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2화 (10/250)

검치 (4)

무공사전에 수집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주변이 보였다.

요물 때문에 안 좋은 버릇이 생겼다.

검치의 뾰로통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놈아! 네가 잘난 건 알겠다만, 비무라면 패자를 비참하게 만들진 말아야지!”

“……아.”

서문경은 머쓱하게 웃었다.

무공을 수집하길 두 번째.

선물의 포장지를 다급하게 뜯어보는 설렘이 배려심보다 컸다.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역시 강호의 소문은 헛되구나.’

검치는 광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불통할 뿐.

무공을 순수하게 갈고 닦는 무인의 면모가 강했다.

서문경은 저들이 마음에 들었다.

양명성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선배, 후배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시지요.”

“됐다. 나이 더 처먹고 약한 내가 잘못이지.”

쯧, 가볍게 혀를 찬 양명성이 온몸의 먼지를 털어냈다.

“근데 비무 중에 자꾸 뭔 짓이냐? 사부보다 미친놈은 진짜 처음 봤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치가 날린 지풍에 양명성이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그의 얼굴에 짜증과 화가 가득 차오르는 게 보였다.

“아니, 진짜. 내가 틀린 말 했소?”

“원숭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머리 좀 굵었다고 주인한테 미친놈?”

“존경할 구석이 있어야지. 응? 칼질 빼곤 버러지 아니요?”

“버러지?”

시정잡배만도 못한 어휘로 싸우는 사제지간이라.

서문경은 헛웃음을 흘리며 검치와 양명성을 보았다.

이제야 그들을 관찰할 여유가 났다.

‘살아온 발자취가 얼굴과 복식에 남는다고 하였지.’

소가주로서 배우고 무림에서 체화한 서문이현의 가르침.

자신이 군문의 자제답지 않게 여기저기 풀어헤치고 다니듯.

저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치와 양명성은 아무리 좋게 봐도 명가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자유로운 언행과 검술. 낭인에 가까웠다.

무공의 원류가 불분명하지만, 왠지 알 것 같다.

자신에겐 신비한 무공사전이 있었다.

서문경은 비무 중에 보았던 심법 이름을 떠올렸다.

‘심궐삼적(深掘三積). 깊게 파내어 삼단전에 쌓는다. 단전의 형상이 그릇이 아니라 구덩이에 가까운 운행이다.’

이름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기 마련.

그 발상에서 기초해서 양명성과의 비무를 복기했다.

반원의 검기와 허공을 격한 일점.

‘공력이 많이 담겨 있진 않았지.’

심궐삼적.

그 이름답게 깊은 구덩이에서 솟구치는 형상에 가까웠다.

적어도 서문경의 안법에선 그렇게 보였다.

검사보다는 열양지기를 다뤘던 태양문의 무형(武形)에 가깝다.

‘땅을 내딛는 보신경에 열기가 있었지.’

‘아버지에게 듣기로 태양문의 성세가 오십 년도 전에 끊겼다고 했다. 태양문의 검맥일지도 모르겠구나.’

거기까지 발상을 이어 갔을 때쯤.

서문경은 자신이 무공사전을 꽉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요물은 요물이야.’

언젠가 완전히 휘둘리기 전에 기량을 늘려야 한다.

경각심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데, 싸늘한 바람이 뺨에 닿았다.

“……시간이 벌써?”

낮게 너울지던 노을 대신 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최소한 일식경은 지났다는 뜻이다.

서문경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검치와 양명성은 보이지도 않았다.

주백경 또한 마찬가지.

비무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게 뭐 어찌 된 거지.’

멀뚱히 서서 턱을 매만졌다.

설마 자신을 버리고 떠나진 않았겠지.

불길한 예감이 들던 차에 주백경이 마른 땔감을 한 아름 짊어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도련님……!”

한 손에 횃불을 들고서 환하게 웃는 얼굴.

그 얼굴이 서문경의 혼란을 하찮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비무가 끝난 이후, 도련님께선 깊은 생각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옆에서 몇 번을 불렀는데요.”

“……그래?”

