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무공사전 (5)
방으로 돌아온 서문경은 서문이현에게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하나, 서문이현은 신비한 무공사전을 모른다.
-둘, 신비한 무공사전은 남들에게 고서로 보인다.
‘신비한 무공사전이 나중에 발견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눈을 희롱하는 요물이 평범한 책일 리가 없다.
서문경은 신비한 무공사전을 침구에 내려놓고서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놈! 얼른 정체를 밝히지 못하겠느냐?”
이런다고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지만, 그냥 해 봤다.
그 외에도 책을 쿡쿡 찔러 보고 아까처럼 책장을 훑어봤다.
“……쓰읍.”
여전히 백지다.
무슨 짓을 해도 똑같을 것 같아서 죽기 직전에 했던 것처럼 겉면에 손바닥을 대봤다.
텁.
“됐나?”
어림도 없다.
어려서 그런지 손바닥이 작네, 하는 생각만 들었다.
서문경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요물이면 뭐라도 적혀 있든, 말을 걸든 해야 하는 거 아냐?”
그 왜.
저잣거리에 나도는 영웅담이나 병기 전설을 보면 주인에게 말을 건다든지 적재적소에 도움을 준다든지.
신비한 무공사전이 그런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과거로 되돌려진 이유가 이 책에 있으리라고, 그렇게 여겼건만.
“어림도 없네.”
아무래도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서문경은 금방 싫증을 내고는 물이 든 통을 집었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적시면…… 어떻게 되지?”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겉면의 시뻘건 손바닥 자국에는 피가 말라붙은 흔적조차 없었으니까.
쪼르륵…….
물통을 기울여서 아주 조금씩 무공사전을 적셨다.
그 결과는 아주 놀라웠다.
“이게 무슨.”
물이 아예 닿지 않고 흘러내렸다.
양이 적어서 그런가 싶어서 한꺼번에 쏟아 내도 침구만 젖고 끝났다.
“……이건 이름값 하네.”
‘무공사전’은 몰라도 ‘신비’하긴 하다.
남들이 보면 두려워할 광경이었으나 서문경의 눈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어차피 죽다 살아난 몸.
요물 하나쯤이야 기꺼이 웃으면서 들고 다닐 각오가 있다.
서문경은 창가를 보았다.
어느새 술시(戌時 : 19-21시)였다.
“내일부터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서문경은 신비한 무공사전을 향해 선전포고했다.
* * *
이른 아침.
“크흠, 흠.”
서문경의 방 앞에서 주백경은 헛기침으로 목을 풀었다.
어제 충성을 맹세한 이후로 첫인사.
얼굴을 마주하는 데 사소한 흐트러짐도 있어선 안 됐다.
촤악, 촥!
조금 구겨진 옷깃을 펴고 다시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서 정리했다.
“좋아.”
남들에겐 고리타분한 모범생이라 불리지만, 이게 기본적인 예의 아니겠는가?
주백경은 맑은 미소를 빼물며 문을 두드렸다.
“공자님, 계십니까?”
“공자님?”
아무리 기다려도 기척이나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서문경은 아침잠이 많아서 이 시간까지 침구에 누워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다경을 더 기다려 봤지만, 여전히 고요했다.
방에서 나간 걸 확인한 주백경은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평소랑 달라지셨어.’
체구와 공력의 차이를 편술로 메꾸던 전술과 침착함.
열네 살 소년의 수준이 아니었다.
서문경의 재능이 보통이 아닌 건 알았지만, 그땐 경험까지 장착한 것처럼 보였다.
역시 모시길 잘한 것 같다.
주백경은 부드럽게 웃으며 서문경이 갈 만한 곳을 돌아봤다.
그런데.
“……없으시다고?”
“예. 일공자님께선 연무장에 오시지 않았습니다요.”
“이상하군.”
주백경은 발걸음을 돌리며 턱을 매만졌다.
서문세가의 소가주가 되기 위해 손바닥에서 피가 날 정도로 수련하던 서문경이 연무장에 없다니?
