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심경 (4)
“그나저나 진짜 습하구먼.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네.”
어째 온종일 햇빛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
심지어 석양마저 흐릿하다.
서문경은 옷깃을 펄럭거리며 안개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주백경이 자기가 아는 지식을 덧붙였다.
“천하에서 제일 안개가 잦다고 들었습니다.”
“그야 분지니까 그렇겠지…….”
옥화산을 비롯한 여러 산과 구릉이 테두리를 이루고 안쪽은 평야인 지역.
하물며 장강이 중앙을 관통하고 있어, 수적이 터를 잡았다.
“설마 ‘채주’랑 마주칠 생각은 아니시죠?”
주백경이 서문경의 눈치를 살폈다.
수적 연맹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砦).
그곳의 채주인 척안룡(隻眼龍)은 중경을 대표하는 고수이자, 천하십대고수에 속해 있었다.
서문경은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은 됐어.”
“정말이시죠?”
확언을 받아야겠다는 듯 주백경이 가까이 다가왔다.
다짜고짜 검치를 만나러 간 이후로 대책 없는 사람처럼 보는 태도였다.
하지만 검치와는 달리, 척안룡은 전생에서 만나 본 적이 있어서 알았다.
“지금 만나면 천무학관은커녕 장강 유람이나 다녀야 할걸.”
“말씀이 어째…… 설마 안면이 있습니까?”
그 말에 서문경이 순간 움찔하여 둘러댔다.
“검치는 그래도 괴팍한 고수지만, 척안룡은 수적 연맹의 두목이잖아! 우리 실력으론 대화조차 안 받아 주겠지.”
“그, 그렇지요? 후유…….”
주백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차마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그놈이라면 아마 우릴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갈걸…….’
눈이 한 짝밖에 없으면서 아는 것이 많은 놈이었다.
자신이 서문세가의 일공자인 걸 알아보면 어떻게 될까?
관군을 물러나게 만들 통행증.
혹은 지루한 해상에서 가지고 놀 장난감.
어느 쪽이든 고역이다.
서문경의 귓가에 척안룡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어른거렸다.
“중경은 조용히 넘어가자.”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백경이 날름 대답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면서도 동공의 운행을 멈추지 않으니 겨우 십구 일 만에 벌어진 변화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서문경의 시선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쩌억!
“악!”
주백경의 종아리에 채찍처럼 찰싹 감기는 발등.
서문경은 입술을 삐쭉거리는 그에게 짧게 말했다.
“집중.”
“……아, 하려고 했습니다. 진짜로.”
한차례 투덜거린 주백경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걸었다.
중, 하단전을 조화롭게 쓰는 동공.
상단전으로 심상을 쌓는 천주심경의 수행.
그 두 가지를 양립하는 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서문경이 생각하기에도 상당한 재능이 필요했다.
‘거의 한 달 동안 괴롭히긴 했지만, 삼단전의 수련을 동시에 행하는 걸 보면 주 무사의 재능도 보통은 아니야.’
금세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이어 가는 근기가 제일 뛰어나다.
흐뭇하게 웃은 서문경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주변을 경계하는 건 기감으로 족하니.
평범한 무인이라면 엄두도 못 낼 내공 낭비였지만, 옥화산의 기연을 모두 독식한 상태였기에 가능했다.
그리하여 시선을 바깥이 아닌 내면으로 향했다.
그릇으로 삼은 상단전의 심상 세계에 자신을 빚어냈다.
‘빨리 컸으면 좋겠네.’
아직은 겨우 열네 살의 소년에 불과하다.
체구가 다 자라지 않아서 다리가 짧은 것이 더더욱 불만스러웠다.
‘나도 나름 옥면(玉面) 소리 듣고 다녔는데…… 그때가 약관이었나? 앞으로 육 년이나 남았네.’
실없는 생각으로 긴장감을 풀었다.
천주심경을 익히기 시작한 지 열흘째지만 여전히 어렵고 고통스러운 수행이었다.
‘아직 글귀를 완벽하게 해석하지 못했는데 말이지.’
서문경이 생각하기에 두 가지 가르침이 있었지만, 수행의 단계가 일천하지 않나.
한숨을 내쉬곤 서문검법의 검의를 떠올렸다.
화려함을 절제한 살검(殺劍).
다수의 적을 도륙하는 검무이자, 적장의 요혈을 노리는 암검(暗劍).
구파일방의 고수가 떠올리는 심상처럼 거창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싫어해서 단순한 정경을 떠올렸다.
그것이 바로 기둥.
무엇으로도 부서지지 않는 강철의 기둥이었으니.
쿠르르…….
파란 하늘.
광활하기만 하던 평야에 두 손으로 감싸도 닿지 않을 두께의 기둥이 솟았다.
……그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위세만 좋네.”
