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심경 (1)
옥화산(玉化山).
깎아지른 절벽에 자라다 만 나무만이 듬성듬성하니.
못생기고 투박하다.
하물며 웅장함마저 바랄 수 없었다.
산맥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구릉이 지대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괜히 이름에 옥 같다는 말이 붙은 게 아니군요.”
옥 같다가 욕처럼 들렸다면, 그게 정확하다.
어깨에 밧줄을 두른 주백경은 서문경의 눈치를 슬쩍 봤다.
실망감에 가득한 얼굴을 보긴 싫었다.
그런데 웬걸?
“도관(道觀) 하나 없을 정도면…… 왕래하는 사람도 없겠지.”
말과 비교해 표정이 무척 밝았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설마, 또 괴롭히시려고?’
이곳까지 오는 데 일주일.
그동안 얻어맞은 정강이와 허벅지에 피멍이 가득했다.
주백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공자님, 산행 말고 다른 용무가 있는 겁니까?”
“단순히 오를 생각이면 더 좋은 산을 골랐겠지.”
“……아.”
조짐이 심상치 않다.
검치에게 불쑥 찾아갔듯, 뭔가 사달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렇게 주백경이 불안함을 느낀 반면.
“뭐 해, 빨리 안 따라오고?”
서문경은 뒷짐까지 진 채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초목이 발아하는 봄.
들꽃이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계절임에도 옥화산의 풍경은 외롭고 쓸쓸했다.
‘나무가 크게 자랄 토양도 부족한 데다 주변에 물길도 없으니.’
새 소리조차 뜨문뜨문하다.
산짐승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곳에 물건을 남겼다면 ‘연자를 위해서’ 같은 낭만적인 이유는 아닐 터.
하물며 혈사가 벌어진 장소 아닌가?
서문경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걸었다.
큼직한 돌의 위치와 방위, 나무의 길을 머릿속에 새겼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주백경이 물었다.
“주변에 뭐가 있는 겁니까?”
“혹시 모르잖아, 고수가 남긴 비석이 있을지도.”
“……크흠, 흠.”
주백경이 웃음을 애써 참는 소리에 서문경은 속으로 웃었다.
진짜로 비석과 마주하게 되면 기절초풍할 테니까.
황량한 산세를 오르며 무덤덤해진 속내에 기대감이 싹튼다.
공력까지 운용해서 옥화산의 상부를 둘러보다가 절벽에 다가갔다.
무공사전은 어깨에 멘 봇짐에 집어넣었다.
텁.
절벽에 매달려서 탐색하다 보니 비골근과 삼각근이 꽉 조였다.
‘이거 좋네.’
안 그래도 아직 체구가 작고 근육이 약해서 번천광검결의 광결을 펼치는 게 불가능했는데, 이렇게 단련하게 될 줄이야.
기연을 찾는다고 발광하는 무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물론 그 마음을 주백경이 이해할 리 없다.
“공자님! 위험합니다!”
“주 무사는 위쪽을 탐색해! 이것도 동공 수련이야!”
“……저도요?”
“어!”
“예에……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목소리를 대충 흘려 넘겼다.
명색이 서문세가의 무사인데 이런 곳에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밧줄도 가지고 있지 않나.
“수련이니까, 동공 운행 잊지 말고!”
“……예.”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면 착각일까?
잘못 들었을 것이다.
나이도 약관 넘게 먹은 무사가 절벽 좀 타는 걸 무서워할 리가 없다.
‘그나저나 나이가 몇이더라.’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나이대만 대충 알 뿐.
서문경은 자신의 부덕함을 깨달았다.
“주 무사! 올해 나이가 몇이었지?”
“마, 말 걸지 마십시오!”
주백경의 다급한 외침에 서문경이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혹시 아래 보고 있나?”
“아흐, 아닙니다!”
“그냥 온몸에 힘을 풀지 않는 이상 떨어질 일은 없어. 괜히 긴장하지 말고…….”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투둑.
머리 위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발로 어딘가를 헛디딘 듯했다.
‘이러다 사고 나는 거 아니야?’
진심으로 걱정스러워지던 차에 주백경이 재차 외쳤다.
“진짜 괜찮습니다!”
“급할 필요 없으니까 천천히 움직여. 높은 곳을 극복하는 수련이라고 생각해. 밧줄 가지고 있는 거 잊지 말고.”
말은 느긋하게 했지만, 손발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백경이 지치기 전에 빨리 탐색하는 게 나을 테니까.
파박, 팍!
자소단을 복용한 덕분에 공력의 수발이 자유로웠다.
발가락의 세맥까지 깊숙이 닿았다.
그 힘으로 절벽에 발길질해서 한마디씩 박아 넣었다.
그렇게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후우…….”
숨을 깊게 고르며 공력을 순행시킨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음보를 그렸다.