하물며 다른 곳을 안 가 본 것도 아니다.
후원이나 마당, 밥 먹는 곳까지도 모두 가 봤다.
‘설마 거긴가?’
서문경이 무의식적으로 가지 않았던 곳.
소가주의 자리를 위해서 아예 외면했던 단 한 사람.
주백경은 얼굴을 굳히곤 세가 내의 별채로 향했다.
“설마 해코지하려고 오신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일공자님도 아직 아이인데…….”
한껏 예민해진 귀가 하인들의 대화를 잡아냈다.
역시나 서문경이 향한 곳은 별채였다.
가주의 후처(後妻)와 이공자가 살아가는 장소.
이공자와 안면을 터 본 적도 없기에 주백경의 거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이제 열 살이라고 하셨던가?’
서문경이 무공의 재능을 가졌다면, 이공자는 영민한 머리.
어린 나이임에도 학문에 뜻을 가졌다고 들었다.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 또한 빠르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주백경은 가문 내의 하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얼핏 듣기로 공부를 강요한다고 했지.’
어린아이가 어떻게 스스로 학문에 뜻을 가지겠나?
옆에서 시키니까.
진위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평소 이공자의 처지를 동정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는.
‘도련님께서 소가주를 포기했으니, 이공자님한텐 기회겠군.’
소가주의 자리가 자연스레 가까워진 셈이다.
생각을 정리한 주백경은 하인들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허, 헉!”
“……흐읍!”
언제부터 있었냐는 듯,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는 그들.
심하게 꾸짖으려는 마음은 없었다.
주백경 자신이 서문경의 호위라면 저들은 이공자의 사용인이니까.
다만 한 가지 경고는 심어 두기로 했다.
“이공자님을 모시는 충정은 이해하지만, 자리에 없는 사람을 논하지 말게.”
“주, 주의하겠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주백경은 가볍게 끄덕이곤 안쪽으로 향했다.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두 소년의 웃음, 무언가를 짓밟고 찢는 소음.
‘……쫘작?’
형제끼리 웃는 거야 당연하지만 웬 소음이란 말인가?
주백경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흐흐, 어때? 쌓인 게 좀 풀리지?”
“하하! 네, 형!”
킬킬 웃는 서문경과 오래된 책을 짓밟아 대는 이공자.
주백경의 머릿속에 의문이 수십 개씩 떠올랐다.
언제 저렇게 사이가 좋아졌으며.
학문에 뜻이 있다던 이공자가 왜 책을 훼손하고 있나?
하물며…… 이제는 붓으로 낙서까지?
“……허?”
정신이 혼미해졌다.
서문경에게 첫인사를 흐트러짐 없이 하겠다는 다짐도 무너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
가슴부터 뭔가가 울컥거렸다.
고리타분한 모범생이라 불린 이유가 이거였나 싶었다.
주백경은 잠깐 고뇌하곤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만 멈추십시오!”
“아, 호위 왔는가?”
서문경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왠지 모르게 시정잡배처럼 느껴지는 손짓.
느물느물 웃는 표정도 뭔가 아이답지 않았다.
‘……도련님께 무슨 생각을 품으려는 거냐. 차분하게 말해 보자.’
주백경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서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책인진 모르겠으나 이공자님이 훼손하게 두신 겁니까?”
“그래.”
“형제끼리 노는 것이야 상관하지 않겠습니다만, 책을 저렇게 다루는 건 교육이나 정서에 좋지 않습니다.”
“괜찮아. 가끔 이렇게 화도 풀고 그래야 능률이 오르지.”
“……예?”
“너도 대충 알잖아. 이 녀석, 온종일 책만 붙잡는 거.”
“…….”
주백경은 할 말을 잃었다.
서문경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공자가 품은 화나 짜증을 해소할 방법이 필요해 보이긴 했다.
근데 불현듯 서문이현의 말이 떠올랐다.
-경이가 얼마나 영악한지 모르는가?
‘가주님의 말이 옳았구나.’
