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치 (7)
그날 이후 일주일.
서문경은 주백경과 함께 온종일 걷고 쉬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자소단의 영기를 완전히 전신에 녹여 갔다.
“스읍…… 후우.”
한 걸음을 내딛고서 숙하게 내쉬는 호흡.
서문심법의 동공(動功) 구결이었다.
구파의 좌선좌공보다 한없이 느리고 불순물 가득한 축기지만, 일장일단이 있었다.
‘세맥을 더욱 강건하게 가꿀 수 있을뿐더러, 중단전의 발달이 크지.’
한 호흡에 세 목숨을 취하려면 그만큼 공력의 수발과 세맥이 유연해야 한다.
하물며 전장에서 싸우기 위해선 강한 심장이 필요한 법.
동공의 장점은 어지러운 싸움에서 빛을 발하니.
마교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주 무사도 동공을 게을리하지 말고 걸어.”
“하지만 공자님, 이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주백경이 걱정스럽단 얼굴로 말했다.
“항시 동공 구결을 염하며 걸으면 호북성까지 가는 데 반년은 걸릴 겁니다. 남은 시간은 두 달이고요.”
“못 갈 거 같아?”
“걸을 때마다 동공을 펼쳐야 한다면…… 악!”
쩌억!
말하느라 동공에 집중을 못 하기에 주백경의 정강이를 후려 깠다.
눈동자에 잠시 분노가 솟구쳤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왜 때리십니까?”
“호흡이 미진했잖아.”
“말하는 도중에 동공을 행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서문경은 주백경을 원숭이 보듯 쳐다봤다.
“내가 하잖아.”
주백경이 서문경의 가슴팍과 염천혈을 흘낏 보았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호흡.
그 호흡에 뒤섞인 공력이 신체의 양극단인 용천혈과 백회혈을 왕래하고 있다.
운행에 여유를 두어 세맥에도 흘러가게 하는 솜씨까지!
……따라 할 자신이 없어서,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어렵습니다.”
“어려워도 해야지. 구파가 앉아서 내공을 쌓는 만큼 따라잡아야 할 거 아니야.”
“……끄응.”
주백경이 얻어맞은 정강이를 매만지곤 다시 동공의 구결을 따라 걷고 숨 쉬었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은 속으로 빙긋 웃었다.
‘역시 호위를 잘 골랐어.’
나이를 따지거나 엉큼한 생각을 품은 고수보단 솔직하게 말하고 받아들이는 주백경이 낫다.
부족한 실력은 키워 주면 그만.
언젠가 서문세가의 대스승이 되어 주길 바라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엄격하게 몰아쳤다.
“나중엔 달리면서도 해야 해.”
“이제 요령이라도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간절함으로 젖은 목소리.
일주일 동안 함께 걸으면서 주백경도 깨달은 것이다.
어떤 말로도 자신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동공 구결을 간결하게 바꿀 방법을 쥐고 있단 사실 역시.
‘일주일이나 걸린 게 좀 그렇지만, 뭐.’
이만하면 동공의 기본에 숙달했을 테니까.
서문경은 흐뭇한 미소를 빼물었다.
일주일이나 고생하면서 못하겠다거나 안 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기꺼웠다.
마치 싹수 있는 손자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
눈을 마주친 주백경이 기겁했다.
“뭐, 뭡니까?”
“우리 주 무사한테 근기(根氣)가 있어서 그렇지.”
“보통은 제가 공자님한테 할 말이지 않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주백경이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배워야 할 때였다.
“어찌하면 공자님처럼 걸으면서 쌓을 수 있습니까?”
“그 생각 자체가 들려 먹은 거야.”
“……어디서부터입니까?”
“걸으면서(動) 쌓는다(功). 두 글자로 구분해선 안 돼. 좌선좌공이 호흡하면서 불순물을 거르고 쌓듯. 동공 구결의 운행 또한 동시에 이루어져야지.”
스으읍…….
서문경은 호흡을 크게 들였다.
자연히 가슴팍이 위로 봉긋 솟았다.
넓어진 흉곽의 통로.
그 길을 따라 불순물 가득한 자연기가 전신으로 퍼진다.
강한 심장이 대맥에 압력을 덧붙여서 생기는 현상.
“여기까지는…….”
자기와 다를 바 없다.
주백경이 뭐라고 말을 웅얼거리려는 때쯤.
저벅.
서문경의 발바닥이 대지를 두드렸다.
