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심경 (3)
일거양득.
어부지리.
무슨 말로 해도 좋았다.
‘아버지의 비밀 금고를 털어도 이만큼 기쁘진 않을 거야.’
옥화혈사를 막으려다가 귀물들을 얻었을뿐더러, 양팔의 힘줄이 전부 늘어난 주백경까지 완치했으니까.
하물며 막막하던 상단전 수련의 단초를 얻었다.
서문경은 싱글벙글 웃으며 부처의 머릿속에 적혀 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천하에 온갖 잘난 고수들이 자칭하기를.
자기는 만변(萬變), 파천(破天), 금검(金劍), 무극(無極), 단문(斷門)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심상을 궁구하게 깎았다고 한들, 천하라는 우물.
우물 안 개구리끼리 잘났다고 울 뿐이지 않나?
천하제일 개구리가 되겠다고 떠드는 무림에 한탄하였다.
고로, 나는 그들을 흉내 내어 부처를 깎았다.
하지만 진의는 얼굴 없는 머리 안에 두니.
바로 이 글을 보고 있는 연자여.
천하의 무공에 얽매이지 않는 금강의 마음으로 심상을 쌓아 올려라.
수행을 멈추지 마라.
자신만의 부동한 의지로 하늘에 맞닿아라.
나는 이 수행을
천주심경(天柱心境)이라 부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외견을 보고 감탄했는데 말이지.’
얻어걸렸다.
단지 옥화혈사가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석상을 부쉈을 뿐인데, 운이 좋았다.
무려 전생에서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진짜 기연.
천주심경을 발견했을 때, 처음엔 의아했다.
‘그저 쌓기만 하라는 게 뭐가 특별하단 거지?’
그 생각은 첫 수행을 시작하는 순간 달라졌다.
쏴르르…….
무림 고수라는 것들이 왜 목표하는 형상을 조각하듯이 깎기만 하는가.
전생에 왜 자신의 심상이 강철의 기둥에 불과했던가.
이유는 간단했다.
‘이렇게까지 어려웠나?’
어느 형상이든 심상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전생에 처음 수련할 적엔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을 정도.
그러한 걸 천주처럼 거대하고 두텁게 쌓아 올린다?
그것이 가능한 것만으로 천하제일.
하늘이라는 대우주를 논할 만했다.
‘하긴, 산 중앙을 파고 부처 석상까지 깎은 미친놈이 약할 리가 있나.’
무공은 그저 살인의 기예이자 기교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한풀 꺾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와 닿았다.
‘가전무공과 제법 상통해. 심지어 전생에 기둥의 심상을 무기로 삼기도 했지.’
서문세가의 무공은 직선적이고 실전에 맞닿아 있다.
천주심경 또한 마찬가지.
어떠한 허례 없이 순수하게 기둥으로 축을 쌓는 수행이었다.
……숨겨 놓은 구결이 언뜻 보이긴 하지만, 근기와 근성으로 완벽하게 해석하면 될 일.
서문경은 그날 밤부터 주백경에게 시련을 하나 더 추가했다.
“동공에 심상 수련까지 추가한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미친 소리라고 할 뻔한 것을 겨우 참은 모양새다.
이해는 된다.
아직 첫걸음을 떼고 있는데 갑자기 날아오르란 말처럼 들렸을 테니까.
하지만 앞으로 싸울 적은 그런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소가주에서 내려오긴 했어도 일공자잖아.”
“…….”
“아니지. 불만 있으면 지금 당장 대련부터 할까?”
“공자님, 그…… 다 잘되자고 하는 말인 건 알지만 너무 진도가 빠릅니다.”
“왜? 뭐가 빨라?”
서문경은 주백경의 기해혈을 툭툭 치면서 피식 웃었다.
“네 뱃속에 들어간 명약이면 실상 걸어 다니는 내공 덩어리지. 동공이든 상단전 수련이든 하지 않으면 언젠가 혈맥이 터지든 기혈이 꼬일 거다.”
웃는 얼굴로 시한부의 운명을 고하다니.
주백경이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절벽에서 보인 용기는 어디 갔어?”
“그거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
“강해지는 것도 마땅히 해야지. 안 그래?”
“그…… 쩝.”
주백경이 할 말을 잃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두 팔의 핏줄이 터질지언정 밧줄을 잡아당기던 박력과 기개는 어디로 갔을까.
서문경이 잠시 기막혀하는 사이.
주백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리숙하던 분위기를 지웠다.
“농담이었습니다. 이번 일로 저의 부족함을 배웠습니다.”
