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연 (2)
다음 날 아침.
침구에서 일어난 서문경이 신비한 무공사전을 펼쳤다.
[홍가권]
[권(拳), 장(掌), 지(指), 조(爪), 주(肘)를 비롯해 수도(手刀)와 파자권, 구수의 기예를 숙(熟)하게 펼친다.]
[직접 익히거나 책장을 소모하여 즉시 펼칠 수 있다.]
홍화연을 꺾고 나서 신비한 무공사전에 기재된 내용.
아무리 서문경이어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비한 무공사전은 무림의 근간을 파괴하는 요물이다.’
문외불출(門外不出).
문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마라.
일인전승(一人傳承).
오직 한 사람에게만 계승하라.
이런 경고가 왜 생겼겠는가?
‘무공 비급이 귀해서지.’
일단은 얻기도 어려울뿐더러 남에게 유출되면 필살의 의미를 잃는다.
아무도 모를 때야말로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무공이니까.
그 무공을 상대를 꺾으면 얻을 수 있다?
‘무림 공적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양날의 검이기도 하지. 타문의 무공을 마구잡이로 펼치면 고수들이 접근해 올 테니까.’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으나 함부로 펼쳐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있었다.
……자신이 서문세가의 적자가 아니라면.
“어떻게든 우길 수 있잖아?”
무림인은 서문세가의 실체를 모른다.
그저 풍문으로 들리는 악명을 신뢰하곤 했다.
“황실의 힘을 등에 업고 패악질을 부린다던데?”
“그것도 그렇고, 명문 정파의 비급을 몰래 베껴 갔다더군!”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회귀 전, 서문이현의 비밀 창고에 명문 정파의 영약과 비급이 숨겨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천마가 세상을 불태우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천마와 싸울 때 쓰라고 모아 두신 거였지, 욕심 때문은 아니었어.’
그저 배를 불리려던 게 아니다.
서문세가가 무림인의 비급을 착취한다거나 황실의 힘을 등에 업고 패악질을 부린다는 건 빌어먹을 헛소리란 뜻이다.
‘오히려 잘됐어. 내가 무공사전을 써도 의심받지 않을 거야.’
서문경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들이 악당이라고 여긴다면, 그냥 그렇게 행동하면 된다.
꽈악.
신비한 무공사전을 챙기고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공기 좋구먼.”
이른 시간의 한적한 연무장.
식솔 대부분이 공무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전생에도 이때쯤 수련하길 좋아했다.
‘남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농땡이 치는 기분이었으니까.’
소가주로서 할 일은 밤에 어떻게든 메꾸곤 했다.
아버지의 타박도 그때 제일 많이 들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아무도 없을 때가 제일 수련하기 좋은 것을.
서문경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왼손으로만 무공사전의 책장을 넘겼다.
팔락, 팔락.
‘……이거 잘 안 되네.’
아직 열네 살인지라 손바닥이 작아서 한 손으로 잡기가 어려웠다.
하물며 그 상태로 책장을 넘기는 걸 연습해야 했다.
이유야 아주 간단하다.
‘홍화연이 내 빈틈을 노릴 정도였어.’
그녀와의 경지 차이는 하늘과 땅.
진지하게 싸우면 일초반식에 쓰러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 무공사전을 살피는 짓을 하니까, 주도권이 한순간 넘어갔었다.
“미친 짓이야.”
수준이 비슷한 무인과 싸우는 도중에 무공사전을 살핀다?
목이 날아가도 억울하지 않을 일이다.
염라대왕도 혀를 차며 뒈질 짓을 했다고 꾸짖을 터였다.
그러니 익숙해진다.
한 손으로 무공사전을 쥐고서 빠르게 살피는 버릇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직접 익힌다는 건 어떤 걸까?’
홍화연에게 승리하고서 얻은 홍가권이라.
서문경은 홍가권의 책장을 펼치고서 정신을 집중했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신비한 무공사전으로 이것저것 시험해 볼 때랑 비슷했다.
“아, 이거 참.”
누굴 붙잡고 싸워 봐야 하나?
서문경이 주백경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주먹을 휘두른 순간이었다.
“……어?”
정권을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저 막연히, 몸을 풀 듯 주먹을 앞으로 던졌다.
내관혈에서 흐른 진기가 소부혈과 노궁혈을 자극한다.
후웅―!
바람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홍가권 특유의 권압(拳壓)이 대기를 찢고 뭉갰다.
