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21화 (19/250)

생사일여 (1)

무공사전의 기척이 느껴지는 위층 중앙 복도.

서문경은 걸음을 멈추고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오롯이 감각에 의지하니 자연히 고개가 위로 들렸다.

천장에 틈새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다락방인가.”

수적이나 산적이나 남의 물건을 훔치면 묘한 곳에 숨기는 구석이 있었다.

그건 천하십대고수라고 해서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피식 웃고는 몸을 웅크렸다가 단번에 도약했다.

유려한 움직임이 고양이와 비슷하였다.

터업!

천장의 틈 사이로 두 손가락을 밀어 넣고서 천천히 벌렸다.

피부를 적시는 습기, 코를 찌르는 눅눅한 냄새.

서문경은 다락방에 몸을 밀어 넣고서 주변을 훑어봤다.

“……예상이랑 좀 다르네.”

솔직하게 말해서, 반짝이는 금괴나 영약, 비급 따위가 즐비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다락방에는 크고 작은 책장과 서적들이 가득했다.

시간 순서에 따른 기록물.

누군가를 뒤쫓기 위한 여정으로 보였다.

‘여유가 있었으면 여길 뒤져서 척안룡의 약점을 잡았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곳의 존재를 안 이상 다시 마주쳤을 때 우위를 잡을 수 있으리라.

서문경은 책장들 사이에 있는 무공사전과 행장을 챙겼다.

그러다 무심코 무공사전을 노려보았다.

“날 잡아먹기라도 한 거냐?”

오직 자신만이 무공사전의 내용을 볼 수 있는 데다, 위치까지 명료하게 느껴진다.

천하에 온갖 기물과 신물이 즐비하다지만, 무공사전처럼 신비한 것이 있을까?

안심되면서도 경계심이 부쩍 들었다.

서문경은 조심스럽게 무공사전의 책장을 넘겨보았다.

[척안룡 담정 - ??세]

[선상(船上)에서 당할 자가 당대에 없다. 온갖 기병(奇兵)을 다루는 솜씨는 천하에 유일한 경지에 있다.]

[보유 무공 : 밀운경천(密雲擎天), 흑룡선양(黑龍旋洋), 만뢰백우형(萬雷白雨形), 담정인공(譚正忍功)]

책장을 살피는 손이 분주해졌다.

심상 세계에서 그를 기절시켰으니 혹시 무공을 수집했나 싶었다.

하지만 어딜 뒤져 봐도 새로 수집된 무공은 보이지 않았다.

‘승리로 쳐주지 않는다 이거지.’

임기응변으로 잠시 무력화시켰을 뿐.

척안룡과 제대로 된 승부는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불만은 품지 않았다.

그의 특질과 무공을 아는 것으로 족했다.

‘선상 싸움에 능하고 기병을 조심하라…… 새겨 둬야겠네.’

서문경은 재빠르게 암기하고는 다락방에서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에 주백경이 일 층에서 무언가를 바리바리 싼 채 대기하고 있었다.

-창고에서 조금 가져왔습니다!

-조금?

서문세가에서 출발할 당시의 짐과 비슷하지 않나.

어이가 없어서 웃는데 주백경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보급이 많아서 생길 문제는 없지요.

-그건 맞지.

옳은 말이라서 대답은 했는데 기분이 떨떠름했다.

옥화산에서 영약과 금붙이를 털었던 것이 주백경의 도덕성을 타락시킨 건 아닐까.

조금 걱정이 드려는 차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척안룡이 몸을 뒤척였다.

“……으음.”

그 소리에 움직임이 멈췄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이해가 일치했다.

스윽.

까치발을 하고서 집 밖으로 나간다.

문을 닫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초절정고수의 오감이라면 작은 쇳소리에 몸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서문경과 주백경이 집에서 멀어졌을 때.

“……후우.”

“휴우.”

너나 할 거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십대고수이자 장강수로십팔채의 채주.

척안룡을 기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창고까지 털다니.

‘이래서야 전생이랑 완전히 달라졌구나.’

본래라면 주백경의 죽음을 책망하며 폐관에 들어갔을 시점이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검치와 만나서 교분을 쌓고 그의 무공을 얻었으며.

척안룡과는 너무 이른 시기에 마주쳐 비밀을 엿보았다.