이유가 꽤나 그럴듯하지만, 결국은 책을 훼손하는 짓이 아닌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주백경은 다시 서문경의 표정을 보았다.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이었다.
‘그냥 보통 아이로 생각하면 안 되겠어. 내가 못 버티겠다.’
마음을 재차 무장하려는 순간.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주 호위.”
“예.”
“내가 지금까지 동생한테 섭섭하게 굴었잖아. 아무리 배다른 동생이라도 말이야.”
“…….”
“소가주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소학부터 펼친 애잖아. 이제부터 챙겨 주려는 거고, 버려도 되는 책을 가져온 것뿐이야.”
마치 예전부터 품은 후회를 토해 내듯.
서문경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진솔했다.
적어도 철없는 소년이 즉석에서 지어낸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백경의 생각은 여전히 같았다.
“그래도 책을 훼손시키는 건 안 됩니다.”
“아, 거의 다 넘어왔는데.”
“……예?”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동생아! 다음에 놀자!”
서문경은 아주 자연스럽게 고서를 챙겨서 떠났다.
마치 자기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천연덕스러웠다.
“…….”
주백경은 이제 어이가 없어서 서문경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다 옆에 있던 이공자가 말을 걸었다.
“모처럼 재밌었는데.”
“이공자님, 아무리 그래도 말입니다.”
“주백경 무사님은 소문대로네요.”
왠지 모르게 찝찝한 소리를 하고서 떠나는 이공자.
홀로 남은 주백경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이상한 건가?”
이게 열네 살, 열 살 아이들이 맞나?
주백경은 처음으로 인생 살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품었다.
* * *
“우리 호위는 다 좋은데 사람이 너무 고리타분해. 모범생도 저런 모범생이 없어.”
서문경은 신비한 무공사전을 옆구리에 껴안고서 투덜거렸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전생에선 이공자, 서문휘와의 관계가 최악이었으니까.
‘너무 냉정하게 굴었었지.’
소가주가 되기 위해서 아예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게 은연중에 상처가 되었는지, 나이를 어느 정도 먹었을 땐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소가주와 이공자.
전생에선 형제가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이번엔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신비한 무공사전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요물이라 그런지 묘하게 보호 본능을 일으키나 보다.
서문이현도 그렇고 주백경도 무공사전을 귀한 책 대하듯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서문경은 쩝쩝거리며 서문휘가 한참 동안 짓밟고 낙서한 책장을 확인했다.
“회복하는 게 아주 빠르네?”
발로 짓밟나 붓으로 낙서를 하나 다시 백지로 변해 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찢거나 태우거나.
두 가지 고민거리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다.
‘그건, 찢으면서 태우면 된다.’
몸이 어려서 그런지 정신도 유치해지는 기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관존으로 살 땐 행복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웃는 게 쉬웠다.
“그나저나 대장간이 어디에 있더라?”
군문은 무림의 세가와는 달리 무기를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하물며 서문세가는 군문 중에서도 명가.
한철도 녹일 수 있는 용광로까지 존재했다.
“마지막 내구성 시험도 지나갈 수 있을까?”
이제는 무공사전에 말을 거는 것도 제법 익숙하다.
서문경은 빙긋 웃으며 본채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일공자님께선…….”
“잠시만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서문세가의 정문.
지체가 높은 사람이 방문한 건지, 장식이 화려한 마차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래.”
설마 엊그제 해결한 사건을 치하하기 위해서?
서문경은 마차로 천천히 다가갔다.
기대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뛰어난 영약 혹은 신병이기.
자소단에 이어 하나만 더 얻는다면 아주 큰 선물이 되리라.
저도 모르게 싱글벙글 웃고 있는데 마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음?”
아주 대놓고 자신을 노려보는 양 갈래 머리의 여자.
누가 봐도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적의라고 봐도 좋았다.
‘나한테 뭐 원수라도 졌나?’
서문경이 여자와 마주 노려보던 그때.
스르륵…….
백지뿐이던 신비한 무공사전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