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심경 (2)
휘이이──.
동혈 안쪽에서 불어오는 선선하고 잔잔한 바람.
서문경은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탁, 탁.
바람이 벽에 부딪혀서 울리는 소음.
스르륵…….
솜털을 간질이는 바람의 장난질이라.
그것으로 두 가지를 알아냈다.
‘동굴이 제법 넓고 깊구나. 또, 아까 우리를 밀었던 칼바람은…… 고여 있던 바람이 갑자기 빠져나와서 생긴 거야.’
흙으로 덧칠해서 바른 가짜 절벽.
그걸 부수는 순간 고여 있던 바람이 단숨에 바깥의 사람을 밀어낸다.
살의가 짙게 깔린 함정이었다.
‘여기서 끝난다면 혈사라는 말이 붙지 않았겠지. 뭔가 석연치 않아.’
서문경은 감았던 눈을 떴다.
단순히 비석과 함께 기연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간단치가 않았다.
“주 무사는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안쪽을 둘러보고 올 테니까.”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자신을 살리려고 한 호위.
주백경을 혈사의 중심지까지 끌어들일 순 없었다.
여기에 두고서 가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도.
“공자님, 함께 가겠습니다.”
“괜한 억지를…….”
“저를 한 번 살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제 일이 원래 순탄치 않은 법이지요.”
주백경이 억지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덮어 준 모포가 주백경의 몸에서 스르르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은 기가 차서 쏘아붙였다.
걱정이 은연중에 담겼다.
“그 몸으로 어딜 따라와? 짐만 되느니 가만히 누워서 쉬는 게 도움이야.”
“하지만…….”
“밧줄로 날 살렸잖아. 빚은 없앤 셈 치자고.”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모포를 붙잡았다.
일어날 엄두도 내지 말라는 듯.
주백경의 머리 위까지 완전히 덮어씌웠다.
“더 억지 부리면 항명이야.”
“……알겠습니다. 혹여 누가 들어온다면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그거면 됐으니까 적당히 누워 있어.”
서늘하긴 해도 물기가 없어서 상처가 곯진 않으리라.
서문경은 주백경이 눕는 걸 확인하고는 안쪽으로 걸어갔다.
통로 곳곳을 살폈다.
‘인위적인데.’
첫인상이 그러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생긴 동혈이라면 종유석이나 석순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사람의 손을 거쳤다.
평탄한 바닥,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안쪽으로 향할수록 넓어지는 공간.
서문경은 손가락으로 벽을 훑었다.
스윽.
돌가루가 많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수분도 없다시피 했다.
‘사람이 깎았네. 게다가…….’
저벅, 저벅…….
안쪽으로 향하는 동안 걸음 소리가 점차 커진다.
바깥에서 본 옥화산의 크기가 작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동혈을 만든 새끼는 정상이 아니야. 아주 뚝심 있는 병신이거나 변태겠지.’
단단하고 물기 없는 돌을 두부처럼 자르고 바닥까지 평탄하게 만들 정도로 꼼꼼하다.
하물며 통로를 점차 크게 깎았다는 건…… 옥화산 내부에 무언가 큰 공간을 조성했다는 의미다.
“거의 다람쥐구만.”
나무에 굴을 파놓는 거나 옥화산에 함정까지 파놓고 이 짓거리를 하나 다를 게 없었다.
서문경은 얼굴 모를 무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긴장은 놓지 않았다.
앞으로 삼 년 뒤, 혈사가 벌어질 곳이니까.
다만 이딴 곳에 비석이나 비급을 남기는 풍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길 게 있으면 대충 집구석에 두지 왜 이런 오지에 굴까지 파 가면서 두는지 모르겠네.”
확실한 건 여길 만든 놈은 심보가 못되어 처먹은 사람일 것이다.
입구의 함정도 꼴에 ‘시험’이랍시고 낄낄대면서 만들었을 테니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걷다 보니 거대한 공동에 다다랐다.
“오…… 변태 쪽이었나 본데?”
얼굴 없는 부처.
양반다리로 앉은 채 시무외인을 쥐고 있는 거대 석상이 중앙에 있었다.
그토록 볼품없던 옥화산 중앙에 이러한 석상이 존재할 줄이야.
천정의 송송 뚫린 구멍에서 햇빛이 부처의 옷과 얼굴, 다리를 비춘다.