“왠지…… 평범하게 걷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
주백경이 궁리하던 차에, 서문경이 요결을 논했다.
“용천혈, 비골근, 중단전.”
“……아!”
요결을 들은 주백경이 단번에 이론을 꿰뚫었다.
서문심법의 동공 구결이 새롭게 보였다.
“이, 이건…… 서문심법의 재발견입니다!”
자연기를 비골근에서 용천혈까지 낮추고서, 일보.
대지를 강하게 두들겨서 용천혈의 자연기를 상승시킨다.
힘이 부족하면 중단전의 압력으로 메꿔서 백회까지 차올린다.
이 과정에서 기운이 미약하게 새어도 세맥으로 기울 뿐이니.
걸음을 계속한다.
처음엔 정순하지 못하겠지만, 순환할수록 깨끗해지기 마련.
좌선좌공에 비해 손색이야 있어도 강점이 너무 컸다.
“이러니까 공자님께서 지치지 않으셨군요!”
그 어떤 신공보다 중단전을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
주백경은 연거푸 경악했다.
겨우 열네 살 먹은 서문경이 할 수 있는 발상이 아니었다.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이걸 왜 가주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겁니까? 서문세가가 앞으로 훨씬 강해질 텐데요?”
“……그건.”
서문경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진실을 토로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다.
‘서문세가에 마교의 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다.
천무학관을 하루아침에 몰살한 놈들이 군문이라고 방치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명색이 내 호위인데, 먼저 챙겨야지.”
별생각 없이 둘러댔는데 주백경이 감격에 젖었다.
“공자님……!”
“숙달하면 달려도 동공을 유지할 수 있을 거야.”
“정말로 따라 나오길 잘했습니다! 평생 충정을 바치겠습니다!”
“아버지가 들으면 어쩌려고?”
“전 일공자님의 호위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답하지요!”
주백경이 자기 가슴을 쿵쿵 쳤다.
서문경도 뿌듯한 마음이었다.
‘뭐, 사실 기연이긴 하지. 나도 이립이 되어서야 발견한 거니까.’
독특한 발상으로 서문심법을 진화시킨 셈.
이처럼 서문검법이나 창법, 보신경까지 발전시킬 작정이었다.
꽈악……!
항상 왼손에 쥐고 있는 신비한 무공사전을 이용해서.
서문경은 책장을 펼치기 전에 주백경을 흘낏 곁눈질했다.
“후우, 후우…….”
방금 가르쳐 준 동공의 운행을 연습하고 있는 모습.
서문경은 안심하고 번천광검결이 적힌 책장을 폈다.
[번천광검결]
[번결(翻訣), 천결(天訣), 광결(狂訣)의 초식이 담긴 검보(劍譜). 삼단전의 적공이 일정 경지에 이르러야 진가를 발휘한다.]
[직접 익히거나 책장을 소모하여 즉시 펼칠 수 있다.]
서문경은 두 눈을 부릅떴다.
‘보물이라고?’
일개 호사가의 생각이 아니라, 무공사전의 기록이다.
천하의 수많은 검술 중에서 높은 수위에 있다는 뜻.
검치가 펼쳤던 번결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서문검법에 접목할 만한 초식은 아니었어.’
이기어검이란 결국 비효율의 극치.
내공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으면서 위력이 강한 것도 아니다.
군문의 서문검법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대일의 생사투에서 구명 절초가 될 순 있겠지.’
검치가 철판교를 펼친 채로 구수를 받아쳤듯이.
서문경은 동공을 행하면서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시시때때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칼날이 앞으로 불쑥 튀어 나갔다.
그때마다 삼단전에서 반응이 왔다.
‘번결이 상단전, 천결이 중단전, 광결이 하단전인가.’
공력의 움직임을 읽으며 요결을 파악해 가니.
무공사전의 주인이 되면서 부쩍 높아진 오성도 한몫했다.
번천광검결을 파고드는 재미가 쏠쏠했다.
‘천결은 두 호흡을 중단전으로 끌어서 쓰는 광검(光劍)이요, 광결은 하단전을 쉼 없이 두들겨 펼치는 연환 속검이라!’
왜 삼단전의 적공이 일정 경지에 올라야 하는지 깨달았다.
미숙한 무인이 펼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양명성이 검치에게 허락을 구한 이유이기도 했다.
‘말이 검보지, 삼단전을 깎아 내듯 쓰는 검술이구나.’
오한이 등줄기를 훑었다.
삼단전을 충분히 단련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지거나, 심장이 멈추거나, 하단전이 부서진다.
