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6화 (5/250)

홍화연 (1)

홍가(紅家).

서문세가에는 미치지 못하나 전쟁마다 선봉으로 자리해 온 군문의 명가였다.

황제가 친히 칭호를 내리기를, 적갑(赤鉀).

가장 용맹한 무훈을 올린 명가지만 단순 무식하여 군문의 팽가라 불리기도 했다.

그 홍가가 당대에 이르러 큰 고민이 있었다.

-대장군이 성별을 잘못 타고났다.

-이럴 줄 알았다면 서문세가와의 약혼을 미루었을 텐데.

누구보다도 가장 뛰어난, 압도적인 재능.

그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서문세가와 혼처를 잡아서 무를 수도 없었다.

홍가의 가주는 그저 나날이 성장하는 딸자식을 보며 시름시름 앓았다.

“서문의 소가주에게 흠잡을 곳은 없나?”

“일신의 무공이 뛰어나 아이들을 납치하려던 괴한들을 호위와 함께 제압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도 제법 하는구먼.”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놀랐다.

서문세가가 아무리 유서 깊은 명가라고 한들 홍가처럼 용맹하진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소년의 몸으로 괴한을 물리친 실력과 담대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약혼자로 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터였다.

……자식이 너무 잘나지만 않았다면.

‘그래도 내 딸이 더 낫지.’

호위 없이 혼자서 일기당천의 무예를 뽐내지 않았을까?

홍 가주가 딸 생각에 히죽거리고 있던 그때였다.

“가, 가주님! 서문세가에서 급보를 보내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약혼에 관해서 이야기를 따로 하자는데…… 소문으로는 소가주가 파혼을 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뭐라?”

홍 가주는 기가 찼다.

소문이라지만, 금지옥엽 같은 딸을 스스로 걷어차겠다니?

하지만 그저 소문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설마 간을 보는 건가? 서문가주…… 그렇게 안 보였는데.’

홍가에서 파혼했으면 했지, 서문세가가 먼저 꺼낼 줄이야.

홍 가주의 고민이 깊어졌다.

“후우…… 이걸 어찌 전해야 할까?”

가진 재능만큼 자존심도 무척 강한 딸이었다.

서문세가가 파혼을 고민한다면 당장 그러자고 할지도 모른다.

홍 가주는 한숨을 내쉬며 식솔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찌하면 좋겠나?”

“서문세가가 급보를 보냈으니 직접 가 보는 것이 옳습니다. 파혼 이야기는 숨기지요. 아직 소문일 뿐이니까요.”

“자네가 생각해도 역시…… 좀 그렇지?”

딸자식의 성격을 두고 험한 말을 하기가 그렇다.

홍 가주의 의향을 알아차린 식솔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은 말하지 않고 조용히 출발하지요.”

“자네만 믿겠네.”

홍 가주는 식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차와 패물을 챙겨 주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서문경이죠?”

홍 가주의 믿음은 지켜지지 못했다.

* * *

난데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

서문경은 아니꼬운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내가 서문경인데, 왜?”

“그쪽이 파혼을 원한다고 들었어요.”

“아.”

이제야 누군지 알았다.

자신의 약혼자인 홍화연(紅和然).

아직 열두 살임에도 무공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불과 사나흘 전까지는.

“마인을 일망타진했다고 들었는데, 애초에 군문의 소가주가 납치를 당하는 게 말이 되나요?”

대놓고 자신을 도발하려는 의도가 깔린 물음.

그 말을 들은 서문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저 귀여웠다.

“부러워?”

“……예?”

“그 자리에 네가 있었으면 똑같이 활약했을 것 같지?”

“…….”

역으로 의표를 찔린 듯 당황하는 홍화연.

그녀에게 서문경은 진심을 담아서 조언했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만만치가 않았어. 가문에서 어른이 설렁설렁 봐준다고 진짜로 강한 게 아니야.”

무공에 재능이 있다고 한들 결국 사투를 겪은 건 아니다.

하물며 아직 열두 살이지 않나.

자길 진심으로 죽이려는 무리와 마주하면 몸이 굳을 수밖에 없을 나이였다.

서문경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나 소가주에서 내려왔다. 이제 그냥 일공자야.”

“……인정할 수 없어요.”

“응?”

“그만한 공을 세웠는데 왜 내려가나요? 파혼은 또 무슨 소리고요?”

“그거야 내 마음이지.”

“……내 마음엔 안 들어요.”

주먹을 꽉 쥔 홍화연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자길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눈에서 언뜻 보였다.

