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8화 (7/250)

홍화연 (3)

“왜 따라오는 거예요!”

갑자기 우뚝 멈춰선 홍화연이 큰 소리를 냈다.

서문경은 그걸 귀엽게 봐줄 성격이 아니었다.

“그냥 혼자 가게 둘까?”

“예?”

“마중 필요 없으면 여기서 헤어지고.”

“…….”

그 말에 홍화연의 입술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쉽사리 나오지 않는 낌새.

자연히 어린아이의 투정이라고 생각했다.

“싫으면 됐고, 나도 귀찮아.”

“그게.”

“그게, 뭐?”

가볍게 되묻자 홍화연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강호로 간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천무학관.”

“……천무학관이요.”

잊지 않겠다는 듯.

혼잣말로 꼭꼭 씹어서 되새긴 홍화연이 밝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서문경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운을 뗐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따라올 생각은 하지 마. 위험한 곳이니까.”

“그럼 오라버니는 왜 가는데요?”

“……그건.”

말문이 턱 막혔다.

그냥 변명으로 둘러댈 수 있었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을 거짓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홍화연에게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전생에서 깊게 이어 간 인연이 아니니까.

잘 모르니까.

지극히 계산적이고 차가운 이성.

여러 생각이 서문경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게 무슨.’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회귀했다고 해서 사람 사는 세상을 벗어나진 않았거늘.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폄훼하려 했다.

그 사실이 무정하게 다가왔다.

등골이 서늘했다.

천마를 잡기 위해 전생에 맹목적으로 의지하려는 자신이 홍화연의 눈동자에 비쳤다.

게다가.

‘천무학관에서 만날 무인은 모두 나랑 전생에 연이 없던 사람들이지 않나.’

서문경은 마음을 고쳤다.

홍화연을 그저 ‘스쳐 지나갔던’ 인연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다른 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동행할 주백경.

그 또한 정심하게 대할 마음이 들었다.

“마음대로 해. 그래도 각오는 하고 와.”

“……네!”

나름 답이 되었는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홍화연.

그녀를 향해 서문경이 마주 웃었다.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가자.”

그렇게 서문경은 홍화연을 현생의 인연으로서 배웅했다.

* * *

-서문세가에 신동이 있다!

-그 신동이 아이들을 납치하던 무뢰배를 무찔렀더라!

회귀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부끄러운 것이 달라붙었다.

별호 혹은 무명(武名)이라고 불리는 명성.

‘천무학관에 입관하는데 굳이 시선 끌고 싶지 않았는데.’

서문경은 ‘칫’ 하는 소리를 내며 주백경의 얼굴을 보았다.

어린 공자가 벌써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이 한없이 감탄스러운지, 자기 혼자 기뻐하고 있었다.

정작 장본인은 떨떠름한 표정인데 말이다.

“들으셨습니까? 공자님이 천무신동(天武神童)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알아.”

저도 모르게 뚱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리 뛰어난 공을 세웠어도 벌써 호사가가 야단법석을 떨 리가 없었다.

게다가 뭐, 천무신동?

천무학관에 갈 아이라고 소문을 낸 거나 마찬가지.

보나 마나 서문이현이 무언가 손을 쓴 게 분명했다.

‘이왕 아들이 가겠다는 거, 등이라도 밀어주겠다는 의도셨겠지만…… 쩝. 오히려 잘된 일인가.’

어차피 마교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면.

어중간하게 힘을 숨기고 있느니 날뛰어서 접촉해 오게 만드는 편이 낫다.

천무신동다운 재능?

신비한 무공사전이 있는 한 자유롭게 보여 줄 수 있다.

본래 가지고 있는 오성도 남보다 뒤떨어진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렇게 서문경은 망설임을 털었다.

“천무학관의 입관 시기가 언제였지?”

“약 두 달 뒤입니다. 거리가 멀어서 지금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동정호를 뒤에 끼고 있어서 정취가 좋다고 들었습니다. 불야성도 가깝다는 것이 조금은 우려되긴 하지만요.”

“내가 거기서 놀 것 같아?”

“그, 흠.”

주백경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웃음이라곤 모르는 사람처럼 굴던 그가 껍데기를 벗은 것 같아 기꺼웠다.

저런 태도는 앞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강호는 모범생을 우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분이 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기억한다.”

“도련님!”

서둘러 다가오는 주백경에게 손을 가볍게 저었다.

“아버지한테 다녀올 테니까 행장이나 준비해 둬. 바로 출발할 거니까.”

“……예.”

주백경의 얼굴이 순간 굳는다.

무림은 군문과 세계가 다른 곳.

오불관언(吾不關焉)의 미덕을 늘 강조 받았을 테니, 걱정이 들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를 향해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긴장을 녹이는 어린 웃음이 되길 바랐다.

“어차피 무림인이란, 힘자랑하는 왈패들이잖아?”

“예?”

“겁먹지 말라고.”

“……허.”

주백경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빼물었다.

어린아이한테 저런 소리를 들을 만큼 약해 보였나, 자기 표정을 확인하려고 입가를 매만졌다.

그거면 됐다.

서문경은 등을 돌려 걸었다.

강서의 군을 총괄하는 곳임과 동시에 서문세가에서 가장 작은 방.

전생에선 아버지가 전사할 곳으로 정한 묘지.

가주실로 향하는 발이 무거웠다.

“다시 시작이라…….”

천마를 비롯한 사교(邪敎)의 노괴들과 싸워야 한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놀이처럼 부수던 괴물들이다.

걱정이 앞섰지만, 의외로 두렵진 않았다.

주백경을 풀어 주려고 한 농담이 되레 자신의 마음을 다독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걱정이나 두려움을 내다 던지고 다시 해 보자.

서문경은 가주실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네 생각은 변치 않았느냐?”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질문이 날아온다.

