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치 (6)
“……아.”
검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눈이 부셨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무의 정경(情景).
완벽하게 맞물린 세 초식이 여기까지 몰아넣었다.
변명할 것 없이 깔끔하게. 수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내가 졌다.”
한쪽 눈을 감으며 웃었다.
후련했다.
서문경이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든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다만, 너절하게 쓰러지고 싶진 않았다.
스릉―!
철판교를 펼친 채로 칼을 뽑았다.
균형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은 채 두 다리가 기둥처럼 두터워졌다.
검치는 그 자세에서 보여 주고 싶은 것을 드러냈다.
“똑바로 보아라, 번결(翻訣)이다.”
카앙!
검이 날았다.
단지 그뿐인 일인데, 공력의 실로 움직이는 비검술과는 수준이 달랐다.
서문경의 안법이 허공을 훑었다.
“……이기어검.”
쩌적.
서문경의 구수가 검면에 막혔다.
오한이 등줄기를 훑었다.
‘언제든 이길 수 있었지만, 봐준 거였구나.’
적당히 봐주면서 하겠다는 말을 끝까지 지킨 셈이다.
서문경은 검치가 달리 보였다.
정확하게는 무공사전에 담긴 번천광검결이 얼마나 뛰어난 무학인지 깨달았다.
‘이기어검의 가르침이 담긴 번결과 허공을 격하고 다가왔던 일검 모두 번천광검결에 있겠지.’
여러 생각을 곱씹는 와중에 검치가 ‘읏차’ 소리를 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흡족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야, 그 짧은 사이에 이기어검을 알아챘냐? 대가리 텅 빈 우리 원숭이 새끼랑은 수준이 다르네. 쩝.”
“…….”
그 말에 양명성이 몸을 비틀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부정은 하지 못했다.
천무신동은 괴물이 맞았으니까.
퉁명한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처먹은 나이가 아깝소.”
“뭐야?”
“나야 쟤랑 나이가 비슷하지, 사부는 몇 곱절을 처먹고도 수가 밀려서 칼까지 뽑지 않았소?”
“……허.”
이번에는 검치가 몸을 비틀었다.
당장 뒤통수를 딱 때리고 싶었지만 옳은 소리였다.
소년을 상대로 수가 밀렸다?
몇 해가 지나도 기억날 패배였다.
열패감이 들지 않은 것은 서문경의 궁리가 상식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후우.”
검치가 한숨을 푹 내쉬는 사이, 생각을 정돈한 서문경이 그에게 다가갔다.
“내기는 제가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검치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열하게 웃었다.
“아니, 이것아. 다짜고짜 자기가 기습해 놓고 내기가 뭘 어째?”
“그건 제가…….”
“내가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그렇지, 지금쯤 탕초리척(糖醋里脊 : 탕수육)이 되었어도 안 이상해.”
틀린 소린 아니었다.
검치가 괴팍해서 그렇지, 정당한 말엔 수긍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괴팍하기만 한 고수였다면 지금쯤 주백경은 죽었어야 했다.
그래서 서문경도 어깨를 으쓱이며 강짜를 부렸다.
“선배가 좋게 봐줄 걸 믿었으니까 하지 않았겠습니까?”
“기습을 좋게 봐줘? 날 믿어? 나보다 미친놈이 다 있네.”
‘왜 이럴 때만 상식적으로 받아치지?’
묘하게 굴욕적이었다.
서문경이 주먹을 꽉 쥐고 부들대는 모습에 주백경이 나섰다.
“이보쇼, 선배!”
“점점 말이 짧아지는데, 혀도 짧아지고 싶은 거냐?”
“크흠, 흠. 그래도 내기를 하자고 한 사람은 선배가 아니었습니까? 이대로 덮어 두기엔 선배의 신망이…….”
“내가 신망이 있어 보이냐?”
갑자기 치고 들어온 말에 주백경이 침묵했다.
검치가 ‘신망’과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장본인이 길길이 날뛸 반응이긴 했다.
“에라이 썅, 있다고 해야지!”
“그…… 거짓말은 할 수 없습니다.”
“진짜 더럽게 꽉 막힌 새끼가 다 있네.”
검치가 진심으로 별사람 다 보겠다는 듯, 서문경과 주백경을 훑었다.
자기도 정말 특이한 사람이지만, 이 둘도 뭔가 이상했다.
나이답지 않게 대단한 놈.
마찬가지로 나이답지 않게 꽉 막힌 놈.
저 두 사람이 강호를 주유하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 보였다.
“너흰 진짜…… 내가 할 말은 아닌데, 진짜 미친놈들이다.”
“…….”
“…….”
미친놈에게 미쳤다고 듣는 소감이야 당연히 거지같다.