겨우 허리까지 오는 것이 전부다.
자신의 나이가 열네 살인 걸 생각하면 턱없이 작다…….
이래서야 무슨, 언제 하늘까지 닿을지 까마득하지 않나.
초라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서문경은 혀를 차고 말았다.
“전생에서도 삼 층의 전각까지 세우는 게 한계였는데.”
그 경지에서 만족한 나이가 서른.
그리 생각하면 벌써 허리까지 구축한 것이 빠르긴 하지만, 만족할 순 없었다.
“천마만 있는 게 아니잖아.”
역사 속에서 사라진 역대 마교의 잔재 혹은 전승자들.
일곱 마인이 천마를 중심으로 모여, 소위 칠로두(七老頭)라고 불렸다.
주백경에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주고 천무학관까지 가서 어린 꼬꼬마들을 지켜야 할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칠로두가 각지에서 몸을 일으키면 혼자서 뭘 어찌할까?
그렇다고 천마가 우스운 것도 아니다.
칠로두가 스스로 시인했듯, 한꺼번에 덤벼도 천마를 못 이긴다고 했으니까.
“와, 진짜 암울하네.”
새삼 느끼지만, 너무 어려운 싸움 아닌가.
검기 좀 쓴다고 깝죽댄 주백경 말고도 많은 고수가 필요했다.
요컨대 사천의 성도에서 만난 검치와 양명성.
그 둘이 십수 년 뒤에 합류하면 조금은 든든할 것 같았다.
‘앞으로 만날 인연도 좋게 이어 가면 좋을 텐데 말이야.’
막상 그런 마음을 품으니 조금 씁쓸해졌다.
자신이 가진 무공사전은 필연적으로 무림인과 반목하게 만드는 요물이니까.
그들과의 비무나 싸움에서 승리하여 얻은 무공을 가전무공에 섞다 보면 언젠가 비슷한 점을 발견할 테니까.
그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다.
-난 대충 보면 다른 무공의 요체를 알아챌 수 있어.
혹은.
-서문세가의 장서관에 있는 무공을 조금씩 익혔거든.
이 말이 불러올 반감은 얼마나 클까.
그 적의를 천마와 칠로두에게 자연스럽게 돌릴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몸이 어려지니 마음도 유약해진 기분이었다.
‘천마와 싸우기 전날의 천막에서는 지금보다 오백 배는 진지하고 처절했는데 말이지.’
과거로 회귀한 이후 만끽한 봄날의 햇살과 온기가 독기를 희석한 것 같다.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집에서 나설 때만 해도 미움받을 걸 각오했는데, 겨우 두 사람 만났다고 이 지경인가.’
천무학관의 꼬꼬마들한테 정이 붙어 버리면 어쩌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저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장강입니다.”
나날이 성취의 기쁨을 즐기고 있는 주백경도 제법 감각이 예리해졌다.
서문경은 대견하다는 의미로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러다 진짜 고수 되겠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럼 내가 놀리려고 말했을까?”
주백경에게 짓궂은 농담을 던지고는 안법을 펼쳤다.
석양이 지고 시간이 제법 지난 걸까.
온통 어두운 천하에 고적한 달빛만이 희미했다.
장강의 수면 위로 보이는 거라곤 반도 차지 않은 달의 그림자인지라 보이는 것도 적었다.
‘적어도 배는 없네.’
사공도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시간이다.
서문경은 주변으로 시야를 넓혔다.
가정집의 불빛이 조금씩 보였다.
“오늘은 이 근처에서 자고 가자.”
“저, 정말이요? 노숙이 아니라 편하게 잘 수 있는 겁니까?”
“누가 들으면 내가 고생시킨 줄…… 흠.”
하긴, 지난 십구 일 동안 맨땅에서만 잤던가?
주백경이 갑자기 매섭게 쏘아보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대신에 앞장서서 걸었다.
“저기서 연기가 나는구나.”
장강의 중류와 가깝게 세운 울타리.
그쪽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꿀꺽.”
등 뒤에서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만도 했다.
노숙할 형편에 고기는커녕 밥도 구경하지 못했으니까.
매일 건량을 먹고 강물로 목을 축였다.
그 모두가 서문경의 의지였다.
“……앞으로는 마을을 경유하면서 가자. 사십 일이나 남았으니까.”
“하극상을 벌이지 않아도 되겠군요.”
농담이 아니라는 듯, 주백경의 표정이 몹시 진지했다.
* * *
왼눈에 쓴 안대와 곱게 모아 묶은 꽁지머리.
짓궂은 미소를 빼문 사내가 서문경과 주백경을 훑어봤다.
“갑자기 찾아와선 세 명이나 재워 달라고?”
그 말에 주백경이 즉시 반문했다.
“어딜 봐도 두 명이지 않습니까?”