걱정과 의문, 설득하려는 마음이 목소리에 담겼다.

서문경 또한 서문이현의 얼굴이 시야에 담기기도 전에 대답했다.

“네. 갈 겁니다.”

“허어…….”

서문이현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열여섯이 넘었으면 모를까, 겨우 열네 살인 아이가 저렇게 말하니 기가 찼다.

보듬고 있기 벅찬 아들이란 생각이 부쩍 커지는 요즘이다.

명확한 목적과 의지, 자신감.

자길 바라보는 시선과 보신경(步身輕) 또한 출중하다.

“벌써 내 손을 떠나는구나. 기껍고도 걱정스러운 마음이다. 네 어미와 동생에겐 말했느냐?”

“아니요.”

“왜냐?”

“말리거나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서요.”

“……네 독단인 건 아는 모양이라 다행이다.”

주변을 돌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날아가서야 불나방과 다를 바 없다.

서문이현은 문서를 덮고서 아들을 직시했다.

전에 그러했듯, 속내를 알고 싶은 부정(父情)이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오연하고도 여유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가서 잘할게요.”

“녀석, 내가 그걸 걱정하겠느냐?”

“그럼요?”

“관과 무림은 본디 물과 기름과 같았다. 네가 뛰어난 만큼 질투를 받을 텐데, 가만히 있지 않을 것 아니냐?”

자칫 잘못하면 군문이 무림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명분으로 부풀릴지도 모른다.

그 사건에 서문경이 휘말리는 걸 원치 않았다.

서문이현은 내공을 그러모았다.

수구혈에서 인당혈로 치솟은 내공이 동자료와 사백혈을 점했다.

“그것까지 감당할 수 있다면, 말리지 않으마.”

무시무시한 안력에 의념이 뒤섞인다.

수려하기까지 한 서문이현의 안법 운용.

서문경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아버지는 늘 저러했다.

입으로는 군문의 가주라고 강조하였지만, 자식이 벼랑에 가까이 가길 원치 않았다.

그게 지금은. 불효막심하지만, 언짢았다.

“이미 허락하신 일 아닙니까?”

“…….”

“말릴 계제가 아닙니다. 아버지.”

서문경은 당차게 대답하며 서문이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체온이 끓고 시야가 어지러워진다.

순식간에 상단전을 제압하는 묘리가 안법 안에 있었다.

배격할 수 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저 오롯이 받아 냈다.

이것이 지금 당장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안하다.”

서문이현이 외마디를 뱉었다.

“나이답지 않은 배포나 술수를 캐 보고 싶었다. 욕심이었지. 문제가 아니라면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을, 참견하려고 했어.”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니 됐습니다.”

“……허, 그래. 필요한 것은 있느냐?”

“예.”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 저를 천무신동으로 만드신 거, 일을 더 키워 주셨으면 합니다.”

서문경은 서문이현과 은밀하게 전음을 주고받았다.

끼익, 탁.

서문이현과 대화를 마치고 가주실에서 나왔다.

“……후.”

서문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법의 힘을 가라앉히느라 심력이 제법 소모된 탓이었다.

하지만 쉬진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조용히 떠날 작정이었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선객이 없었다면.

“형.”

복도 끝에서 서문휘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무슨 이유일진 뻔했다.

“소가주를 포기하고, 무림으로 간다고. 그렇게 들었어.”

“어.”

“……동정심은 아니지?”

“전혀.”

서문경은 짧게 대답했다.

길게 이야기해 봐야 입이 아팠다.

전생에서 동생, 서문휘는 한마디로 서너 가지를 꿰뚫던 책사였으니까.

한마디로 속이 배배 꼬였다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하는 게 오해가 없겠지.’

서문경은 인상을 찡그리며 단호한 음색으로 말했다.

“나보다 네가 더 어울려. 난 야인으로 족해.”

지난 생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무인으로서 가진 그릇은 컸지만, 한 가문의 가주가 될 배포는 아니었다.

서문이현이 끝까지 가주로 있어 준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천마와 싸우는데, 서문경은 무인으로 싸우는 것이 낫다.

가문을 다스리는 건 자신이 하겠다.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힘의 차이가 컸다.

‘답을 미리 본 이상, 소가주의 자리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

차라리 타고난 책사인 서문휘에게 양보하자.

저벅, 저벅.

서문경은 서문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동생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갑자기 놀아 주는 것도 그렇고, 소가주 자리를 포기하는 게 이상하게 보였을 터였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휘야.”

“예.”

“너무 일찍 이런 말을 해서 부담스럽겠지만 말이야. 넌 좋은 가주가 될 수 있을 거야.”

가까이 다가가서 서문휘의 머리를 슬쩍 매만졌다.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묶었을 머리카락이 풀어졌다.

“……어.”

서문휘가 잇새 사이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열 살답지 않게 어딘가 꾸며 낸 듯한 표정이 한순간 무너진다.

그걸 본 서문경은 내심이 복잡해졌다.

‘솔직히, 동생을 잘 모르겠어.’

전생에 서문휘가 어떤 상처 때문에 그리 배배 꼬였는지 몰랐다.

그냥 어느 순간 변했다.

형이라고 부르는 일 없이, 가문의 대소사를 논할 때만 얼굴을 봤다.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나갔다 올게.”

서문경은 말을 툭 던지고서 서문휘를 스쳐 지나갔다.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다.

저벅, 저벅.

거리가 완전히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잘 갔다 와.”

우물쭈물, 힘겹게 말을 꺼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적어도 지난 생처럼 서먹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자신을 웃음 짓게 했다.

그날 오후.

서문경과 주백경은 가벼운 행장과 무거운 여비를 챙기고서 가문을 나섰다.

이른 바, 천무신동의 첫 무림행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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