‘아, 역시 홍가네.’

절대 대화로 끝나지 않는다.

일단 싸우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군문인 홍가나 무가인 팽가나 그 점은 똑같았다.

귀찮음을 느낀 서문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릴 사람은 없어 보이네.’

문지기를 비롯한 다른 하인들이 자신과 홍화연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뭐, 그럴 만도 했다.

약혼한 사이에 칼을 들이밀진 않을 테고, 파혼을 꺼낸 자신이 무정하게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미래를 아는 서문경으로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의 적나찰(赤羅刹)이라.’

한번 심통이 나면 피를 볼 때까지 싸워 대서 무림인마저 꺼리는 고수.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진 걸로 하면 안 되겠지?”

“잘 아시네요.”

저벅, 저벅.

어느덧 홍화연과의 거리가 세 걸음.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 서문경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잠깐. 책 좀 내려놓자.”

“그러세요.”

신비한 무공사전을 든 채로 싸울 순 없으니, 일단은 바닥에 두자.

그렇게 생각하고 왼손을 봤는데…….

‘언제 바뀌었지?’

어떤 짓을 해도 백지였던 신비한 무공사전.

한데 지금은 시뻘건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홍화연 – 열두 살]

[삼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움직임에 기발함이 존재한다. 적심(赤心)의 권로를 주의하라.]

[보유 무공 : 홍가권(紅家拳)]

이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서문경은 왼손으로 무공사전을 쥐고서 말했다.

“이대로 하자.”

“……예?”

“내가 두 살 더 많잖아. 한 손 정도는 양보할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화연이 짓쳐 들었다.

스슥, 쿵!

진각에서 이어지는 권장술은 둔탁하고 직선적이었다.

말 그대로, 거짓 없이 참된 마음.

적심이 담긴 일격.

“엇, 어엇!”

하인들이 홍화연의 선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나 서문경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 치에서 두 치.

숨소리가 맞닿는 거리.

비좁은 공간 속에서 서문경은 홍화연의 주먹질을 똑바로 보았다.

‘파자권(把子拳)인가.’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려 단창(短槍)의 위력을 꾀하는 권장술.

그걸 본 서문경은 오른 손목으로 기교를 부렸다.

측면으로 힘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능수능란하게 펼쳐진 화경(化境)의 일초였다.

“……!”

홍화연의 몸이 옆으로 우뚝 기울었다.

그녀가 파자권의 힘을 미처 수습하지 못했을 때, 서문경의 시선이 무공사전으로 향했다.

[구수(鉤手)]

단 두 음절.

그것을 확인한 서문경이 다시 홍화연을 직시했다.

“싸우는 중에, 어딜 봐.”

자존심이 크게 상했는지 입술을 깨문 모습.

홍화연이 손가락을 모아서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목을 구부렸다.

낫 혹은 갈고리를 형상화한 권장술.

구수를 펼치려는 것이 분명했다.

‘상대가 펼칠 무공을 예지할 수 있는 건가?’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일어난 걸 부정할 수도 없었다.

후웅!

서문경은 밑에서 아래로 휘둘러진 구수를 가볍게 피했다.

괘(掛)의 기예라.

겨우 열두 살인 애가 홍가권을 아주 제대로 배웠다.

‘난생처음 당한 화경에 당황할 법한데, 파자권을 구수로 변화해서 역공이라.’

기발하긴 했다.

확실히, 어린 나이에 칭송받을 만한 재능을 가졌다.

‘나만 아니라면 말이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관존으로 불렸던 자신에게 어찌 이길 수 있겠나?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괴롭히고 싶지도 않았다.

서문경은 홍화연이 다치지 않게끔 끝내기로 했다.

툭.

아주 가볍게, 돌부리를 건드리듯이.

홍화연의 발목 뒷쪽 곤륜혈을 발끝으로 밀었다.

그러잖아도 파자권으로 흐트러진 균형을 구수로 전환했으니, 사소한 공격으로도 무너질 자세였다.

“으읏……!”

필사적으로 버텨 봤지만 결국 쓰러지는 건 매한가지다.

오히려 그냥 넘어지는 것보다 더더욱 크게 엎어졌다.

얼굴을 땅바닥에 긁힐 정도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알지?”

가볍게 제압만 하려던 것이 이렇게 될 줄이야.

서문경은 곧바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긴 했지만, 잘 달래서 돌려보내야 했다.

하지만 홍화연의 얼굴은 이미 홍시처럼 익은 상태였다.

“괘, 괜찮아요. 저 혼자 일어날 수 있어요…….”