“아, 땅 멀미가 나서 헷갈렸네.”
“아…… 사공이십니까? 안 그래도 내일 저희가 장강을 건너야 하는데, 삯을 드릴 테니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사내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주백경을 보며 서문경은 경악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미친.’
왜 하필 척안룡을 여기서 만난단 말인가?
여기서 엮이면 저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래서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그만해…….
-하하, 농담도 참. 그나저나 참으로 좋은 인연 아닙니까? 잠도 재워 주고 강도 건너게 해 준다는데요.
-절대 마주치지 말자던 놈이 좋은 인연이야?
그 말까지 듣고 나서야 주백경의 눈이 뜨였다.
-……아.
-저놈, 척안룡이야.
-…….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것만으로 사내, 척안룡은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알았으면 무릎이라도 꿇든가 해야지?”
* * *
사방이 강철로 막힌 지하실.
한기가 은은하게 살갗을 저미는 것이 자못 현실적인데, 왜 꿈인 것처럼 느껴질까.
주백경은 허탈한 표정으로 굳게 잠긴 철문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아니…….”
“무슨 말인지 알아.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겠지, 태양혈이 움푹하고 기도조차 보잘것없으니까.”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상대하기가 싫은 상대.
그게 바로 장강의 주인 행세를 하는 척안룡이었다.
심지어 무명신승마저도 인내심의 바닥을 보였다.
분노를 상시 유발할 정도로 경박한 광인.
그런 주제에 장강수로십팔채에 가진 애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끈적끈적한 놈이었다.
‘전생에서도 얽히고 싶지 않아서 도망 다녔는데.’
나이가 어린 지금은 더더욱 어렵다.
게다가 천하십대고수 중 일인과 적대했다가는 서문세가에 피해가 갈 터.
심지어 지금은 무공사전마저 빼앗기지 않았나!
서문경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필이면 엮여도 저런 미친놈이랑.”
“아직 미친놈 안 잔다─!”
위쪽에서 들려온 척안룡의 목소리에 주백경이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러지 않았다.
“저녁밥은 주고 가두지 그랬어.”
“돈을 줘야지.”
“네가 다 뺏어 갔잖아, 치졸한 새끼야.”
“입장비, 숙박비, 식사비까지 다 따로거든. 생각을 해 봐, 나 같은 고수랑 하룻밤 지내는데 얼마나 비싸겠어? 끄흘흘.”
척안룡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복장이 터져서 뒈지라고 하는 짓이다.
서문경은 인상을 찡그렸다.
“냉기 흐르는 지하실에 가둬 놓고 숙박비까지 챙기냐?”
“와, 새파랗게 어린놈이 말이 왜 이렇게 짧아?”
“할 말 없다고 나이로 우기지 마라.”
“내가 지금 내려가서 죽여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 말에 주백경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심기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자는 뜻이겠지만, 척안룡에게 그랬다가 장강에 빠져 죽은 놈이 수백이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전음으로 알려 줄 수도 없었다.
‘기도를 완벽하게 숨기는 것도 그렇고…… 내가 본 무인 중에서 제일 신기한 놈이었어.’
무명신승이 펼치는 혜광심어가 아니면 척안룡의 이목을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서문경은 담대하게 말했다.
“안 죽일 거잖아.”
“자신 있어?”
“흙 파먹는 놈이면 몰라도 물길 타는 놈은…… 다시 못 뭉치지.”
녹림은 군병을 피하고 다시 뭉치는 데 이골이 났지만, 수로채는 물길을 막아 버리면 흩어진다.
그 말뜻을 못 알아먹을 척안룡이 아니었다.
“……크흘흘.”
낮게 울리던 척안룡의 웃음소리가 뚝 끊긴다.
불길함을 느낀 주백경이 황급히 전음을 보내왔다.
-화가 끝까지 치솟으면 칼질부터 하지 않겠습니까?
불안과 걱정으로 젖은 목소리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고수라면 보통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살인을 감행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척안룡은 다르다.
“어디서 금방 객사할 놈일세?”
“어차피 금방 죽을 놈이라면 밥이라도 주시오.”
“흠…… 그럴까?”
진심으로 고민하는 듯한 목소리에 주백경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그건 서문경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왜 저따위인지, 수로채에 집착하는지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군이 되면 아주 든든한 미친놈이지.’
전생에서 천마와 칠로두의 진격을 가장 길게 멈춘 남자.
장강수로십팔채의 피 값을 받겠다며 장강을 틀어막았던 고수가 바로 척안룡 담정(譚正)이었다.
끼이익……!
“올라와라, 밥 식는다.”
철문을 열어젖힌 척안룡이 빙긋 웃었다.
언제 지하실에 가뒀냐는 듯, 친근하게 구는 모습에 서문경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