“예. 검치가 신기하게 보다가 제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고민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그들에게 땔감을 얻어 왔고요.”

주백경이 턱으로 지척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어딘가 했더니 양명성이 창문을 박찼던 장소였다.

서문경은 허허 웃고 말았다.

“내가 추울까 봐?”

“추위에 상념이 날아가면 안 되잖습니까.”

너무 완벽한 충심이 아닌가?

뿌듯하면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서문세가의 모범생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서문경은 괜히 머쓱해져서 검치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만 재워 달라고 하자.”

“땔감은 어떻게…….”

“당연히 돌려줘야지. 호북성까지 들고 갈 건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주백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횃불과 땔감이 닿을 뻔해서 서문경의 가슴이 철렁였다.

* * *

“무림에 적을 두다 보면 저런 놈과 마주칠 수밖에 없어. 너무 낙심하지 마라.”

검치답지 않은 위로였다.

양명성은 귀를 쫑긋거렸다.

“이게 웬일입니까? 저를 걱정하시다뇨?”

“할 만하니까 했지. 위로해 줘도 지랄이냐?”

혀를 가볍게 찬 검치가 창밖을 내다봤다.

땔감을 얻어 간 주백경이 상념에 잠긴 서문경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검치의 시선이 저절로 서문경에게 뿌리박혔다.

“오늘 싸우면서 뭘 느꼈냐?”

“저 나이에 너무 이르게 미쳤다? 나름 자신 있게 여기던 재능이 부서졌다?”

“겉만 봤구나.”

검치는 불식간에 검결지를 쥐고서 양명성에게 휘둘렀다.

휙─!

검결지가 허공을 격한다.

양명성이 입술을 짓씹고서 검결지를 마주 쥐었다.

검치를 사부로 둔 이래로 일상처럼 이어진 수련이었다.

쩌억!

두 검결지가 부딪치는 순간, 살이 아니라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걸 본 양명성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이제야 깨달았냐? 덜떨어진 원숭이 놈.”

“이, 이거. 분명히…… 청운적하 아닙니까? 문경의 마지막 초식이요.”

“그것만?”

“…….”

양명성은 순간 침묵했다.

알지만 말로 뱉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검치가 대신 꺼내 주었다.

“검이 빗나가서 허둥지둥하느라 보지 못했겠지만, 초식에 천결(天訣)이 녹아 있었다. 아마 검법에 한정적이겠지만…… 파자(破字)에 능한 놈이야.”

빠르게 말을 쏟아 내는 검치의 얼굴에 묘한 광기가 있었다.

순수하게 기쁜 듯, 질투에 미칠 듯.

한껏 웃음을 그러모은 그가 뒷말을 내뱉었다.

“비무에 백지를 힐끔거리는 미친놈이라지만, 일검을 토막 내서 체화하는 재능이라면 큰 흠결도 아냐. 서문세가에 어찌 저런 놈이 나왔지?”

그 말에 양명성이 깜짝 놀랐다.

“문경이가 서문세가였습니까? 천무신동 서문경이요?”

“그럼 그놈의 동행이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냐? 하이고! 너무 순진해서 탈이구나!”

“……쩝.”

“되물으면 답답해서 패 버리려고 했는데 잘했구나.”

히죽 웃은 검치가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상념에서 깬 서문경이 주백경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명성아.”

“예.”

“저놈과 잘 지내라. 나이 어리다고 깝죽대다가 처맞지 말고 지금부터 친하게 지내 둬.”

“내가 알아서 잘합니다.”

그 말에 검치가 주먹을 들었다.

심궐삼적공 특유의 폭발적인 운용이 내관혈을 주파했다.

* * *

끼익, 탁.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대화가 멈췄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룻밤 묵으러 왔는데 집주인의 얼굴이 푸르뎅뎅하면 누구라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문경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서문세가에 몸을 의탁하는 것도…….”

“매일 이러지 않소.”

양명성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자존심을 챙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굳이 따지진 않았다.

어차피 남 일이고 검치가 워낙 괴팍하지 않나.

