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치 (3)
* * *
스각!
서문경의 발길질이 땅바닥을 긁었다.
부서진 검의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이에 원숭이, 검치의 제자인 양명성(兩明星)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또……!”
서문경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았다.
시간을 벌어서 백지인 책장을 흘낏거릴 요량이겠지.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적중하여.
“오!”
책장을 흘낏거린 서문경이 가벼운 감탄성을 터트렸다.
양명성의 부아가 치밀었다.
검을 부딪치는 와중에 저러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무시할 수가 없다……!’
검의 파편을 무질서하게 흩어 낸 것처럼 보여도 눈과 귀, 코를 절묘하게 노렸다.
무시하면 핏줄에서 터진 출혈이 기도와 폐부를 막을 것이다.
지극히 실전적인 한 수.
그걸 책장을 흘낏거리면서 펼치는 것도 우습고, 자기보다 어린 소년인 게 기가 막혔다.
‘내가 머저리인 거야, 쟤가 미친놈인 거야?’
가늠이 되질 않는다.
내심 천하제일 미친놈이라 여겼던 검치보다 한 수 위가 있다는 걸 배웠다.
천하가 너무 넓었다.
그런데 이딴 식으로 넓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파편을 쳐 낸 양명성이 불만을 토했다.
“날 얼마나 병신으로 보는 거냐?”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항상 진지했지.”
서문경의 목소리는 너무 태연했다.
얼핏 들으면 진심으로 착각할 정도.
양명성의 이성이 단번에 날아갔다.
“개, 씹.”
공력이 순식간에 손목의 내관혈을 통해 손바닥 중앙의 소부혈과 노궁혈을 관통했다.
까득.
양명성이 검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서문경이 무공사전을 힐끔거렸다.
절기가 펼쳐지는 순간.
[번천광검결(翻天狂劍訣)]
검치 또한 익히고 있을 무공의 정체가 밝혀졌다.
서문경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음을 참으려고 해 봤는데, 쉽지 않았다.
그걸 본 양명성의 턱 아래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오냐!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
후웅!
단번에 휘두른 칼날이 반원의 형상을 그린다.
오해에서 시작된 필중의 검기.
서문경의 시야가 짧게 점멸하고, 눈을 깜빡거리는 순간에 반원의 검기가 근접했다.
카가각!
임기응변으로 칼을 맞댔다.
좌에서 우, 우에서 위로.
간합에 여섯 수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삼각근과 비골근을 보조하던 내공이 전신으로 빠르게 흩어지고 모이길 반복했다.
‘아버지가 자소단을 소화시켜 준 효용이 크구나.’
대맥이 깔끔하게 잘 닦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운용.
삼십 년의 공력으로 줄기를 만들어, 연약한 나무인 육체를 지탱한다.
오래 써먹을 방법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임시변통.
군문의 자제로서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들 열네 살이다.
서문경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기에 전심을 다하였다.
“후우.”
숨을 내뱉고서 명정한 눈으로 양명성을 직시했다.
동시에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더 많은 오해를 부르겠구나.’
남들이 보기엔 백지, 자신이 보기엔 무공의 총람.
무공사전을 힐끗거리는 것만으로 자길 우습게 여긴다고 오해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우습지만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서문경은 그렇게 판단했다.
당장 눈앞의 양명성만 봐도.
‘평정을 잃었어. 상반신과 수양명대장경을 정교하게 노리던 기예가 분노를 머금고서 흔들리고 있으니.’
의도치 않은 격장지계.
그 틈을 비집기로 하였다.
서문경의 검이 순간 초승달처럼 기울어졌다.
“청운적하.”
서문경은 짐짓 여유로운 척, 초식명을 말했다.
서문검법의 사 초식.
청운적하는 어느 초식보다 간결하게 움직인다.
보신경과 합심하는 긴밀함도 없다.
전장의 마상(馬上 : 말 위)에서 펼치는 것이 기본인 검결.
단순함에 약간의 변화를 섞는다.
스윽.
반보를 앞으로 더 내밀었다.
“……크흐!”
양명성이 까닭 모를 웃음을 흘렸다.
당황과 기꺼움이 섞여 있다.
서문경의 시선이 무공사전의 책장을 스쳤다.