하지만 미친놈이 지금은 자신보다 더 강하지 않나.
서문경은 속내를 감추고는 억지로 빙긋 웃었다.
“하하, 선배의 충고는 새겨듣겠습니다.”
“클클! 놀린 거잖냐! 뭘 새겨들어, 새겨듣긴!”
‘……나중에 곱절로 갚아 줘야겠군.’
이 일은 절대 잊지 않으리라, 분기를 삼키던 그때.
검치가 입을 열었다.
“뭐, 내기를 없던 일로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하지.”
검치의 얼굴에 괴팍한 웃음이 담겼다.
“내가 마음대로, 기분 내킬 때…… 보상을 주마.”
“뭐요?”
“나도 많이 양보해 줬다. 애초에 뭘 해 주겠다고 시작한 내기도 아니잖냐?”
“그건 그렇지요.”
서문경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막말로 승리욕이 앞섰다.
일단 검치의 콧대를 꺾겠다는 심보로 기습했으니까.
이만큼 봐준 것도 검치의 아량이었다.
사실…… 보상은 이미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번천광검결의 무공, 그리고 검치가 펼친 번결.’
두 가지만으로 차고 넘치는 소득이다.
서문경은 이 사실을 애써 잊었다.
지금은 열네 살만이 쓸 수 있는 무기를 써 볼 때였다.
“아무리 그래도 내킬 때라뇨! 저흰 호북성으로 떠나야 한다고요!”
“그건 내 알 바…….”
“이럴 거면 내기도 하지 마셔야죠!”
지성 따윈 아예 내던진 투정.
입술을 삐쭉거리면서 슬픈 일을 떠올렸다.
갖은 노력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서른아홉 살이었던 게 무슨 대수냐.’
어쨌든 지금은 열네 살의 소년이 아닌가.
외견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는데, 역시 상대는 검치였다.
“어쩌라고?”
“이런 식으로는 아니죠!”
“취소할까?”
“……히잉.”
앓는 소리를 내자 옆에 있던 주백경이 기겁했다.
“헉!”
못 볼꼴을 봤다는 얼굴.
서문경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창피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알겠어요…… 선배 마음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쯧. 좋게 말했을 때 수긍해야지.”
검치가 집으로 되돌아가며 턱짓했다.
“자고 가는 것까진 보상으로 치지 않으마.”
‘다른 걸 말하는 순간 내기 보상은 끝났다고 할 생각이네.’
어쩜 이렇게 쪼잔할 수가 있나.
서문경은 자신이 기습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부들거렸다.
그 모습을 본 검치가 피식 웃었다.
“뭐해? 안 들어오고?”
“예, 갑니다. 가요.”
툴툴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주백경의 전음이 귓가를 스쳤다.
-설마 앞으로도 이런 고수와 부딪칠 생각입니까?
-그…… 안 되나?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랍니다. 하물며 검치는 소문보다 훨씬 강한 고수였고요.
그 말엔 서문경도 공감했다.
이기어검을 수족처럼 부릴 줄 아는 고수라니?
그마저도 손에 사정을 두었다.
검으로는 서문경이 본 검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최소 구파일방의 장로 이상이라는 뜻.
자연히 궁금증이 들었다.
-왜 저런 고수가 사천성에서 야인처럼 있는 거지?
-사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옆에 있는 제자도 사천성에서 지내면서 심심하다고 들였고요.
-출처는?
-자기가 말했답니다.
-……왜?
-모르지요!
알아도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완연했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서문경이 검치의 뒷모습을 보았다.
‘왜 이런 고수가 나중에 사라졌지?’
설마 천산까지 가서 천마에게 도전한 건 아닐까.
서문경은 실없는 생각을 지우고서 주백경을 안심시켰다.
-다음부턴 상대를 좀 더 보고 할게. 너무 강한 고수도 피하고.
-아예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만…… 공자님의 뜻을 꺾을 순 없지요. 앞으로 수련에 더 매진하겠습니다.
-고마워.
그 말에 주백경이 옅은 웃음을 빼물었다.
저 미소를 보니 서문경의 마음이 조금 쓰렸다.
‘앞으로 자기가 뭘 겪을지도 모르고…….’
서문이현이야 아들에게 호위를 붙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서문경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얼른 발 닦고 자라!”
“예!”
서문경은 이부자리에 누웠다.
이른 아침에 떠날 작정이었다.
동이 어렴풋이 터오는 무렵.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스친다.
봄의 냉기가 이부자리 틈새를 비집은 탓이었다.
“우음…….”
서문경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어린 몸이 더 많은 잠을 갈구했지만,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얼른 가자.’
검치가 괴팍한 속내를 드러내기 전에 떠나려고 했던 것을.
휘오오…….
바깥에서 용오름 소리가 들렸다.