초절정고수가 아니면 펼칠 수 없기에 상승 무공이다.
심지어…….
‘나도 번결은 펼칠 수 없겠어.’
검치가 아침부터 심상 수련을 한 건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심상을 무공의 형태로 깎아서, 의념으로 빌려 오는 것이 바로 번결.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공 주제에 난해한 면이 있었다.
‘광결은 시간문제고. 지금 당장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건 천결 정도인가.’
동공 구결로 단련한 중단전이라면 가능하다.
게다가 천결에는 서문검법에 덧붙일 실마리도 존재했다.
‘이초, 일검적심의 찌르기에 천결을 접목하면…… 흐음.’
서문경은 일정한 속도로 걸으며 궁리했다.
그렇게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져서 야영할 시간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이제 쉴까?”
“……으하!”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터졌다.
완전히 지쳤다는 듯 주백경이 한 손을 내저었다.
척 보니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얼마나 노력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잘했다.”
“이걸 공자님처럼 딴생각을 품으면서도 가능할 정도로 하란 거죠?”
“그렇지.”
“으휴, 으.”
앓는 소리를 내며 진저리친 주백경이 모닥불을 피웠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야숙이었다.
“근데 공자님은 안 불편하십니까? 훈련을 받은 저조차도 잠을 이루기가 어려운데요.”
“항상 마을을 찾아다닐 수도 없잖아. 적당히 바닥에 뭉개고 자는 거지.”
편한 잠자리만 찾아서야 두 달 안에 천무학관에 도착할 수 없다.
그 말에 주백경이 넉살을 부렸다.
“다른 친구들은 애들 투정 받아 주느라 지긋지긋하다는데, 저는 얼마나 편안한지 모릅니다. 가끔 이해하기 어렵지만 말입니다.”
“그야 편안해야지. 이렇게 무공도 가르쳐 주는 공자님이 있는데.”
“허드렛일하는 보람이 있죠.”
주백경이 눈을 찡긋거렸다.
나쁘지 않았다.
휘어질 줄 모르는 강단만 가졌다간 나중에 큰 화를 입을 테니까.
‘내 호위고, 내 수족이 될 인재인데.’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 서문경은 한 가지를 물었다.
“어디까지 왔지?”
“한 시진 전에 물길을 건넜으니…… 옥화산(玉化山)이 지척입니다.”
옥화산이라는 말에 서문경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하도 지나가듯이 들어서 까먹고 있었구나!’
천마가 무림 정화의 기치를 드러내기 이전.
앞으로 일 년 뒤에 옥화산을 두고 혈사가 벌어졌다.
이른바, 옥화혈사(玉化血史).
옛 고수가 남긴 비석을 두고 기연을 다퉜다고 들었다.
죽은 무인만 수십에서 백.
강서무림에 한동안 피바람이 분 사건이었다.
불운하게도 그 당시에는 폐관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던지라,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지나가기 전에 떠올려서 다행이네. 혈사가 벌어지기 전에 내가 기연을 수습하든, 비석을 때려 부숴야겠어.’
서문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한두 마디 들었던 소식을 떠올린 게 용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길을 바꿔야 했다.
“내일은 산에나 갈까?”
“볼 곳 없는 산입니다. 명승지도 아니고요.”
“첫 강호행이라서 보고 싶은 곳이 많아.”
“……그, 공자님. 두 달 안에 도착하셔야 하는 건 알죠?”
“당연히 알지. 그냥 잠깐 산만 올라가 보는 거야.”
그 말에 주백경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윗사람에게 등산을 강권 당한 표정인지라, 서문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주 무사, 나 애꿎은 고생시키는 사람 아니야! 나 혼자 갔다 올 테니까……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휴우우.”
주백경이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눈동자가 멍하고 어두침침한 것이, 자그마한 원망이 비쳐 보였다.
“따라가야지요. 제가 호위인데요.”
“진담이라니까?”
“이런 식으로 시험하는 건 조금 그렇습니다.”
“아니…… 그, 참. 아니라니까!”
오해가 켜켜이 쌓인다는 게 이런 걸까?
서문경은 밤이 깊을 때까지 주백경과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그쯤 되니 답이 이상하게 나왔다.
“산행이 동공 수련에 그리 큰 도움이 될 줄이야…… 몰랐습니다!”
“그래, 그래.”
이렇게라도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다.
서문경은 옆으로 돌아누우며 옥화산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과연 뭐가 있을까?’
내일이 벌써 기대되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