“……?”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공자님마저 위험에 처하는 곳이 강호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더 일어날지 까마득합니다.”
게다가, 말을 덧붙이는 주백경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바른말을 고하는 것조차 무공으로 증명해야 하니, 약해서 뜻을 꺾거나 불의를 묵과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정말.”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기 힘든 남자를 호위로 두었다.
그게 딱히 나쁘지 않아서 마주 웃고 말았다.
검치 앞에서도 똑바르게 말할 정도니, 뚝심 하나는 기가 막혔다.
서문경은 주백경의 정강이를 가볍게 후려 차며 말했다.
“그리 말한다고 쉬게 해 주진 않을 거야.”
“아니, 첫날부터 시작하는 게 어딨습니까?”
“고수가 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았어?”
서문경은 주백경과 틱틱 대며 걸었다.
두 개의 천주.
하늘에 맞닿을 기둥을 세워, 천마가 일으킬 혼란을 막으리라.
지금은 단지 그 마음이었다.
* * *
열흘 뒤.
쉼 없이 걸으며 심상을 쌓고 옥화산에서 수탈한 영약을 먹어 치우는 나날이었다.
걷는 정도의 동공으론 영약의 기운을 정돈하는 데 한계가 있어, 가끔은 온종일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것을 보고서 따라 하는 주백경의 열의도 대단했다.
“한 번 더 천천히 펼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려울 건 없지.”
일초 비검절우부터 사초 서풍광아까지.
지극히 느리게 펼치며 반복했다.
변화는 아주 조금씩, 마음이 내키는 대로 기교를 부렸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어라, 얽매임 없이 알기만 하라.
금강경의 가르침을 서문검법에 비집어 넣었다.
“서문세가의 가전무공이 패도적이고 직선적이지만, 똑같이 휘두르란 말은 아니지.”
숨에 여유가 있을 때 요체를 중얼거렸다.
주백경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자신에게 속삭이는 말이기도 했다.
천주심경의 수행.
심상 수련은 서문경에게 있어 어색하고 생경한 일이었다.
그럴 땐 아주 간단한 답이 있었다.
기초부터 다시.
하나씩 되짚어가며 쌓아 올리는 일.
‘전생에서도 이렇게 해서 강철의 기둥을 심상으로 삼았지.’
서문검법의 검의를 이루었다고 만족한 순간 멈췄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가전무공 전부를 심상으로 축적하고자 했다.
‘번결을 펼쳤을 때, 확실하게 느꼈어.’
천마가 이룬 신화경.
그가 완성한 무예십팔반의 무예를 따라잡을 가능성을 무공사전에서 보았으니까.
서문경은 그 가르침을 주백경에게 베풀었다.
“어때, 이해되나?”
“제가 한번 펼치겠습니다.”
주백경이 신중한 표정으로 두 다리를 어깨만큼 벌렸다.
칼끝은 하늘을 치켜서, 정검세.
자신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지켜본 결과이리라.
“스으으…….”
서문경은 주백경의 흉곽이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깊고 숙한 호흡.
격한 동공을 펼치기 직전의 고요함이 주백경을 감쌌다.
“일초.”
서문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날이 치솟았다.
비검절우(飛劍絶雨).
내리는 비마저 자르는 쾌검이 주백경의 손아귀에서 펼쳐졌다.
‘……좋아.’
중간에 기교를 부려도 될 만큼 손마디마다 여유가 있고 급격히 늘어난 공력을 과도하게 쏟지도 않았다.
열흘 동안 열심히 갈군 보람이 있다.
서문경은 그러한 본심을 숨긴 채 입술을 달싹였다.
“이초.”
일검적심(一劍赤心).
봄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던 나뭇잎 중앙을 꿰뚫는다.
주백경의 걸음, 품행과 눈빛에 담긴 절도가 흡족했다.
다만 한 가지를 짚고자 하니.
“어깨가 굳었다.”
“…….”
주백경은 대답하는 대신 오른 어깨를 들썩였다.
서문경의 지적대로 잠깐 굳은 근육이 움직임을 둔하게 하고 있었다.
알아차린 순간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무림인이셨다면 만인의 질투를 받으셨겠지.’
서문세가가 아니라 무림세가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가주의 직계라고 한들 무림인의 질시와 열등감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라고 달랐을까?
무림에 몸담은 이상, 어린 천재의 존재는 언젠가 위협으로 다가왔을 텐데.
“무림에 협이 떠났다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는 듯.
