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심경 (5)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주백경의 전음에 ‘나도 몰라’라는 말이 턱 아래까지 치솟았다.
전생에 안면을 익혔다고 한들 미친놈의 생각을 어찌 알겠는가.
무공사전을 빼앗겼기에 척안룡의 정보를 볼 수도 없다.
하지만 서문경은 불안해하는 주백경에게 슬며시 미소를 보였다.
-나만 믿어라.
그 말에 주백경은 과거의 장면을 떠올렸다.
아이들을 납치한 마인들과 맞섰던 서문경의 용기와 무위.
불안하던 마음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옆에서 보필하겠습니다.
-좋아.
서문경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주백경이 제정신을 차렸다면 그걸로 족했다.
척안룡 앞에서 망념을 품었다간 쇠사슬에 묶인 채 장강에 빠질 테니까.
그의 성정을 알기에 더더욱 뻔뻔하게 말했다.
“반찬은 뭐야?”
“물고기. 나물. 밥.”
“손님 대접 한번 지랄 같네. 돈을 뺏어 갔으면 절반 정도라도 내와야 하지 않겠냐?”
“아니, 뺏으면 뭐 얼마나 뺏었다고…… 알맹이는 이미 지들끼리 다 처먹었잖아. 영약 냄새가 혁낭(革囊 : 가죽 주머니)에 배어 있더만.”
“도적놈이 성을 내네?”
“끄흘흘…… 원래 강호가 이런 법이지.”
척안룡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초전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밥상에서 이어 가자는 뜻이다.
‘문제는 젓가락만으로 수십 명은 너끈하게 죽일 놈이라는 건데.’
대충 가늠하자면 검치와 대등하거나 한 수 아래.
저놈이 진심으로 목숨을 노린다면 도망치기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품행이나 언행은 대담하게 이어 갔다.
“뭐, 내가 이해해 줘야지.”
서문경은 척안룡을 뒤따르며 여유롭게 웃었다.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무공사전을 빼앗겼을지언정, 위기를 타파할 일수가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천주심경의 수행을 확인할 때지.’
서문경이 해석하기에, 천주심경은 단순히 심상을 쌓기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심공(心功).
마음을 금강처럼 견고하게 쌓아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공부.
그것이 전대 고수가 남긴 글귀에 은연중에 담겨 있었다.
천하의 무공에 얽매이지 않는 금강의 마음.
자신만의 부동한 의지로 하늘에 맞닿아라.
이 구절을 두 가지 구결로 해석했다.
금강심(金剛心)과 부동경(不動境).
삼단전에 천주를 덧대어 힘을 더하거나 합일을 이루는 신공 구결이다.
다른 고수의 심상처럼 최강의 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대등해지기 위해 자강하는 힘.
이를 따로 운용할 가능성도 보았다.
문제는 완전히 자의적인 해석인 데다, 수행의 단계도 일천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까지 패를 아낄 수도 없는 노릇.
‘천주심경의 가능성이 어디까지 열려 있는지도 확인해 볼까.’
척안룡에게 먹힌다면 천하의 심공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으리라.
서문경은 척안룡을 뒤따르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상단전 심상에서 천주를 빌려와, 서문경이라는 무인의 소우주에 덧씌운다.
“……으음.”
생경하기 짝이 없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하지만 움츠러들거나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천주심경의 심상을 떠올렸다.
“뭔 짓을 해도 똑같을 텐데.”
척안룡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력이 가상하다는 기색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뭐라도 할 수 있으면 해 봐.”
“……노력하지.”
서문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군으로 삼긴 해야 하는데, 분노를 유발하는 솜씨가 발군이었다.
게다가 저놈한테 무공사전과 여비까지 받아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난감하고 짜증 난다.
그 기색을 용케 알아차렸는지, 척안룡이 친절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차라리 욕을 하지 그러냐? 기왕이면 밥 먹기 전에…….”
“씨X 놈.”
“쓰레기.”
서문경과 주백경이 동시에 욕설을 토했다.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제자리에서 멈춘 척안룡이 상처받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내가 아무리 도적놈이고 쓰레기라지만, 직접 들으면 마음이 아프단 말이지. 앞으론 주의해 줘.”
뭐 어쩌란 말인가.
장단조차 맞추기 싫었다.
“밥이나 줘!”
“……와, 다른 채주들한테도 이런 매도는 안 당했는데.”
솜털 보송한 애송이에게 굴욕을 당할 줄 몰랐다느니.
호위라는 것도 눈치가 없고 견식이 부족하다느니.
척안룡은 숨도 쉬지 않고 주절거렸다.
밥상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길었나 심각하게 고민될 정도였다.