서문경은 자연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
하단전에서 치솟은 진기가 오른쪽 어깨 삼각근을 좁혔다.
견료혈에서 내달린 진기가 팔꿈치로 향한다.
따악!
팔꿈치가 일 점을 때리는 감각.
주법(肘法)이었다.
뭔가 어색하고 어설프지만, 멀리서 본 홍가권의 권로가 자신의 팔을 감쌌다.
“……하하.”
서문경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공사전이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고서 움직임을 보조하는 느낌이었다.
홍가권의 초식을 완전히 익히는 순간까지.
왠지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엔 고서를 들고서 싸우는 미친놈으로 보겠지?’
상관없다.
어차피 서문세가의 직계인 이상, 무림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그딴 걸 신경 쓰느니 무공사전의 용법이 중요해.’
다른 사람의 눈을 왜곡해 버리는 요물.
정확한 사용 방법을 모르면 언젠가 먹힐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경각심을 일깨운 서문경은 여러 가지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텁.
무공사전을 덮고서 팔을 휘둘렀다.
평범한 주먹질이 허공을 때렸다.
팔락!
다시 펼치고서 일보, 일권.
홍가권의 권압이 허공을 뭉갰다.
완성도는 떨어졌다.
그저 서문경의 경지가 홍화연보다 더 우월해서 강하게 펼쳐졌을 뿐이었다.
“재밌네.”
설마 홍화연이 무작정 건 싸움 때문에 무공사전의 사용법을 알게 될 줄이야.
서문경은 히죽 웃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걸 종합하면…….’
-첫째, 어떤 상황에서도 신비한 무공사전은 훼손되지 않으며 남들에겐 오래된 책으로 보인다.
-둘째, 상대를 꺾으면 무공을 사전에 수집한다.
-셋째, 수집한 무공은 직접 익히거나 책장을 소모해서 즉시 펼칠 수 있다.
책장을 소모해서 즉시 펼친다?
이건 직접 써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웠다.
잘된 일이기도 했다.
홍가권은 어디까지나 홍가의 기본 무공.
직접 익혀서 쓸 가치가 없다.
서문의 가전 권법이 수십 배는 뛰어났다.
“일단 홍가권은 버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문경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기가 한가득 담긴 눈빛.
인상을 찌푸린 홍화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서 가까이 다가왔다.
“경이 오라버니. 대답하세요.”
‘……망했다.’
서문경은 어색하게 웃었다.
* * *
‘잘못 본 게 아니었어.’
홍화연은 입술 안쪽을 씹었다.
헐렁한 옷깃, 묶지 않고 지저분하게 둔 머리카락.
감히 흉내조차 불가능한 움직임까지.
어제 눈으로 각인한 서문경이 맞았다.
떠나기 전에 죄송하고 고마웠다며, 작별의 인사를 남기고 떠날 작정이었다.
분명히 그럴 생각이었는데.
“홍가권을 버려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해야.”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아빠한테 이를 거예요!”
엄포를 놓듯 말하니 서문경의 말간 눈동자가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에 분노와 배신감이 다른 감정으로 쏠리는 걸 느꼈다.
재밌었다.
무공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가 난처해하는 모습부터 자기를 달래려는 노력까지 말이다.
‘이거라면…….’
다시 한번 싸울 수 있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이번엔 적당히 봐주거나 가르침을 줄 거란 기대감.
홍화연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뺨을 부풀렸다.
누가 봐도 토라진 아이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쩝, 그게 말이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겨뤄요!”
“뭐?”
“그, 지도라도 해 주면 좋고요!”
마지막까지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했는데 혀를 씹어 버렸다.
너무 긴장한 탓이다.
홍화연은 팔짱 낀 손을 꽉 쥐었다.
“거절하시면 진짜 아빠한테 이를 거니까요!”
“정말 그걸로 끝내줄 거야?”
“그, 그…… 그럼요!”
“오호.”
난처해하던 표정을 갑자기 확 바꾸는 서문경.
그 모습에 홍화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음험한 계획에 말려든 느낌이었다.
“그, 이상한 짓을 하면 가만히 안 둘 테니까요!”
“알아. 내가 설마 애한테 그러겠냐?”
“누가 누굴! 오라버니도 비슷하거든요!”
“아, 그랬지.”
자기는 아이가 아닌 것처럼 뻔뻔하게 구는 표정은 여전하다.