엎어진 자세 그대로 몸을 일으키는 홍화연.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굴욕적으로 지리란 생각은 아예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귀엽네.’

약혼자보단 나이가 한참 차이 나는 여동생처럼 보인다.

어설픈 모습이나 꿋꿋이 이겨 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까지 말이다.

서문경은 홍화연의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주었다.

“이제 좀 풀렸어?”

“……네.”

홍화연이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제가, 그, 감정 조절이 서툴러서요.”

‘얼마나 서투르면 보자마자 싸움부터 걸어?’

실소가 터졌다.

홍가는 홍가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화보단 비무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성격.

군문의 팽가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생각을 정리한 서문경은 마차에서 서둘러 달려오는 남자를 보았다.

“소, 소가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진즉 말렸어야 했는데!”

낯이 시퍼렇게 질려서는 곧바로 허리를 숙이는 모습.

홍화연과 함께 온 걸 봐서는 홍 가주를 대신하여 온 남자 같았다.

서문경은 일단 그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됐습니다. 다친 곳도 없고, 이제 저는 소가주도 아닌걸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제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소가주의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말입니다.”

“……!”

적잖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큰 공을 세운 자신이 소가주에서 물러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제 다들 적당히 놀랐으면 좋겠네.’

서문경은 저런 반응이 점점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무공사전을 보았는데…….

[홍가권, 수집 완료.]

“……허억!”

지금까지 본 누구보다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 *

“아들아.”

“…….”

“경아.”

“…….”

“서문경!”

서슬 퍼런 고성이 가주실의 벽을 강타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서문경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서문이현이 자신을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뭐에 정신이 팔려 있느냐?”

“죄송합니다.”

파혼이고 뭐고 지금 당장 신비한 무공사전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

이 속내를 밝힐 순 없었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표정이 굳은 홍 가주의 대리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일공자님, 재고하실 순 없겠습니까?”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파혼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께서 잘못하신 바가 있으니 파혼의 대가는 넘어가도록 하지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홍 가주의 대리인.

홍가에서도 파혼을 원한 듯했다.

이때 한 줄기 전음이 귓전을 스쳤다.

-묘하구나. 미리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이야.

-아버지도 그렇게 느끼셨군요.

전음에 전음으로 대답하니 서문이현이 순간 주춤했다.

-……언제부터 전음을 배웠느냐?

‘아차차.’

지금은 전음은커녕 가전무공의 기초도 모두 못 뗀 수준이었던가?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만들 수도 없다.

서문경은 눈을 두어 번 끔뻑이고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했다.

-아버지랑 대화하고 싶어서 해 봤습니다.

-…….

-제가 좀 뛰어난 걸 어찌합니까.

-……너는, 참.

언제 그렇게 속이 시꺼메졌느냐.

표정만 봐도 하지 않은 뒷말이 보였다.

서문경은 그것을 모르는 척, 애써 고개를 돌렸다.

“홍 가주님껜 제가 언젠가 찾아가서 사죄하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 전하겠습니다.”

너무나도 후련한 대답.

홍 가주의 대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문이현에게 예를 표하고는 떠났다.

그것을 본 서문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본론을 꺼냈다.

“이제 천무학관으로 떠나도 되죠?”

“벌써? 조금 쉬었다가 가도 되지 않겠느냐?”

“사내가 마음을 먹었으면 즉시 행해야죠.”

“그곳에 뭐 보물이라도 숨겨 놓았느냐?”

서문이현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문경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살폈다.

전형적인 낚시꾼의 태도였다.

무심한 척, 관심 없는 척하면서 본심을 떠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똑바로 직언했다.

“보물, 있죠.”

“뭐라고?”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게 있어요.”

서문이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속으로 천무학관에 뭐가 있는지 떠올리고 있을 터.

하지만 자신이 얻고자 하는 보물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신비한 무공사전만 있으면…….’

천마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경지.

신화경에 오를지도 모른다.

서문경은 속으로 씨익 웃었다.

“천무학관에 보내 주세요. 저를 소가주로 앉히는 것보다 더욱 좋은 선택이 될 테니까요.”

그 말에 서문이현이 긴 시간 동안 고민에 빠졌다.

이제 겨우 열네 살인 서문경.

저 아이를 험난한 무림의 영역에 보낸다는 게 망설여졌다.

하물며 천무학관에서 서문세가의 일공자를 곱게 대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무림은 위험하니 주 무사와 함께 가거라.”

서문이현은 자신의 아들을 믿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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