엄중한 눈빛으로 경고한 서문경이 차분하게 말했다.
“삼초.”
살갑게 불던 봄바람에 거친 광야의 돌풍이 임하니.
서풍(西風)의 광아(狂牙).
북적의 목숨을 수없이 뺏은 칼바람이 전방에 휘몰아쳤다.
콰콰……!
서문경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옥화산에서 얻은 영약을 먹어 치운 탓인가.
자기가 가진 기교에 비해 바람이 너무나 거세고 크다.
저래서야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백정의 칼질과 다를 바 없었다.
“누구에게 검을 겨누려느냐, 그걸 바르게 보는 것부터다.”
목소리에 정심한 공력을 담았다.
소림의 것과는 수준도 깊이도 떨어지지만, 흔들리는 정신을 되잡게 하기엔 충분했다.
“……!”
가늘어지던 주백경의 두 눈이 반개했다. 오롯이 보았다.
천하에 분별없이 휘둘러지는 검.
과도한 공력을 흩뿌려, 정제되지 않은 채 흔들리는 검기.
까득.
주백경은 어금니를 꽉 짓씹었다.
무분별하게 휘두르는 검을 하나로 모을 심상을 그렸다.
전심으로 세운 마음의 정경, 천주(天柱).
열흘 동안 구박받으며 수련한 과정을 상단전에 기거시키는 순간.
서문경이 불쑥 물었다.
“적은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
단둘뿐인 공간에 적이 있을 리가 없다.
평소였다면 갑자기 노승 흉내냐고 웃어넘겼을 말이었다.
하지만 주백경은 망연히 허공을 보았다.
“……하아.”
숨을 내뱉고는 휘몰아치는 칼바람을 모았다.
천주로 내리쳐 정제했다.
그러다 문득 답을 알고 말았다.
“적은 주제도 모르고 큰 칼을 휘두르고 했던 오만이요, 안일한 정신에 있었습니다.”
“……그래.”
서문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투력(鬪力)은 갖췄구나.”
비로소 싸우는 힘을 갖출 줄 안다.
바둑의 세 번째 단계를 이르는 말이다.
서문검법의 검형을 따라 움직이던 주백경이 힘을 다루고 흐름을 보기 시작하였으니.
콰가각!
좌에서 우로, 칼바람이 일선을 따라 움직였다.
주백경은 서풍광아에 그치지 않고 단숨에 휘둘렀다.
“청운적하(靑雲赤霞)라.”
흔들리던 나뭇잎이 결을 따라 쪼개졌다.
두 조각으로 쪼개지는 길을 따라서 석양이 비쳤다.
구름이 붉게 물들었다.
주백경이 검을 늘어뜨리고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제가 석양으로 물들인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그냥 시간이 흘렀으니 자연히 붉어진 거지.”
“그렇지요. 그랬겠지요.”
주백경이 맥없이 웃었다.
과도한 공력을 한꺼번에 쏟아 낸 여파가 피로로 찾아왔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정광이 가득했다.
손끝에 닿을 듯하던 곳에 도달했다는 만족감.
지금보다 더욱 높은 곳이 있다는 감사함과 향상심.
군인보다는 무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검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의무보다는 희열이 있었다.
서문경은 그걸 알고도 나무라지 않았다.
‘앞으로 나타날 적은 의무감으로만 싸우기엔 너무 강하고 독하니까…….’
당장 옥화혈사만 하더라도 어디 보통 독심이던가?
옥화산에서 죽은 수십이 문제가 아니라, 강서무림의 골목에 무림인의 시체가 득실할 사건이었다.
강서무림의 유대를 쪼개고 서로 증오하게 만들려는 악의.
그걸 막은 대가는 무척 달콤했다.
“이제 좀 옆에 둘 만하네.”
“겨우 그겁니까? 남들이 보면 저도 고수입니다.”
“그깟 검기 좀 휘두르는 게 무슨 대수라고. 아직 멀었어. 조금만 나태해지기만 해 봐.”
“하하…… 그래도 공자님이 왜 심상 수련을 시켰는지는 알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으니까 시켰지. 설마 의심했냐?”
“전혀! 아닙니다.”
서문경은 주백경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현 위치는 중경의 서편(西偏).
“벌써 절반 가까이 왔네?”
그 말에 주백경이 질색하며 대꾸했다.
“아직도 절반을…….”
“사람이 그렇게 부정적이면 쓰나.”
서문세가에서 출발한 지 십구 일째.
천무학관의 입관식까지 사십 일이나 남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