심지어 조각하는 칼로 만든 구조물이 아니었다.
“변태긴 해도 실력이 뛰어났구먼.”
서문경은 감탄성을 흘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장검으로 다듬은 흔적이 보였다.
비효율의 극치라고 봐도 무방했다.
세세한 음각이나 양각을 표현하기엔 검신이 길고 칼날이 금방 닳아지니까.
한데 그 단점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석상을 깎은 손길이 호방했다.
‘한 번에 한 번씩 칼에 심의를 담아서 그었구나. 그 과정에서 피부나 얼굴, 장삼을 간결하게 표현했어.’
군문의 무공을 배운 서문경으로선 흉내 낼 수 없는 형태.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만 휘두르는 게 아니라, 자기의 무공을 완성하기 위한 검은 여전히 어색하고 거북했다.
‘자기 심상과 검을 완성하기 위해 부처를 깎은 건가?’
얼굴이 없는 이유는 공동을 둘러보면 알 수 있을 터.
서문경은 천천히 석상 주위를 거닐었다.
부처 석상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룬 고인 물.
물가에 둥둥 떠다니는 연꽃 조각에서 풀잎 향이 났다.
“생각보다 온건하네?”
혈사를 일으켰다기에 흉악한 함정이나 표식이 가득할 줄 알았건만.
긴장감이 살짝 풀리려는 것을 억지로 다잡았다.
그렇게 고인 물을 따라 한 바퀴를 쭉 걷다 보니 작은 비석이 보였다.
“저게 옥화혈사를 일으킨 비석인가?”
전생에 듣기로 저 비석에서 시작된 기연을 무림인 수십 명이 다투었다고.
서문경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안법을 운용했다.
고인입아몽(故人入我夢)
명아장상억(明我長相憶)
군금재귀토(君今在歸土)
하이유우익(何以有羽翼)
그대가 내 꿈에 나타난 것을 보니
내 그대를 길이 못 잊음이 분명해
임께서는 흙으로 돌아갔는데
어찌해 날개를 펼치고 오셨다지
두보의 시를 그대로 인용한 글귀.
두어 글자를 바꾼 걸 제외하면 완전히 똑같았다.
‘중간만 베낀 걸 보니 의미만 적당히 빌렸어. 시를 제대로 배운 고수는 아니야.’
이래서 못 배운 무림인이란.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안법에 더욱 집중했다.
글귀보다는 외형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음?”
어딘가 이상하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 인상이 찡그려졌다.
부처 석상과 비석.
그 둘을 번갈아 보니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같은 사람이 만든 게 아닌데?”
장검으로 간결하게 깎은 석상에 비해 비석은 석공(石工)이 만든 것이 확실했다.
서문세가의 소가주로 오래 있었기에 그 차이를 알았다.
‘게다가 비석에 끼얹어진 저건…… 산(酸)인가?’
석상과 비석의 차이.
위화감을 없애기 위한 장치겠지.
서문경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날뛰려는 마음을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 다스린다.
어렵고 비참하던 시기에 구축한 정신 무장이었다.
‘누군가가 여길 조기에 발견해서 혈사가 일어나게끔 의도한 거겠지.’
보고 유추한 것을 짧게 요약했다.
이곳에 기연이 있다고 한들 석상을 세운 고수의 안배가 아닌, 혈사를 일으키려고 하는 잡배의 소행일 가능성이 커졌다.
“……애석하네.”
서문경은 부처 석상을 세운 고수가 안쓰러워졌다.
비록 무도(武道)의 방향성은 다르지만, 존중할 가치가 있었다.
가능하면 그가 남긴 기록을 보고 심상 수련이라는 것에 입문하고 싶었다.
한데 이를 어쩌나.
‘여기서 강서 무림의 반목이 벌어질 거라고 상상했을까?’
옥화혈사에서 죽은 무인이 수십에서 백.
그들이 속한 문파가 서로 원한을 가지고서 검을 겨눴다.
온건하던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거야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때 당시엔 무림의 일이라고 무시했지만, 이런 내막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무너뜨려야겠어.”
보나 마나 마교가 암중에서 벌인 일일 터.
비석이 무슨 함정인지는 몰라도 부수면 혈사가 벌어질 일이 없다.
아예 석상까지 부숴서 공터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서문경이 부처 석상을 향해 합장했다.
‘사정이 있으니 저승에서 보고 있거든 헤아려 주시오.’