그 덕분에 여유가 났다.
‘지금 내 수준으로는 삼단전 전체를 조율하거나 합일하는 건 불가능해.’
따라서, 단 하나만 택한다.
서문경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 * *
단순히 겁을 상실한 놈이 아니다.
‘재밌네, 이 녀석.’
척안룡은 뱀처럼 눈을 가늘게 뜨곤 서문경을 직시했다.
다른 후기지수라면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목숨을 구걸할 텐데, 어째 저놈은 자길 오래 본 친우처럼 굴었다.
‘싹수없는 놈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배분이니 항렬이니 자존심이니, 그게 뭔 상관인가?
아가리가 험해도 좋다.
그만큼 실력이 받쳐 주면 흠조차 되지 않았다.
서문경은 그 조건에 모두 들어맞는 놈이었다.
‘내가 척안룡인 걸 알고도 투쟁심은 잃지 않고…… 내관혈에 둔 공력이 적잖아.’
필살의 절초를 펼치기보단 방어 초식을 펼칠 정도.
의연한 태도가 마음에 들긴 하지만 우습게 보였나 하는 의문이 들긴 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도.
“거 밥 좀 처먹게 그만 쳐다보쇼.”
후기지수가 아니라 시정잡배 같지 않나.
척안룡은 어이가 없다는 듯 경박하게 웃어젖혔다.
“끄흘흘…… 얼굴이 닳기라도 하냐?”
“당신 같은 미친놈은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식사라는 건 조용히 진행되는 법이야.”
서문경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호위만 봐도 젓가락 하나 못 집고 있는데, 밥은 먹게 둬야지.”
“……끄흐으.”
골수까지 치미는 한기.
해무(海霧)와도 같은 살기다.
척안룡의 살기가 장내를 자욱하게 짓누른 탓에 주백경이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저놈은 멀쩡하게 밥이나 처먹는단 말이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공력의 안개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조차 대단한데, 대화까지 멀쩡하게 나눌 줄이야.
척안룡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기를 씹어 먹었다.
서문경이 시야의 중앙에 있었다.
‘아, 어떻게 하지.’
시커먼 욕망이 꿈틀거렸다.
서문세가의 일공자.
그 직함을 이용하는 것도 좋았지만, 직접 마주하고 보니 왜 제자를 하나둘씩 들이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는 가볍게 가지고 놀다 버릴 장난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대하듯 물었다.
“천무학관으로 가는 중이지?”
“그래.”
“……솔직하게 대답하네?”
“별호가 천무신동인데 숨겨 봐야 뭐 하겠어.”
무심하게 대답하는데 언행에 꾸밈이 없었다.
가슴의 박동 또한 평상시처럼 고요하다.
‘저게 다 연기일 텐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네.’
어린 시절부터 단련한 기감과 육감, 직관을 속이는 자야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보다 강한 오걸(五傑)이었다.
서문경처럼 새파랗게 어린놈이 아니라.
척안룡은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고 물었다.
“학관처럼 지루한 곳 말고…… 같이 물길이나 타면서 나한테 직접 배우는 건 어때? 본선(本船)에 태워 줄게.”
“안 된다.”
그 말에 척안룡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기를 이기지 못하고 벌벌 떨던 주백경.
서문경이 아니라 그놈이 대답한 것이 마뜩잖았다.
“넌 뭔데?”
“공자님은…… 천무학관으로 가기 위해 많은 걸 버리셨다. 그 선택을 어디 감히 도적놈이…… 방해하려고 드는 거냐?”
두 눈을 부릅뜨고.
젓가락으로 피부를 강하게 찌르고.
주백경은 살기에 힘겨워하면서도 꿋꿋이 뜻을 밝혔다.
“……허.”
척안룡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저 미물처럼 여겼던 물건의 장점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견식도 눈치도 없지만, 강단 하나는 기가 막히는 놈이구나. 너 같은 놈이 강호에서 빨리 강해지거나 죽기 마련이지.”
살기를 자연스럽게 풀었다.
압박에서 자유로운 놈, 압박을 버틸 줄 아는 놈.
두 보석을 눈앞에 두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불렀다.
척안룡은 젓가락을 밥상에 내려놓았다.
“둘 다 내 배로 와라. 거절은 안 받아 줄 거야.”
“싫어.”
서문경이 서늘한 눈으로 척안룡의 제의를 거절했다.
아니,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굴복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늑대 아래로 들어가겠어?”
“재밌네.”
척안룡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지자, 서문경이 기다렸다는 듯 서두를 뗐다.
“내기 하나 하지.”
“일단 들어 보고.”