눈치가 있으면 당연히 하지 않을 일이건만.

“제자를 구타로 다스리다니! 안 되겠어. 내가 직접 따져도 되겠나?”

주백경은 실제로 해냈다.

양명성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안 그래도 처맞은 게 억울한데, 동정받은 기분이 들 터였다.

“돼습니다…….”

“이보게! 발음이 샐 정도가 아닌가!”

“좋게 말할 때 그만.”

“내 무림의 명리에 밝지는 않으나, 협이 무엇인지는 아네.”

주백경이 거침없이 걸어가기가 무섭게 검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협이 뭐? 나한테 뭘 따져?”

“이보시오, 검치 선배! 무슨 일이 있었건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요! 도리를 안 다면 앞으로 때리는 건 그만두시오!”

서문경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괴팍하고 지랄 맞은 고수가 훈계를 가만히 들어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검치는 달랐다.

“알았어.”

“더 확실하게 대답해 주시오!”

“염병할, 알겠다고!”

고함을 빽 지르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 달랐다.

서문경은 순간 어이가 없었고, 주백경은 불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명성의 표정은 경악에 가까웠다.

“저, 저…… 노친네를…….”

“아가리 확 꿰매기 전에 조용.”

“…….”

양명성이 손가락으로 입을 쓱 그었다.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은 검치가 서문경과 주백경을 안내했다.

“그래, 여기까진 무슨 일인가?”

그 말에 서문경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하룻밤만 지내고 갔으면 합니다.”

“하룻밤이 무슨 대수라고? 더 있다가 가도 돼.”

“천무학관으로 가려면…….”

“아니, 왜?”

진정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검치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어차피 네 수준에 맞지도 않을 도련님 학관 아니냐?”

“그러진 않을 겁니다. 저만큼 강한 무인도 있겠지요.”

서문경은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화산파의 연준호를 비롯해 여러 후기지수가 천무학관에 있었다.

앞으로 십수 년, 마교와의 전쟁에 큰 도움이 될 인재였다.

‘가능하면…….’

검치와 양명성이 흥미를 느끼고서 합류하면 좋겠다.

그 생각은 일거에 잘렸다.

“너만큼 강한 애가 더 있으면 우리 원숭이는 지금 자살하는 게 나아.”

“…….”

양명성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검치는 개의치 않았다.

“하물며 천무학관은 뭐 결국 온실 같은 곳이지. 그만한 재능을 가졌으면 피를 먹여서 키워야 하는 법이야. 당가, 아미파, 북적. 교보재가 얼마나 많은데!”

‘북적이라, 아버지가 들었으면 정말 기뻐했을 말이네.’

낭인의 색채가 강하다 못해 군문에 가깝다.

서문경은 허허 웃었다.

개성이 강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심했다.

“선배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이제 슬슬 집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공도 얻었으니까 부딪치는 일 없이 넘어가자.

서문경은 방긋 웃으며 검치의 대답을 기다렸다.

밤도 깊어 가고 갈 길이 먼데 새벽까지 깨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검치의 반응이었다.

“나이도 어리면서 벌써 자려고?”

‘일찍 자야 몸이 커지지…….’

딴죽을 걸고 싶은 걸 인내하고서 눈을 슬쩍 비볐다.

피곤하다는 표시였지만 검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 때는 피곤해도 선배에게 뭐라도 얻어 가려고 별짓을 다 했는데…….”

“밤도 깊었는데 안에서 대화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집이 무너져서 안 돼.”

저게 뭔 말인가?

서문경이 눈가를 좁히는 순간, 검치가 히죽 웃었다.

“밖에서 내기 하나 하지.”

“이 밤에요?”

“안 될 것이 뭐 있어?”

검치의 손가락이 위를 가리켰다.

검게 물든 하늘, 봄바람에 흔들리는 침엽수…….

그 사이에 알알이 박힌 별빛이 보였다.

별빛 옆에는 달빛이 있어 땅을 환히 비춰 줬다.

“무인에게 있어 이 정도면 충분한 불빛이지.”

검치가 순수한 웃음을 머금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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