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무공사전 (4)
“한데 하나만 물으마. 왜 천무학관이냐?”
서문이현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소가주가 되어서 기뻐하던 아들이 갑자기 자리를 내려놓고 천무학관으로 가겠다?
사람이 바뀐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서문이현의 물음에 서문경은 궁색한 미소를 지었다.
‘천무학관이 무너지게 된다고 하면 오히려 좋아하실 텐데…….’
마교가 일으킨 대형 사건 중 하나.
천무학관의 몰락.
서문이현은 무림의 힘이 줄어드니까 좋아하겠지만, 서문경에겐 아니었다.
그 미운 천마 새끼를 죽이기 위해서는 무림의 힘도 필요했다.
-준호가 살아 있었다면 화산파는 달라졌을 거요. 관존.
대표적으로 연준호.
약관이 되기 전에 매화검법에 매향의 검형을 일으켰다고 했다.
천무학관을 졸업하면 화산의 미래가 될 거란 평가를 받던 신진 고수였지만.
‘갑자기 천무학관이 불타고, 모두가 죽었다고 했었지.’
수십의 무사부, 그들의 몇 배인 제자들.
천무학관에서 일어난 비극이 무림의 뼈와 살을 깎았다.
다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화산파 못지않은 충격과 슬픔을 겪은 사건.
‘이걸 대놓고 말할 수가 없네.’
애초에 믿어 주지도 않을뿐더러, 서문세가에도 마교가 세작을 심었을 거라 확신했다.
서문이현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한번 패배했던 사람으로서 가지게 되는 경각심.
서문경은 그 마음을 서문이현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납치하는 놈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그놈들을 주도하는 놈도 있겠지요.”
그래서.
운을 뗀 서문경은 서문이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버지, 저는 그놈과 싸울 힘을 기르고 싶습니다.”
“기른다? 키우는 게 아니라?”
“예.”
“천무학관에 가는 목적이 일신의 무공뿐만이 아닌 게냐?”
“소가주의 자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천무학관에 있는 무림인까지 제 편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 말에 서문이현이 끈질기게 쳐다봤다.
겨우 열네 살, 속내를 숨길 수 있을 나이가 아니라고 여겼을 테지만.
내용물은 어제 바뀌었다.
어려서 실수가 잦았던 소년이 아니라, 관존 서문경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쳐다봐도 쫄거나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일식경 동안 여유롭게 웃고 있으니, 서문이현이 먼저 두 손을 들었다.
“……이제 열네 살 되는 아이가 아비한테 숨기는 게 참으로 많구나. 안 그래도 제 나이답지 않은 구석이 있었는데 말이야.”
너무 어린 나이에 어른 같은 말을 툭툭 내뱉는다.
아비로서 기꺼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마음껏 뛰어놀 나이지, 천무학관의 무림인을 자기편으로 삼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건 너무…… 어른스럽지 않나.
서문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가 너를 아이로 보겠느냐? 내가 네 아비이기에 망정이지, 남들이 들었다면 귀신이 들렸다고 의심할 것이다.”
“남들 앞에선 아이처럼 굴게요. 이렇게.”
갑자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어 버리는 서문경.
그 모습을 보니 서문이현은 기가 찼다.
“허! 이놈.”
“무인이 되고 싶어요, 아버지!”
천진난만한 웃음에서 뒤이어진 철없는 헛소리.
언제 진지했냐는 듯, 참으로 어울렸다.
서문이현의 팔뚝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도 어릴 때 꽤 조숙했다지만, 너만큼은 아니었다.”
“흐흐. 많이 그럴듯했나 보죠?”
“허허, 영악하기만 했던 게 언제 이렇게…….”
무공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잡기에도 능한 모습.
겉모습은 아이인데 속은 노장군이나 노강호와 다를 바 없다.
서문이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언제 이렇게 큰 거냐. 아비로서 자주 지켜봐 주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
서문경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비로서 자주 지켜봐 주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서문이현에게 생애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
그래서 눈에 피가 쏠렸다. 입술을 떼는 것도 힘겨웠다.
“……저.”
“왜 눈이 붉어진 것이냐? 그리 섭섭했던 것이더냐?”
“그게 아니라.”
“그래. 부끄럽겠지. 앞으로는 자주 대화하자꾸나.”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 말에 서문이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아이긴 했구나, 하는 시선.
서문경으로선 억울했다.
나쁜 오해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애 취급은 받기 싫었다.
“아버지!”
“이해한다. 이제 잘 때도 되었으니, 자리를 비켜 주마.”
“이야기를 더…….”
“약혼자는 가까운 시일 내에 방문하도록 전해 보마. 서문의 명예가 상하지 않게 정중히 거절하거라.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소가주에서 물러나게 해 주마.”
서문이현은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 내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끼익, 탁.
홀로 남은 서문경이 닫힌 문을 모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부모의 관심이 고픈 아이가 되어 버렸단 말인가?
나이를 까마득하게 먹은 자신이!
“으악!”
앞으로 사나흘은 이불을 발로 차댈 일이다.
서문경이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기척이 있었다.
“들어와!”
“소가주, 아니, 공자님.”
쿵!
다짜고짜 무릎을 꿇은 주백경.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저 때문에 소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신 겁니까? 그런 거라면…….”
“아니야.”
“공자님…… 이 죄는 제가 어떻게든 가주님의 마음을 돌려서…….”
“아니라니까!”
서문이현에게 오해받은 것도 억울한데, 이젠 주백경까지?
서문경은 주백경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잘 들어. 내가 소가주에서 내려온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야.”
“하지만, 가주님께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으셨을 거 아냐. 그치?”