‘……살아남은 게 다행이군.’

만일 척안룡이 내기에 응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노예가 되었을 터.

섬뜩한 상상에 소름이 돋았다.

서문경은 왼팔을 매만지며 주백경을 채근했다.

“미리 봐둔 나룻배가 어디라고?”

“저만 따라오십시오.”

주백경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빼물고서 달려 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척안룡이랑 싸운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걸 다 찾은 거야?”

“호위잖습니까!”

“농담 말고.”

주백경이 고민 한 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자님을 믿었으니까 곧바로 뛰어다니면서 위치를 봐뒀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듣기 좋은 소리네.”

서문경은 그 뒤를 따르며 숨을 골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광대한 전생의 심상에 비해 중, 하단전이 물러서 생긴 반동.

역시 무리해서 천주심경을 펼친 것이 독이 되었다.

“괜찮으십니까? 제가 업어도…….”

그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주백경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문경은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누굴 위해서 업고 갈 상황이 아니었다.

괴팍하기로 소문난 척안룡.

그의 비밀을 일부나마 본 자신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척안룡의 보신경에 등평도수의 묘리가 없길 빌자고.”

“…….”

말뜻을 이해한 주백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나룻배가 지척이었다.

서문경은 절제 없이 공력을 끌어내서 도약했다.

모래와 자갈이 사방에 튀었다.

그 모습을 본 주백경이 칼을 뽑았다.

“제가 줄을 끊겠습니다!”

나룻배를 선착장에 고정시키는 굵은 밧줄.

그것을 일검에 끊은 주백경이 서문경과 빠르게 합류했다.

자연스럽게 짐을 나룻배에 던지고서 노를 들었다.

촤아악――!

노질로 힘 있게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달이 밝아서 다행입니다.”

만월의 빛을 본 주백경이 밝게 웃었다.

어디가 건너편인지 훤히 보이는 것이다.

다만 서문경은 기뻐할 힘조차 없었다.

“운기조식을 취할 테니 고생 좀 해 줘.”

삼단전의 균형이 무너진 여파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주백경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피가 흐르지 않고 제자리에서 멈춘 것 같았다.

그래서 숨을 유장하게 들이마셨다.

“……후우.”

폐부가 부풀어서 터질 정도로.

십이정경을 따라서 일천세맥에 호흡이 다다를 때까지.

도맥을 이은 도사처럼 호흡을 숙하게 담으니 기가 혈도를 따라서 돌고 또 돌았다.

창백했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더 힘내십시오!”

정신이 몽롱한 사이에 들린 주백경의 목소리.

의지가 고개를 들었다.

전신의 도해(圖解)를 정경에 전심으로 세웠다.

전생의 심상을 억지로 불러들인 탓일까?

한껏 비대해진 상단전이 중, 하단전을 짓누르고 있었다.

‘생사가 여일하다고 하였지, 누가? 누가 그랬지?’

기억과 생각이 꼬였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집중을 방해했다.

그러나 서문경은 무너진 균형을 다시 일으킬 깨달음을 갈구하였다.

-허허, 생사가 여일하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관존은 부디 살아서 천하를 보살피게나.

생사여일(生死如一).

정의맹의 본진을 급습한 마교를 막아선 도사의 유언이자 유업(遺業)이다.

한때 오걸로 불렸던 노도사가 서문경이라는 무인에게 남기는 가르침이기도 하였다.

당시엔 알지 못했다.

그저 망설임을 끊어 주기 위한 배려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생과 사는 다르지 않다.

‘살기 위해 펼친 신공이 죽음을 불렀으니…… 제 맘대로 커진 상단전에 혼이나 내주어야겠다.’

상단전이 너무 비대해져 문제라면, 생사현관을 타통(打通)하여 중, 하단전으로 기울게 만들면 되는 일이다.

자소단의 기운을 이제 막 취했을 때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쉼 없이 지극히 행한 동공으로 인해 전신에 소화한 상황.

무리한 운용의 반동은 강인하게 단련한 중단전으로 감당한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가 않았다.

촤르륵…….

흔들거리는 나룻배의 선체.

늦은 밤, 강 중앙에 넘쳐나는 음기.

가만히 있어도 몸이 으슬으슬한 곳에서 생사현관을 넘고자 한다.