단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현상이다.
서문경은 기척을 최대한 감추고서 창밖을 훔쳐봤다.
‘검치.’
웃고, 찡그리고, 분노하고.
세 얼굴만 드러냈던 그가 진지하게 검과 마주하고 있었다.
‘심상 수련인가.’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무인은 심상을 조각하듯이 깎아서 최강의 형(形)을 완성한다고.
‘군문이 만든 고수인 너와 다르다고, 그리 말했지.’
이를테면 서문경에게 무공이란 살인의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심상 수련엔 별 관심이 없었다.
화려한 검술은 실리가 없다고 여겼다.
서문검법의 검의처럼 두꺼운 기둥.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강철의 기둥을 심상에 세우고서 적을 맞이했다.
가끔은 그것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명신승이 말했듯, 가장 직선적이고 패도적으로.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지만…… 천마한테 졌으니까.’
앞으로는 무인의 방식을 접목해 보리라.
그리 생각하던 와중에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경아, 가자.”
“여기 밖 아니다.”
“……가지요, 공자님.”
주백경이 행장을 어깨에 둘러멨다.
시선을 슬쩍 돌리니 양명성은 아직 퍼질러 자고 있었다.
서문경은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수련 중에 방해하기도 그러니까, 조용히 가자.”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서문경과 주백경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언제 검치의 기분이 나빠져서 회까닥할지도 모르지 않나?
‘내가 미쳤지.’
저런 괴팍한 고수에게 기습한 것부터가 실수.
그냥 양명성한테 번천광검결을 얻었을 때 멈춰야 했다.
후회를 삼킨 서문경은 살금살금 떠났다.
* * *
“갔냐?”
검치의 물음에 양명성이 슬며시 눈을 떴다.
이부자리에 남은 온기가 전부였다.
왠지 모르게 서운해졌다.
“예.”
“예의 없는 것들이 인사도 안 하고 떠나는 것이…… 쯧. 강호에서 오래 살긴 그른 놈들이야.”
“명문의 도련님이잖소. 그 옆도 비슷한 거 같고.”
“누군 아니고?”
검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히죽 웃었다.
“그나저나 너도 참 자는 척이 늘었다. 그놈 기감이 몹시 예리하던데 말이야.”
“누구 때문에 늘었겠수?”
“흐흐흐.”
검치가 서문경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기 보상을 뭐로 할진 이미 정해 두었다.
그저 양명성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잠깐 사라져도 나중에 별소리 안 할 거지?”
“어디 가시게요?”
“내기했으면 지켜야지.”
“하긴, 사부 집착이 보통은 아니죠.”
양명성은 서문경의 몸놀림을 떠올렸다.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배운 게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보신경.
능수능란한 권로에 이어지는 변초.
검치가 압도적인 고수였기에 망정이지, 웬만한 무인은 쪽도 못 쓰고 당할 것이 보였다.
근데 그의 성격상 압도적인 고수와 부딪칠 것이 뻔했다.
“사부 맘대로 하쇼.”
“좋아!”
검치가 씩 웃으며 행장을 챙기러 가는데, 멀리서 한 아이가 다가왔다.
어딘가 꼬질꼬질한 행색이지만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걸음을 멈췄다.
“넌 뭐냐?”
“방금 여기 떠난 사람이요. 어디로 간다고 말하던가요?”
“천무학관. 됐냐?”
시원하게 대답해 주자 아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근데 넌 걔랑 무슨 사이냐?”
“은혜를 갚으려고요.”
“허, 그놈한테?”
“그놈 아니에요!”
‘베에’ 하고 혀를 내민 아이가 서둘러 도망치며 과거 일을 떠올렸다.
사천성 성도.
마인에게 납치당해 멍하니 ‘아, 이제 끝났구나’ 라며 내심 절망하고 있었을 때.
그가 나타났다.
-네가 목소리 카랑카랑하던 애구나?
-나도 애지. 애인데 힘이 있잖아.
서문세가의 일공자, 서문경.
똑같이 납치당한 처지였으면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 쳤다.
그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서… 따라가고 싶었다.
‘천무학관이라고 했지.’
사실 천무학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서문경이 도착할 곳이라는 게 중요했다.
‘서문세가에 계실 때보단 낫잖아.’
구해 줘서 감사하다고.
그 말을 전하려고 했지만 정문 안쪽으로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뒤늦게 나타난 홍화연이라는 여자애가 부러웠다.
저 애는 자기 마음대로 서문경을 만나고 떠날 수 있는 위치니까.
그에 비해 자신은 비루했다.
‘앞으로 달라지자.’
아이, 성하민(星河珉)은 최대한 빨리 천무학관에 도착하고 싶었다.
……최대한 늦게 도착하려는 서문경과는 다르게.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