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일여 (2)
이류.
병기 십팔반을 알고 자신이 무엇을 잘 다루는지 안다.
일류.
무기에 몸이 휘둘리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체를 수발한다.
내공 또한 어슴푸레하게나마 병장기에 씌울 수 있으니, 이걸 검기라고 칭한다.
여기까지는 호사가나 무림인 모두 동의하는 기준이었다.
하지만 절정만은 사람마다 평가가 달랐다.
“생사현관을 돌파하여 삼단전의 내공 수발이 자유로운 사람이 절정고수지! 강기 모르나?”
“도검불침이야말로 기본 아닌가! 뭘 모르는 사람일세!”
이는 절정에 다다른 무인이 보기에 똑같은 말이었다.
내공과 외공의 차이일 뿐.
절정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일류와 절정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상단전의 심상 세계에서 빚어낸 최강의 형(形).
의념(意念)를 삼라만상에 덧씌워 유형화시키는 힘.
이것에 관해 초절정고수 중 한 명은 이렇게 덧붙였다.
“무공으로 이룬 소우주로 대우주의 섭리에 도전하는 자.”
절정과 초절정고수는 상승의 영역을 스스로 개진하였느냐에 따라 갈린다고 하였다.
그 빗장을 넘으면 끝없는 세계가 펼쳐지니.
“……하아.”
서문경은 그 세계에 발을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천마에게 패배한 관존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열네 살의 무인으로서.
콰르르――!
거대한 문이 열리니 자연히 정기신이 균형을 꾀했다.
비대해진 상단전이 줄어들 때마다 중, 하단전이 커지고 노폐물이 빠져나가는 과정.
아주 작은 충격으로도 깨져 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취약하다.
괜히 무림인이 산골짜기에서 생사현관의 타통을 꾀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서문경은 주백경을 신뢰했다.
‘내 호위니까.’
그 생각을 끝으로 짧지만 아주 긴 사색에 잠겼다.
* * *
“공자님!”
주백경은 두려운 눈으로 서문경의 안색을 살폈다.
운기조식을 취한 이후로 계속해서 몸을 부르르 떨거나 식은땀을 흘리고 입가에서 검붉은 핏물을 토했으니까.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 행장을 뒤졌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정기신의 균형을 두고 벌이는 투쟁.
그사이에 무슨 영약을 먹인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순청한 색이 더럽혀질 뿐이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혹여나 방해될까 싶어서 노질조차 멈추었다.
“부디 사셔야 합니다…… 제게 공자님은 가주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 어린 몸으로 자신의 목숨과 아이들까지 구해 낸 은인.
서문경은 앞으로 더욱더 장성할 무인이자 서문세가의 초절정고수가 될 남자였다.
여기서 허무하게 죽어선 안 됐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주백경이 서문경의 등에 손을 가져가던 그때.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조금씩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촤르륵――!
짙게 깔린 안개 사이로 드러나는 검은색 범선.
나룻배 따위와는 크기가 달랐다.
그대로 들이박기만 해도 장강에 빠져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주백경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만 멈춰라―! 네놈들은 누구냐―!”
“기멘 멤처라! 네넴드른 니기냐!”
“크하하하!”
“미친놈!”
왁자지껄한 비웃음이 돌아왔다.
주백경은 가슴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연히 입술을 우물거렸다.
여유를 잃고 두려움을 내색할 뻔하였다.
어린 주군이 평소에 행하듯.
뻔뻔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하찮은 장난이나 치자고 여기까지 기어 왔느냐?”
그 말에 검게 칠한 범선의 끄트머리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뺨부터 입술을 가로지르는 상처.
양 팔뚝의 오밀조밀한 근육에서 외공을 깊게 수련한 태가 났다.
최소한 일류.
주백경의 숨소리가 깊어지는 가운데, 사내가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여기가 어디라고 뱃놀이까지 나왔느냐?”
“장강이 네 소유더냐?”
“네놈이 할 말은 아니지? 어디 감히 우리 외눈깔 두목님의 배를 훔쳐 놓고는?”
