문경은 영약의 기운을 확인하고는 입속에 털어 넣었다.
“후우…….”
길게 내쉬는 한숨에 지난밤의 급박함을 흘려보냈다.
척안룡과의 조우, 장강에서 마주친 흑선채.
어느 하나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무리를 해서 헤쳐 나갔다.
금강심과 부동경.
천주심경에 숨겨져 있던 요결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갑판이나 닦고 있을 터.
그 사실을 주백경도 잘 알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조금만 쉬었다 가자.”
서문경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사현관을 타통한 직후, 의념을 덧붙여서 펼친 초식.
천경을 펼친 여파가 천천히 삼단전을 짓누르고 있었다.
‘역시 천주를 실었던 게 탈인가.’
있는 힘껏 내지른 일검적심에 천주의 의념을 덧붙이니.
칼질보다 의념이 더 강력했다.
철판을 덧댄 배의 후미에 구멍을 뚫어 버릴 정도였다.
서문경은 숨을 깊게 고르며 말했다.
“언젠가 나처럼 펼칠 수 있을 거다.”
“……아, 아닙니다.”
“부러워하던 거 다 알아. 그러니까 혼자서 끝낼 수 있었다면, 하고 아쉬워했겠지.”
“그건 그렇지요.”
“솔직하게 인정하니까 얼마나 좋아?”
서문경과 주백경이 피식 웃었다.
작은 나룻배로 장강을 건너느라 옷이 흠뻑 젖었지만, 춥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약 이십 일 동안.
여러 사건과 고난을 헤치고 나니 이 정도쯤이야, 하고 넘기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도 어색하지 않았다.
서문경은 소주천을 마치고는 주백경에게 말했다.
“내가 수적놈들과 맞서면서 펼친 건 천주심경의 금강심, 부동경이라는 건데. 네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뭔지는 알려 주십시오.”
“삼단전을 천주로 조율하는 거지.”
“균형을 잃을지라도 한쪽을 강하게 만들거나, 합일을 꾀하는…… 뭐 그런 겁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네. 근데 그것만이 아니야.”
생사현관을 타통하여 삼단전의 균형을 맞췄다고 해서 금강심과 부동경의 구결이 무용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더욱 쓸모가 많아졌다.
이를 알려 주기 위해 서문경은 검지를 폈다.
“손가락 첫마디부터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고. 생사현관을 타통하면 마디 사이의 주름이 사라진다고 쳐.”
“예.”
“그렇게 되면 삼단전을 융통무애하게 쓸 수 있지. 검치가 그랬듯이 어떤 자세에서도 내공을 수발할 수 있는 거야.”
그 말에 주백경이 한 가지 궁금증을 말했다.
“공자님이 말씀한 대로라면 그…… 편법이긴 하지만 금강심과 부동경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삼단전을 천주로 조율하여 ‘일시적으로’ 절정고수처럼 행한다.
그 질문에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가능하지만, 요점은 그게 아니야.”
“……?”
“이미 삼단전 사이의 벽이 사라진 고수가 천주심경을 다룬다면?”
“……아!”
이제야 알겠다는 듯, 주백경이 탄성을 흘렸다.
“삼단전 전체를 감싸서 여러 가지를 꾀할 수 있겠군요.”
“그거지!”
서문경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천주로 감싼 삼단전에 공력을 마구잡이로 움직여서 공명(共鳴)시킨다거나.
내부에 침범한 경력을 천주로 막아 버릴 수도 있다.
일반적인 무림인이 불가능한 운용.
심지어 초절정고수조차 실현하지 못하는 가능성이 천주심경에 주어져 있었다.
‘대체 어떤 무인이 그걸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천마에게 대항할 무공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서문경이 흐뭇하게 웃으니 주백경도 껄껄 웃었다.
“천무학관에 가 봐야 공자님이 제일 강하지 않겠습니까?”
“어, 그러고 보니 아직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주백경의 얼굴에 불안한 감정이 도드라졌다.
서문경이 저렇게 시치미를 뗄 때면 무슨 일이 있곤 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천무학관에 마교가 숨어 있을 건데, 우리가 찾을 거야.”
“…….”
주백경은 대꾸하는 것조차 잊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