일정한 가락에 맞춰서 중단전을 운용하여 흐름을 만드니.
용천혈을 자극하지 않아도 동공의 지극한 운행이 가능했다.
서문경은 시야를 넓게 잡았다.
절벽 전체를 눈동자에 담았다.
‘가 볼까.’
까드득……!
능선을 따라서 상하로, 좌우로,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을 중심으로 거침없이 움직였다.
“허어.”
주백경이 공포심조차 잊고서 감탄했다.
서문경의 손과 발끝마다 엉킨 공력의 실이 햇빛에 조금씩 반짝였다.
“저렇게 적은 양의 내공을 저리 효율적으로…… 밧줄처럼.”
내관혈과 곤륜혈의 흐름이 놀라울 정도로 능통하다.
주백경이 그 방식을 엿보고서 움직이기 시작하던 그때.
서문경은 고개를 들었다.
‘저건 뭐지?’
절벽의 상부.
바위와 비슷한 염료를 뒤섞어 만든 흙덩이가 보였다.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전생에서 비슷한 걸 만들어 본 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목표 지점을 본 서문경은 곧바로 의심했다.
‘함정이 있겠지.’
단순히 숨기기만 했다면 왜 혈사가 일어났겠나?
하물며 인적이 드문 옥화산에 무림인이 모여들었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터.
까득, 툭.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발끝을 한 마디가 아니라 두 마디씩 절벽에 발길질하며 주변을 살폈다.
“주 무사! 이쪽이야!”
“예!”
아까처럼 어수룩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서문경은 주백경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위로 향했다.
“위험해지면, 알지?”
“물론이지요.”
“먼저 간다.”
그 말에 주백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이라도 선두에 서겠다는 허세는 부리지 않았다.
공발의 수발부터 시작해서 절벽을 오르는 솜씨까지, 어딜 봐도 서문경이 압도적이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그래.”
서문경은 긴장 어린 기색으로 흙덩이를 쥐었다.
우직!
쥐는 순간 흙이 가루로 흩어졌다.
손아귀가 텅 비면서 균형이 무너질 뻔한 것을, 주백경이 왼팔로 허리를 붙잡았다.
“흙덩이가 무른 겁니까?”
“……말라비틀어져 있어.”
서문경은 가루가 흩어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물기 하나 없는 흙더미, 손바닥을 간지럽히던…… 바람.
가루가 흩어지는 찰나 동안 피부에 바람이 스쳤었다.
“한 가지 확인할 건데, 주 무사. 깜짝 놀라지 말고 잘 대처해.”
“……예.”
주백경이 절벽에 완전히 착 달라붙자, 서문경이 주먹을 쥐었다.
감자만 한 주먹에 삼성(三成)의 공력을 담아서, 있는 힘껏 흙덩이를 내리쳤다.
쩌저적!
절벽을 위장하고 있던 흙더미가 뭉개졌다.
쪼개지는 것도 부서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휘이이이――!
한순간 들이닥친 칼바람에 서문경과 주백경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특히 주백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절벽에 발을 걸어 두고 있는 것 정도로 견딜 수 없었다.
서문경은 혈사의 정체를 깨달았다.
‘여기가 옥화혈사의 시작이구나!’
앞으로 일 년 뒤.
인적 없는 옥화산에 무림인이 하나둘씩 행방이 묘연해지니, 자연스레 몰려들었을 터.
이 바람을 극복했더라도 기연 때문에 싸웠을 것이다.
내막을 알아차린 서문경이 현실을 직시했다.
‘선천진기까지 끌어서 경공술을 쓰면 되지만…… 일주일은 정양해야겠지.’
앞으로 두 달.
그 안에 정기신을 정심히 단련하고 천무학관에 도착한다는 계획이 어그러질 게 뻔했다.
하지만 이곳의 기연이 그 시간을 단축해 줄지도 모르는 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하던 차였다.
“공자님!”
주백경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뒤로 밀려 나가는 공포 속에서 밧줄을 자신에게 내밀고 있었다.
“붙잡으십시오!”
절벽에 처음 매달릴 때만 하더라도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주백경이 지금, 용기를 냈다.
서문경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방법이 있는 거야?”
“얼른!”
눈가에 핏발이 선 주백경.
무언가를 단단히 각오한 얼굴이었다.
자기가 죽더라도 서문경만큼은 구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물론, 서문경은 주백경을 희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좋아.”
하지만 믿기로 하였다.
꽈악!
밧줄을 붙잡는 순간에 마음이 통하는 바가 있었다.
주백경의 시선과 공력의 운용, 삼각근이 움직이는 방향.
세 가지 단서가 한 가지 의도를 빚었다.
“……어디 해 보자고.”
서문경은 절벽에 꽂은 발을 뗐다.