“뭐?”
그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주백경이 잠시 주춤하자 사내의 웃음이 짙어졌다.
“하긴, 밤이라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겠다만. 나룻배 선미에 명패가 박혀 있거든.”
“……!”
주백경은 곧바로 배의 앞부분까지 다가가서 확인했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눈동자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크하하! 이걸 속느냐?”
‘이런……!’
역시 서문경처럼 행동하는 건 무리였던 걸까?
주백경은 한숨을 내쉬고서 검을 쥐었다.
어쭙잖게 따라 하느니 자신이 잘하는 것을 택하였다.
“그냥 지나가라.”
“……뭐라고?”
“그 외에 무슨 짓을 하려거든, 나를 넘어가야 할 것이다!”
결연한 심정이 담긴 외침에 사내가 입술을 씰룩였다.
왼쪽 뺨부터 입술까지 가로지른 상처가 성이 난 듯 출렁거렸다.
“조용히 묶어서 총채주한테 데려갈까 했더니만…… 아직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양이구나!”
“그것참 잘된 일이다. 수적 놈한테 잡혀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뜻을 다잡으니 망설임이 없었다.
주백경의 입심이 장강에서 십수 년 동안 굴러먹은 사내한테 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오……?”
“채주! 설마 저런 애송이한테?”
수하 몇몇이 농담을 던지자 사내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시끄럽다! 그래, 제법 남자다운 너! 이름이 뭐냐?”
“주백경.”
“나는 흑선채의 채주 공소심이다!”
이름을 밝힌 사내, 공소심이 씨익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테니, 너는 너대로 버텨 보아라!”
“…….”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문경의 안위를 지키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고로 주백경은 마음을 명경처럼 닦고 또 닦았다.
두려움이나 번민 같은 미혹을 스스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니.
기수식을 취하는 모습에 무림인다운 기개가 있었다.
“죽어도 좋단 게지?”
적으로 마주한 공소심마저 주백경의 각오를 어렴풋이 엿보았다.
저잣거리에 나도는 영웅담이나 민담이라면 주백경에게 탄복했을 터였다.
하지만 장강은 낭만을 입에 담을 만한 곳이 아니다.
“죽고 싶으면, 죽게 해 줘야지.”
공소심은 흉하게 웃으며 작살을 쥐었다.
살을 찢고 파고들기 위해 만들어진 두 개의 쇠꼬챙이.
작대기까지 통짜 쇠로 만들어졌는지 작살에 물방울이 뜨문뜨문 맺혀 있었다.
……꽈아악!
한순간에 공소심의 오른팔이 길게 늘어나는 듯했다.
작살의 형체는 보이지도 않았다.
‘온다.’
주백경은 찰나를 여러 번 쪼개어 보았다.
작살이 지척이었으나 놀라지 않았다.
무엇을 펼칠지는 마음속에 새겨 놓았으니까.
서문검법의 육초, 검견불퇴.
오감을 끌어 올려 작살을 쳐 내고자 하였다.
진각을 앞으로 꽝 찍으며 동공을 행하고 의지를 굳혔다.
‘할 수 있다, 반드시 하여야 한다.’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에 서문경의 자그마한 숨소리가 귓전을 스치니.
자기도 모르게 굳은 어깨 근육을 풀었다.
척안룡과 마주치기 전, 석양이 다가올 때쯤.
서문경이 자신에게 하였던 조언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다.
-어깨가 굳었다.
이 한마디에 초식의 결이 달라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버드나무가 바람을 견디는데 어찌 제자리에 꼿꼿할까? 휘어질 줄도 알아야지.’
주백경은 빙긋 웃었다.
조금이나마 무공의 깨달음을 엿본 기분이었다.
검이 가볍다.
검견불퇴의 검로가 낮게 나는 제비처럼 경쾌하였다.
카가강!
섬전의 일격과 옆을 휘둘러 치는 이격.
손목으로 부린 기교로 작살을 두 번 후려쳤다.
작살에 담긴 힘은 고강하였으나 절묘한 곳을 후려치는 주백경의 무예를 당하진 못했다.