적어도 자기가 남긴 안배가 악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서문경은 가장 먼저 비석을 부쉈다.
쩌저적……!
분진이 일어나며 큰 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작은 비석이라곤 하나 부수기가 제법 힘겨웠다.
“……후우.”
언제 석상까지 부수나.
얼굴 없는 부처를 노려보는데, 어느새 체력을 회복했는지 주백경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오냐. 왜?”
“굉음이 들려서 혹시 함정에 빠지셨나 했습니다. 그나저나…….”
주백경이 공동을 한차례 둘러보며 눈을 반짝였다.
“산을 파서 이런 걸 만들다니,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음.”
“부처의 얼굴이 없는 것이 흠이지만 의도한 것이겠지요.”
“아, 저거 말이지.”
저 멋진 석상을 부숴야 한다고 말할 적기를 놓쳤다.
서문경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주백경이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부처의 두 다리 사이에 뭐가 반짝이지 않습니까?”
“……!”
정말로 주백경이 말한 위치에 상자가 하나 있었다.
서문경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래, 낚시할 때도 미끼가 필요하듯이…… 혈사로 위장하려면 적어도 기연이 있는 곳이라고 믿게 만들어야지!’
이른바, 떡밥.
혈사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무림인 수십 명이 죽을 정도라면 뭐가 있었을 것이다.
“일단 물건부터 챙기자.”
혈사가 일어나기 너무 이른 시점.
잿밥을 뿌리기 전에 집안 살림까지 모조리 수탈하리라.
서문경은 자기도 모르게 음흉하게 웃었다.
* * *
“……이게 무슨.”
흑의인은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주 개 박살이 났다.
“겨우, 겨우 반나절 만에 대체…….”
무림인을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명약과 영약, 비급?
텅 빈 상자만 남았고 알맹이는 모두 사라졌다.
무림인을 미혹시키기 위해 남긴 석상과 비석?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풍비박산이 났다.
밧줄 같은 걸로 벽을 때린 자국도 남아 있었다.
그로 인해 벽 뒤의 비밀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까지 열려 있었다.
“전부 털렸다……?”
아직 배치하지 않은 물건까지 빼앗긴 것이다.
흑의인은 공허한 눈으로 공동을 두리번거렸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의를 이루기는커녕 남 좋은 일만 벌인 꼴이 아닌가.
사르륵…….
흑의인의 손아귀에 있던 장보도가 흩날렸다.
옥화산의 위치와 시를 해석하기 위한 주석, 구릉 그림까지.
추락사를 꾀하기 위한 지도마저 무의미해졌다.
“대체 어떤 놈이냐……!”
분노가 치솟았다.
어떻게든 발자취를 추적해서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문제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딱 하나 남은 게 있었다.
-잘 먹고 갑니다.
침입자가 남긴 글귀.
그 옆에 자리한 텅 빈 상자들.
누가 봐도 조롱이었다.
“크으으……!”
눈이 뒤집힌 흑의인이 마기를 절제하지 못하고 흩뿌렸다.
자칫 잘못하면 골수까지 파먹힐 지경이었으나 오랜 고생이 물거품이 된 순간을 버티질 못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석상 파편으로 향했다.
‘저게 뭐지?’
부서진 석상의 머리 파편.
그 안쪽이 묘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급하게 지운 것처럼.
흑의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게 아니었나?’
처음 발견했을 때 이 공동에는 어떠한 비급이나 영약도 없었다.
그저 얼굴 없는 부처 석상만이 존재했다.
따라서, 이곳을 혈사의 중심지로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얼굴 안쪽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을 줄이야! 오판이었다! 마기를 수습하고 적마(赤魔)께 알려야……!’
하지만 주화입마를 막기엔 너무 늦었다.
털썩!
제자리에서 쓰러진 흑의인의 칠공에서 핏물이 흘렀다.
* * *
“몸은 괜찮냐?”
“예, 몸보신 제대로 했습니다.”
“하긴, 까먹은 약이 몇 개인데.”
서문경이 흡족하게 웃으니 주백경도 배시시 웃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재미 들인다는 말이 진짜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허! 내가 뭐라고 했지?”
“아, 미래에 일어날 혈사를 막은 거라고 했지요.”
“그래. 그거야.”
당연하지만, 주백경은 쥐뿔도 믿지 않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