[양명성 - 열일곱 살]
[재능이 특출하다. 변칙으로 휘둘러 치는 일선과 환검을 주의하라.]
[보유 무공 : 번천광검결, 천랑지심경(天狼至心境), 심궐삼적공(深掘三積功)]
확인한 즉시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카앙─!
양명성의 검력이 손목을 짓눌렀다.
공력의 운용이 미흡했다면 검을 놓칠 뻔했다.
오른 어깨로 밀어서 비껴 내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어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양명성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안법이 나이답지 않게 제법 정심했다.
동년배 중에서 최강을 논할 실력이겠지.
서문경은 입술을 씰룩였다.
왠지 꺾어 주고 싶어졌다.
“서풍광아.”
낮게 속삭이면서 내공을 끌어 올렸다.
검을 쌍수로 붙잡은 정검세.
칼날을 양명성의 가슴에 겨눴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공격과 방어가 뒤바뀌는 순간이다.
스각!
서문경의 발길질이 땅바닥을 긁는다.
양명성의 솜털이 곤두섰다.
아까처럼 더러운 짓을 펼치려는 수작이 아니다.
안법에 언뜻 비치는 공력의 운용은 몹시 다채롭고 바쁘다.
그때 지켜보고 있던 검치가 입을 열었다.
“원숭아! 넋 놓으면 안 된다!”
그 말이 신호가 되었다.
카각! 그그극─!
전심전력. 칼과 칼이 부딪친다.
서문경은 자소단으로 얻은 공력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내관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다.
참았다.
대지에 두 다리를 뿌리박고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광아(狂牙), 그 이름에 걸맞게.
“……광검에 밀리지 않는다? 원숭이의 적공이…….”
“……도련님의 옥체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생기면…….”
귓가를 스치는 소리가 있었지만, 깊게 듣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양명성만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극점에 이른 몰아.
전생에서도 몇 번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칼끼리 부딪친 불똥.
작은 열기와 불빛이 무인의 소우주(小宇宙)를 데웠다.
이 또한 무공사전의 공능일까?
아무렴, 좋다.
“……하하.”
흥이 돋았다.
서문경은 히죽 웃으며 난타전을 계속했다.
서풍광아가 칼바람이 되길 바랐던 조사의 심상을 따라서.
한 걸음 더 앞으로.
카가각!
일검, 이변(二變), 손목을 노리는 나선.
손목으로 변칙적인 기예를 부렸다.
비무라는 것도 잊었다.
서문검법의 초식에서 무형(無形)으로, 무형은 임기응변으로 변하여 양명성의 검을 떨친다.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힘겨웠다.
정기신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기틀이 흔들렸다.
관존의 혼과 비교해 소년의 육신과 내공은 비루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서. 시간을 넉넉히 잡아서.’
먼 길을 걷기로 했지.
서문경은 간합 사이를 쪼개서 생각했다.
불안정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다.
천무학관에 일찍 도착하면 그만인 시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공사전에 의존하고 싶지도 않았다.
쉬운 길은 싫은 탓이다.
자신이 품고 있는 모순이었다.
‘천마를 막겠다는 놈이, 군문의 자제라는 놈이.’
무인처럼 굴어서 어쩌자는 거냐.
서문경은 양명성과 검을 부딪치면서 가슴에 왼손을 가져갔다.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게 나쁘질 않아서 히죽 웃었다.
“뭘 또 웃고 있냐……!”
양명성이 괴물 보듯 봤다.
그의 손목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검력 싸움에서 내상을 입은 모양새.
그렇다고 비무를 멈추는 일은 없다.
까앙―!
수십 번의 부딪침, 수없이 맞닿은 숨결.
칼날의 이빨이 닳았다.
검사의 호흡 또한 가빴다.
“……후우, 후.”
“클클.”
애석하게도, 성격이 나쁜 쪽은 자신이었다.
서문경은 두 팔을 벌리곤 칼을 느슨하게 잡았다.
누구라도 격렬하게 반응할 도발.
양명성의 살의가 가슴을 찔렀다.
비무로서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푸하하하!”
“……아니.”
검치의 폭소와 주백경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미안함이 불쑥 들었다.