임독양맥을 돌파하여 비대해진 상단전의 무게를 두 단전에 나누고자 하였다.

‘미친 짓인가?’

강호인 십중팔구가 고개를 끄덕일 일이다.

어디 산 동굴에 처박혀서 해도 무서울 일을 왜 나룻배에서 하느냐고 따져 물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보다 더욱 미친 짓을 보았다.

“……천마.”

그놈은 맨손으로 소림사를 멸문시키고 정의맹과 맞서 싸우지 않았던가!

집착이라고 해도 좋았다. 열등감도 옳은 말이다.

그를 넘지 않고서는 천하에 당당하게 이름 석 자를 밝힐 자신이 없었으니까.

무예십팔반을 전부 다스리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까.

생사여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서문경은 두려움이라는 놈의 머리통을 붙잡고 짓눌렀다.

자소단에 녹다만 임독양맥의 노폐물을 뚫기 위해 전심전력을 모아서, 있는 힘껏.

쿠궁, 쿠우웅!

서문경의 입가에 핏물이 번졌다.

“……크윽.”

“공자님!”

주백경이 노를 바닥에 내려놓고서 행장을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영약을 꺼내도 쓸데없는 행동이었다.

생사현관을 돌파하는 도중에 다른 기운이 섞이면 오히려 난잡해지거나 주화입마에 이른다.

그래도…… 위안이 들었다.

‘옥화산의 절벽에서도 그렇고, 나를 위해 주는구나.’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웃고서 남은 힘을 그러모았다.

뭉툭해진 칼날을 바짝 세우고 산산이 흩어진 내력을 모으는 과정.

온갖 무리를 벌인 탓에 체온이 펄펄 끓어서 금세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자연히 망아(忘我)와 집념(執念)의 간극에서 투쟁하였다.

‘꿰뚫는다면 단번에.’

임독양맥을 타통하려는 칼날에 형의(形意)를 담았다.

생사가 달린 순간에 택한 것은, 우습게도 타인의 검이었다.

번천광검결의 천결.

두 호흡을 중단전에 끌어서 펼치는 광검이 거대한 문을 향해 겨눴다.

‘이거, 검치가 보면 배 아파하겠구먼.’

제자도 아니면서 제자보다 더욱 능수능란하게 펼치니까.

서문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서 칼날을 내질렀다.

쿠우웅! 쩌저적……!

생사현관을 돌파한 이만이 만끽할 수 있는 해방감.

정기신의 균형이 맞춰지는 쾌감이 서문경을 관통했다.

* * *

“……갔네.”

척안룡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은 서문경과 주백경이 도망칠 때부터 깨어 있었지만, 기절한 척한 이유가 있었다.

“쪽팔리게, 진짜 내기를 지켜야 하나?”

솔직히 말해서 매료되었다.

서문경의 심상, 강철과 용린으로 이루어진 기둥.

그 정경은 척안룡의 외눈을 개안시키기에 충분했다.

‘저 나이에 저런 심상을 구축하고 있다면 장래 오걸을 뛰어넘는 천하제일인이 되겠지.’

그때가 되면 가장 먼저 수하가 된 놈을 챙겨 주지 않을까?

척안룡은 히죽 웃으며 집구석을 뒤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털어 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와, 노를 가져갔네…….”

“내가 먹을 것까지 다 가져가면 어떡해? 내일 아침은 굶어야겠네.”

“군문이 아니라 도적놈 집안이었나. 쯔읍.”

시시덕거리면서 걷다가 문득 표정이 굳었다.

이 층 복도 중앙의 천장.

다락방의 입구가 미세하게 벌어져 있었다.

“오, 이런…….”

서문경을 진심으로 붙잡아 둘 이유가 생겼다.

하지만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을 건너기 전에 붙잡히겠지.”

이 주변에 있는 나룻배 모두 척안룡의 소유.

자신이 타고 있지 않으면 공격해도 된다고 말하였다.

척안룡은 물에 흠뻑 젖어서 올 서문경을 상상했다.

“이 주변이면…… 흑선채(黑船砦)였던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침소에서 느긋하게 누워서 기다리려는데, 고개가 확 돌아갔다.

“허, 이런 미친 애새끼를 보았나.”

생사현관 타통.

정기신의 균형을 이룬 절정고수의 탄생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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