순식간에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 와중에 살이 타는 냄새가 인중을 스쳤다.
서문경의 시선이 저절로 위로 향했다.
주백경이 붙잡은 밧줄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끄으윽!”
주백경은 쓰라린 비명을 내질렀다.
손바닥이 찢어지고 팔뚝에 피멍이 번졌다.
추락하는 서문경을 밧줄로 지탱한 대가.
극심한 화상과 힘줄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견디고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밧줄을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멈출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크윽.”
추락하는 힘을 반대로 되돌리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주백경의 입가가 폐부에서 올라온 울혈로 젖었다.
스물세 살.
무공을 익히면서 쌓은 근력과 내공을 모두 손아귀에 담았다.
뚜둑, 뚝.
새끼줄이 하나둘씩 끊어지기 직전에야 주백경이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끄아아아……!”
주백경의 전심전력이 통했던 걸까?
서문경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전신이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주백경이 만든 용기이고 기회였다.
‘바로 지금, 안쪽으로 가야 해.’
번천광검결의 두 번째 초식인 천결(天訣).
중단전을 쥐어짜 만든 두 호흡으로 기교를 부렸다.
휘르륵!
밧줄을 칼처럼 휘둘러 만든 바람의 막을 계단으로 삼아서, 일보.
흙덩이 안쪽의 동혈로 가기 위해 몸을 비틀며 방향을 잡았다.
여기까지가 두 호흡이다.
쿠웅!
서문경은 흙더미 안쪽의 동혈에 안착하고서 밧줄을 쥐었다.
이제는 주백경을 챙길 차례였건만.
“공자님, 저는…… 괜찮습니다.”
애써 웃어 보이는 주백경의 안색엔 체념이 가득했다.
가까스로 밧줄을 쥐고 있긴 하지만 힘이 안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물며.
‘끌어당긴다고 될까?’
밧줄을 무리하게 쓴 탓에 새끼줄이 너덜거렸다.
힘으로만 끌어당기면 그대로 끊어질 터.
주백경의 죽음이 경각이었다.
‘검치가 펼친 번결의 일 할이라도…… 따라 할 수 있다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서문경은 왼손을 뒤로 뻗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봇짐 안쪽에 있던 무공사전이 손아귀에 잡혔다.
그렇게 정체 모를 요물을 강하게 붙잡았다.
관존으로서 쌓은 무학과 본래 가지고 있던 오성(悟性).
그것이 무공사전에 몰려드는 감각이 들었다.
번천광검결의 가르침이 일순 상단전을 스쳤다.
-똑바로 보아라, 번결(翻訣)이다.
검치가 손도 대지 않은 채 펼쳤던 일검.
두 눈에 담았던 상승의 일검을 심상에 떠올렸다.
그것을 통째로 집어삼켜서 변형했다.
“……이것이 번결.”
머릿속이 텅 비어 가는 감각.
무리하게 펼친 상승 검보가 정신력을 먹어치웠다.
밧줄을 저도 모르게 놓아 버릴 정도였다.
그걸 보고도 다행이라는 듯, 웃어 버리는 주백경.
그를 저대로 떨어지게 둘 순 없었다.
“가서, 잡아와.”
상단전의 의념이 움직였다.
인당혈에서 불이 나는 듯했다.
휘르륵!
밧줄이 움직였지만, 정작 서문경은 볼 수가 없었다.
무리하게 상단전을 운용한 탓에 시야가 흐릿했다.
절벽과 하늘, 주백경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
그러나 심상은 견고했다.
심상을 유지하는 의념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
‘나의 번결은.’
검치처럼 검에 한정하지 않는다.
펼치고자 한다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휘두르겠다.
마치 천마가 그러했듯.
그놈이 가능하다면, 자신 또한.
꽈아악……!
밧줄이 순식간에 주백경을 옭아매고서 서문경 옆에 내팽개쳤다.
“쿨럭!”
주백경이 피를 토하긴 했지만,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됐다!”
서문경은 희미하게 웃었다.
피로감이 두 눈을 짓눌렀지만, 함정에 당한 분노가 기력을 억지로 되살렸다.
“어떤 썩을 놈이 이런 곳을 만들었는지 봐야겠어.”
“끄으으.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방금 건 대체…….”
“……미안하다. 너부터 챙겨야 했는데.”
주백경을 바람이 약한 곳에 반듯이 눕히고서 내상약을 먹이고 금창약을 발랐다.
내상과 외상 모두 심해서 일주일은 꼬박 정양해야 할 상태였다.
“이렇게 험한 짓을 해 놓고 명약 하나 없진 않겠지.”
주백경에게 모포 한 장을 덮어 주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정을 돌파했으니 기연을 탐색할 차례였다.
서문경은 동혈 안쪽을 노려보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