정신 나간 도련님이 강호에서 은원을 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안함도 찰나였다.
자신에겐 무공사전이 있을뿐더러…… 이미 양명성과 비무를 시작하지 않았나.
‘손해 볼 일은 없잖아.’
양명성이 보유한 무공을 수집할 기회다.
서문경은 자신의 욕심에 충실했다. 시험하고 싶기도 했다.
세 가지 무공 중 하나만 수집할까, 모두 수집할까.
어느 쪽이어도 괜찮다.
“와라.”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선수를 양보하기로 했다.
이쪽이 서로에게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까득.”
양명성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린놈의 오만함이 도를 넘었다. 화가 불쑥 치밀었다.
“사부.”
“네 맘대로 해라.”
검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명성의 고민이 끝나는 순간.
핏─!
양명성의 검이 허공을 찢어 격했다. 이빨 나간 검이 낼 소리가 아니었다.
주백경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게 열일곱의 검이라고?”
“어디서 맞고 다닐 수준은 아니지.”
검치는 무감정한 얼굴로 평가했다.
하루에 반나절은 미쳐 있어도, 검에 관해서는 진지했다.
그건 자기가 가르치는 제자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수준이 미적지근해서 아직은 연환의 묘리밖에 몰라. 기본도 쌓지 못한 놈이…… 쯧.”
양명성을 깐 검치는 두 검이 기울어지며 교차하는 장면을 보았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아, 좋다.”
누런 석양이 칼날에 비쳤다.
웃음이 나왔다.
쇳덩이가 집어삼킨 빛이 요사스럽게 흐늘거렸다.
검치가 보기에, 서문경은 영악한 재주꾼이었다.
기교를 부리는 데 거리낌이 없고 밑바탕에 기본이 깔려 있었다.
“나무작대기를 뱀처럼 움직이는구나.”
번천광검결의 환검과 변검.
양명성이 장기로 삼은 검술이 차례대로 파훼되었다.
기꺼웠다.
삭은 껍질을 충격적인 패배로 벗을 기회였다.
검치는 실실 웃었다.
“원숭아! 이제야 조언한 이유를 알겠느냐!”
“……시끄.”
양명성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기예의 싸움에선 졌으나, 일선(一線)의 승부가 남아 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모든 힘을 짜내서 휘둘러 쳤다.
“도련님!”
주백경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양명성의 칼날이 먼저 서문경의 손목에 닿은 탓이다.
나이 차이가 팔 길이에서 났다.
이대로 한 번 슥 그으면 끝이었다.
“……이겼다!”
양명성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끈질겼지만, 결국 나이를 이기진 못한다.
분명히 그러할 터인데.
서문경의 보신경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스윽…….
칼날은 허공을 갈랐다.
양명성의 맹목적인 일수가 그렇게 무위로 돌아갔다.
“이걸 어쩌지?”
서문경은 씩 웃었다.
양명성은 모를 테지만, 무공사전에 이미 적혀 있었다.
[속공]
미리 알고 있다면 당할 이유가 없다.
남은 내공을 적절하게 배분했다.
보신경과 서문검법.
두 무공을 합한 역공이 이어졌다.
“청운적하.”
서문경의 칼끝이 양명성의 성대 위, 염천혈을 점했다.
승부가 정해졌다.
양명성은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졌다.”
그리고 진 것이 그리 분한지 어깨를 부들부들 떨다가, 검치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나이를 글케 처먹고 동생한테 지는 기분이 어떠냐? 응?”
“……그만하십쇼.”
“그만 안 하면 어쩔 건데?”
“까마득하게 어린 제자한테 욕 처먹는 기분을 알려 드릴까요?”
“누가? 누가 내 제자야? 난 기교만 파겠다고 지랄하다가 지는 병신 머저린 들인 적 없다.”
“이런 썅.”
양명성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털이 한 움큼씩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세기였다.
그러다 서문경을 보았다.
“얼핏 듣기로, 천무학관으로 간다지?”
“그래.”
서문경은 설렁설렁 대답하며 책장을 훑었다.
그 모습을 본 양명성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엔 지지 않을 거다.”
“그래.”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말한 서문경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번천광검결, 수집 완료.]
검치의 무공을 얻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