“눈싸움을 해서 지는 놈이 이긴 놈 아래로 들어가는 거야.”
“끄흘흘…… 진심이냐?”
“왜, 겁나나?”
“클클. 전혀.”
척안룡은 서문경이 진심으로 가소로웠다.
눈싸움을 하자는 건 무인이 가진 상단전의 심상 세계를 두고 다투자는 뜻.
오만하기 그지없는 내기였다.
‘나중에 딴소리하면 곤란하니 기나 꺾어 놓을까.’
초목이 푸른 벌판에 나들이를 가듯.
척안룡은 가벼운 마음으로 서문경을 응시했다.
게거품을 물기 전에 멈춰 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무인의 심상 세계가 이어지는 순간.
척안룡의 외눈이 커졌다.
“……네가 천무신동이라고?”
고요한 바다, 푸르른 초목, 새파랗게 물든 하늘.
두 심상 세계가 덧입혀진 경계에 서 있는 건 열네 살의 소년이 아니었다.
장성한 무인.
삼단전의 합일을 이룬 초절정고수가 어깨를 쭉 펴고서 노려보고 있었다.
‘최강의 자신을 심상으로 빚은 놈도 있다지만, 저건…….’
말이 안 되지 않나.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사(奇事)에 척안룡이 여러 가지 사술을 떠올렸다.
자연히 과거에 잃어버린 눈이 쓰라렸다.
“너, 설마…… 방문좌도(傍門左道)의 일맥이었느냐!”
분노를 터트리기 직전에 무언가가 지축을 꿰뚫고 나왔다.
거대한 기둥.
용린이 천산갑처럼 뒤덮인 기둥이 삼 층 높이로 치솟았다.
하물며, 사특한 방문좌도가 아니라 신성한 정도(正道)의 기운이 실려 있다.
서문경은 그 기둥 위에 있었다.
“내 아래로 들어올 생각이 들어?”
헐렁한 옷깃, 묶지 않고 지저분하게 둔 머리카락.
자신을 내려다보며 팔짱 낀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과거 스치듯 보았던 황족의 위엄과 비슷했다.
무림에선 저것을 일대종사의 존재감이라고 일컫는다.
척안룡은 서문경을 시야에 담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그렇다면, 짜부라져라.”
서문경은 기둥을 오른발로 내리찍었다.
……쿠구구궁!
삼 층 높이의 기둥이 척안룡을 덮쳤다.
어둠이 척안룡의 외눈을 물들이지만,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유쾌하게 웃은 척안룡이 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고요하던 바다에 해일이 일어났다.
물거품이 쉼 없이 치솟는 와류.
그의 심상이 기둥을 부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다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콰콰쾅──!
거대한 기둥으로 척안룡의 심상 세계를 깔아뭉갰다.
그것으로 모자라 옆으로 거칠게 휘둘렀다.
와류는커녕 해일조차 우수수 무너지고 초목은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오, 이런.”
척안룡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공자님을 믿긴 했지만, 어떻게 이기신 겁니까?”
창고에서 노를 들고 온 주백경은 제자리에서 쓰러진 척안룡을 보고 경악했다.
아무리 서문경이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척안룡은 천하십대고수가 아닌가!
이에 서문경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심상 세계라는 전장에서 내가 질 일은 없어. 처음부터 내가 이기는 내기였단 소리지.”
척안룡은 무지했다.
자신이 관존의 위치에 올랐던 초절정고수였다는 것을.
삼단전의 흐름에 직접 관여하는 신공 절학, 금강심과 부동경의 존재 역시.
‘도박이 통하기도 했지만…….’
서문경이라는 무인을 이루는 소우주.
정기신의 합일을 짜 맞추는 것은 포기했다.
천주심경의 수행이 부족했고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심상으로 다투기로 하였다.
금강심과 부동경으로 상단전을 부풀려, 혼(魂)에 새겨진 전생의 심상을 불러온 것이다.
쿠쿵쿵쿵!
정기신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탓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놈이 깨기 전에 얼른 떠나자. 명색이 수적 떼 채주인데, 금방 일어날 거야.”
“안 그래도 공자님께서 싸우고 계실 때 나룻배 위치를 봐두었습니다.”
“……허.”
가만히 승패 결과를 기다린 게 아니라 주변을 탐색했다?
서문경은 짓궂은 미소를 빼물었다.
“응원하지 못할망정 자기 살길을 봐뒀다 이거지?”
“설마 그랬겠습니까? 하하. 얼른 짐을 챙겨서 떠나지요!”
주백경이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의 노를 들어 올렸다.
반면 서문경은 위층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단전을 무리하게 써서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척안룡이 무공사전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곳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