홍화연은 이번에야말로 서문경의 콧대를 꺾을 기회라고 여겼다.
‘안 그래도 파혼당한 것도 서운했는데…….’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서문경과 얼마나 만났다고 서운하지?
자주 만난 것도 아니고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인사하지 않았나?
기분이 이상했다.
홍화연은 고개를 크게 흔들고는 정권을 내질렀다.
“선공은 저예욧!”
시작, 이라고 호명하는 일도 없었다.
저 뻔뻔한 얼굴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든 허를 찔러서 이기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적나찰이네.”
이미 예상했다는 듯 팔뚝을 손등으로 밀어내고, 발목을 툭 쳐서 균형을 흔든다.
‘또, 또……!’
똑같은 수에 당할 순 없다.
홍화연은 붉어진 얼굴로 내공을 운용했다.
기우뚱거리던 몸이 강제로 멈췄다.
“뭐가 적나찰이야!”
영문도 모를 소리나 하고!
홍화연의 파자권이 앞으로 내질러진다.
단창의 위력이 담긴 일격이 두 치 거리를 순식간에 돌파했다.
그 순간을, 서문경이 관찰하고 있었다.
‘또……?’
다시 엎어지는 걸까?
홍화연이 어금니를 꽉 깨무는 사이에, 서문경이 왼손을 움직였다.
팔락…….
책상 사이를 손가락으로 찔러 넣고서 옆으로 넘기는 과정.
홍화연은 진심으로 저 책을 찢고 싶었다.
싸우는 도중에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됐다.
바로 그때.
서문경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한다.”
너무 작은 목소리.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율이 전신을 스쳤다.
‘뭐야.’
뭔가가 펼쳐진다.
그것만 알았다.
불길하고 어두운 예감이 홍화연의 시야를 더럽혔다.
그다음.
“당신!”
고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도저히 믿기질 않아서 눈을 부릅떴다.
파자권.
그것도 홍가권의 방식으로 펼쳐진, 고유(固有)의 권로.
쩌억!
두 파자권이 부딪쳤다.
홍화연은 지기 싫은 마음을 한가득 품고서 서문경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대체 어떤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는데, 그의 얼굴이 이상했다.
‘……뭐야?’
자기가 뻔뻔하게 남을 흉내 내곤 왜 저렇게 깜짝 놀랄까?
홍화연은 어이가 없었다.
“또 나를 놀리려고!”
“아냐, 그런 거.”
서문경이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그 모습에 속으로 생각했다.
‘놀리려는 게 아니라면서 왜 홍가의 파자권으로 맞부딪친 거야?’
재능 있는 무인의 기만이다.
홍화연은 눈살을 찌푸리곤 주먹을 거뒀다.
배울 것은 존재했다.
서문경이 펼친 파자권엔 자기보다 더욱 뛰어난 속도와 안정된 배분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꿀 순 없었다.
“다음에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거예요!”
“…….”
“이전의 무례는 이것으로 잊어 주죠!”
“네 홍가권, 생각보다 뛰어났어.”
그 말에 홍화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두 번이나 이 초식 만에 이긴 사람이 저렇게 평할 줄이야.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알아요! 저 이제 가요!”
본심과는 다른 말이 나왔지만, 정정하지 못했다.
홍화연은 재빨리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 * *
“허.”
연무장에 홀로 남은 서문경은 신비한 무공사전을 보았다.
홍가권의 책장을 소모하여 펼친 일 초식.
그건 분명히 완벽하게 익혔을 때 나타날 위력이었다.
내공을 적당히 빼지 않았다면 홍화연의 손가락이 부서졌을 터였다.
‘효과, 확실하네.’
책장을 소모하면 직접 익히지 않고도 완벽한 초식을 펼칠 수 있다.
문제는 그만큼의 대가가 있었다.
[홍가권의 책장을 소모하였습니다]
[소모한 홍가권은 다시 수집할 수 없습니다]
‘화연이 덕분에 참 많은 걸 알게 됐네.’
이걸 모르고 귀한 무공을 소모했다면 피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서문경은 홍화연이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저대로 보내면 안 되겠지?”
파혼했어도 홍가의 귀한 여식이 아닌가.
앞으로 볼 일이 더 생길지도 모르는데 불손한 놈으로 찍히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마중은 나가자.
서문경이 서둘러 홍화연을 뒤쫓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