“그래도 저 때문이지 않습니까?”
‘염병할.’
겨우 열네 살 아이한테 너무 과몰입하는 거 아냐?
소가주에서 물러났으면 응당 다른 사람한테 비벼 보는 것이 더 나은 길일 텐데.
“공자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주백경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이 진심을 토로했다.
“무림으로 갈 거다.”
“예?”
“그래도 따라올 거냐?”
“…….”
그 말에 주백경은 잠시 갈등했다.
무림으로 간다는 건 서문세가에서의 지위를 포기한다는 뜻.
서문이현의 눈 밖에 날 가능성이 컸다.
장군으로 가는 길이 막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따라가고 싶다.
그것이 주백경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저는 공자님의 호위입니다.”
“……허.”
오늘따라 눈물 뽑으려는 사람이 왜 이리 많냐.
서문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까처럼 붉어진 눈을 보이기가 쪽팔렸다.
“뜻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공자님!”
“이제 좀 쉬자.”
“아, 알겠습니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미리 행장을 꾸리겠습니다.”
“그래.”
“좋은 밤 되십시오!”
끼익,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서야 서문경이 눈을 떴다.
이제야 인생을 다시 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꿈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이렇게 좋은데 꿈이면 곤란하잖아.”
서문경은 비틀거리듯 일어나곤 몸을 한차례 씻었다.
아무래도 자소단을 소화하는 동안 배출된 노폐물 때문에 냄새가 심했다.
‘이걸 참은 아버지랑 주백경이 용하네.’
옷까지 갈아입고 나서 내공을 한차례 휘돌리니 몸이 엄청나게 가벼웠다.
사실상 벌모세수를 받은 셈.
히죽히죽 웃으며 검결지를 쥐고, 보법을 밟았다.
그러다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신비한 무공사전!’
천마에게 패한 뒤, 죽기 직전에 매만졌던 비급.
신비한 무공사전이 회귀에 대한 해답이 아닐까?
서문경은 심각해진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아버지가 비밀 창고에 가는 걸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 벽을 망치로 부숴 버릴까?”
가주실을 넓히고 싶었다고 해 버리면 뭐 어쩔 건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방을 돌아다니는데 책장이 뭔가 거슬렸다.
유독 튀어나와 있는 하나의 서책.
마음이 불편해진 서문경은 튀어나온 서책을 밀어 넣었다.
“일단은 신비한 무공사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급선무인데…… 한번 물어보는 게 나으려나?”
재차 고민하면서 한 바퀴.
방 안을 돌아다니는데 또 서책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본 서문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 진짜. 뭐야?”
짜증이 확 솟구쳐서 서책을 집어 본 순간.
“……어?”
서문경은 멍한 표정으로 서책의 제목을 보았다.
-신비한 무공사전
죽기 직전에 보았던 서책 그대로.
자신의 손바닥 자국이 겉면에 피처럼 시뻘겋게 찍혀 있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비한 무공사전'은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팔락, 팔락.
서문경은 무심한 얼굴로 책장을 넘겨 댔다.
이것도 두 시진 동안 수차례 해 봤다.
그냥 어이가 없고 김이 팍 새서 하는 짓이었다.
“여전히 백지잖아?”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신비한 무공사전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달라진 건 죽기 직전에 찍은 손바닥 자국.
딱 하나.
그 외엔 감촉 좋은 책장만 있었다.
서문경이 지금까지 읽어 온 어느 서책보다 질 좋은 종이였다.
그게 또 기이하고 신비했다.
“아버지한테 보여 주면 연원을 알 수 있을까?”
실보단 득이 더 크다.
그 판단으로 서문이현에게 신비한 무공사전을 보여 줬는데 반응이 이상했다.
“신비한 무공사전이라…… 난생 처음 보는 서적이구나. 그래서 이 고서(古書)는 무엇이냐?”
“예? 고서요?”
자신이 보기에는 새 책이건만.
서문이현의 손길이 누렇게 변색한 고서를 대하듯 조심스러웠다.
“손대기가 두려울 정도구나. 살짝만 대도 바스러질 것 같으니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렇게 멀쩡한 책이 어디 있다고?”
“경아…….”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서문이현.
그 모습에 농담이나 거짓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진짜로 신비한 무공사전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고서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이 책은 요물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서문경은 속내를 감추고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서문이현의 오해를 푸는 것이 중요했다.
“장난이었어요.”
그 말에 서문이현이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소가주가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자기 스스로 내려가겠다고 하질 않나, 이번에는 고서를 새 책으로 우기다니. 어쩌다가 이렇게 짓궂어졌느냐?”
하루에 생각이 열댓 번도 바뀐다는 소년이라지만, 이번에는 조금 심하지 않나.
서문이현이 얕게 차오른 화를 꾹 참았다.
그걸 곧바로 알아차린 서문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까지야 있겠느냐? 네 덕분에 주위에 있던 민가의 아이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는데 말이다.”
서문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소가주를 마다하긴 했다만, 주위에선 아직 너를 소가주로 여길 것이다.”
“다행이네요.”
“무엇이 말이냐?”
“누구도 사라지거나 다치지 않고 가족한테 돌아갔다는 게요.”
그 말에 서문이현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허, 네 나이에 그런 생각이 가능하더냐?”
“다 이게, 아버지를 닮아서가 아니겠습니까!”
“또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말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는 서문이현.
그와 마주 웃은 서문경은 신비한 무공사전을 쥐었다.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한 가지가 확실해졌다.
신비한 무공사전은 아무래도 자신만이 다룰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 요물.’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아야겠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