방향이 틀어진 작살이 장강 어딘가에 떨어졌다.
“……놈!”
자존심이 상한 공소심이 연거푸 무언가를 던져 댔다.
주백경은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짙은 안개나 파공성에 두려움을 품지 않았다.
그저 조언을 떠올렸다.
-누구에게 검을 겨누려 하느냐, 그걸 바르게 보는 것부터다.
-적은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
카가각――!
수십 개의 작살과 칼날이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주백경의 열정과 기개에 잠시나마 안개가 뒤로 물러나니.
공소심이 내던진 작살과 쇠 구슬 따위가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고 사라질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분노에 몸을 내던진 것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네놈. 어린놈을 지키고 있구나.”
“…….”
주백경의 침묵에 공소심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이 미동도 하지 않는 서문경과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주백경에게 머물렀다.
“흐흐…… 아까부터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너나 저놈이나 내상이 심한 모양이지?”
“시끄럽다.”
“장강에 가라앉히면 꼴이 좋을 거야.”
공소심의 말에 수하가 곧바로 돛을 폈다.
안 그래도 가깝던 검은 범선이 나룻배를 향해 직진해 왔다.
주백경의 시야에 그림자로 가득해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네 재주가 뛰어나다고 한들…… 철판으로 덧댄 선체를 막을 수 있겠느냐?”
공소심의 목소리에 조소가 배었다.
제아무리 주백경의 기교가 뛰어나도 불가능할 거란 확신.
승리감을 만끽하는 표정을 보고 주백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도련님이 강물에 빠질 텐데.’
순식간에 주화입마에 빠지리라.
주백경은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제발 멈춰라! 내가 졌다!”
“겨우?”
공소심의 물음에 의뭉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가.
눈치가 부족했기에 잘 몰랐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거밖에 없었다.
스으윽…….
주백경은 천천히 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멈춰! 같이 구경이나 하자!”
공소심의 말에 다른 수적들까지 전부 선미로 몰려왔다.
“무릎 가지고 무슨…….”
“야! 그렇게 창피하냐?”
모멸감이 주백경의 전신을 덮쳤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공소심을 멈출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가능했다.
그러나 수적의 잔악함은 정도를 넘기 마련이라.
“더 뭐 없나?”
“무릎 꿇는 걸로 살려 주면 우리가 어떻게 먹고살아?”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뒤통수 위에서 들렸다.
이렇게 되면 최악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주백경은 서문경의 안색을 잠시 살피고는 입술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흑선채의 노예로 들어가겠다.
그 말을 끝까지 잇기 직전이었다.
“……하아.”
숨소리를 내뱉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뒤이어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고서 자신의 어깨 사이에 팔을 끼웠다.
“왜 이러고 있어? 내 호위가, 왜, 허락 없이 무릎을 꿇은 거냐.”
짧게 끊어서 말하는 부분마다 깊은 분노가 자리했다.
주백경은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을 끌기 위해서라지만, 주군을 둔 호위가 할 짓이 아니었다.
“……저, 공자님.”
“됐어. 일단 일어나기나 해.”
선상의 운기조식에서 무슨 성취를 얻었는지, 자신의 몸이 쑤욱 들렸다.
아무런 저항감조차 없었다.
‘거리가 더 멀어졌구나.’
그러잖아도 손에 닿지 못할 경지에 있었거늘.
주백경은 서문경의 성취에 관해 농담을 던졌다.
“냄새가 심합니다.”
“전신의 노폐물이 빠져서 그런 거야.”
서문경은 억지로 웃었다.
주백경을 일으키고 나니 어떤 싸움을 했는지 보였다.
옷에 밴 핏물.
찢긴 장삼 사이로 너덜거리는 살점.
그러나 제자리에 찍힌 발자국에는 조금도 움직인 흔적 없으니.
열기를 머금은 서문경의 시선이 공소심에게 향했다.
그와 눈빛이 마주쳤다.
“놀이는 끝났느냐?”
공소심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스르릉.
검을 뽑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