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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무공사전-1화 (1/250)

신비한 무공사전

신비한 무공사전 (1)

중천에 뜬 달 아래, 불싸라기가 휘날린다.

천하가 불길에 뒤덮여 푸르던 청산이 황야로 변해 간다.

마교의 기치가 무림을 불사르는 이때.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길을 걸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 절룩거리는 왼발.

패배자의 행색이었다.

현 강호의 무인이 그렇듯. 마교의 세파가 천하를 집어삼키기 전에 고향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다.

다만 눈빛에 생기가 있었다.

“……가야 해.”

사천의 성도에 확인할 장소가 있다.

오직 그 집념으로 다친 왼발을 질질 끌고서 걸었다.

여섯 시진이 흘러, 밤과 낮이 교차했다.

한때 갈대밭이었던 장소.

밤새 불타 황야가 된 길에 추레한 꼴을 한 무림인이 나타났다.

“가진 것을 다 내놓아라!”

“나도 거지야.”

사내가 자기 주머니를 손수 털었다.

재와 먼지만 나왔다.

그걸 보고도 무림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독기가 가득한 얼굴로 외쳤다.

“놈! 죽고 싶으냐!”

“처지를 바꿔 볼까?”

사내가 검을 뽑았다.

가늘게 뜬 눈에 안법의 기예를 담는다. 안광이 번뜩였다.

“가진 거 다 내놔.”

사내는 사납게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림인에게 요깃거리와 식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 시진.

익숙한 서체가 사내를 반겼다.

-서문세가(西門世家).

반쯤 부서진 현판이 눈앞에서 덜렁거렸다.

“낮네.”

어릴 때는 정문이 너무 높아, 하늘에 걸려 있는 줄 알았건만.

사내는 인상을 찡그리며 정문을 지났다.

서문세가의 장내는 무서우리만큼 고요했다.

교두에게 괴성으로 대답하는 군병도, 무뚝뚝하지만 정 많은 가족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내가 기억하는 서문세가의 정경은 이제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파스스…….

바람에 흩날린 잿가루가 사내의 뺨에 척 달라붙었다.

불쾌한 촉감이 현실을 상기시켰다.

‘천마.’

십만대산을 평정한 마인.

천마신공을 완성한 그가 중원으로 진격했고, 관과 무림이 처음으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름하여 정의맹.

서문세가는 척사멸마의 황명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누구 하나 변절하는 일 없이 정의맹은 총력을 기울였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사내는 뱀처럼 요사스럽게 빛나던 눈을 떠올렸다.

-왕(王)이든, 선(仙)이든, 신(神)이든. 신화경을 이룬 본좌에게 있어 무림의 별호란 가당찮은 소리에 불과해. 서문경, 너를 제외하고 말이지.

-지랄 마라.

-유일하게 상대할 가치가 있던 적수여, 사흘의 말미를 주마. 삶을 정리할 시간을 말이야.

천마는 그렇게 정의맹의 유일한 생존자를 두고 떠났다.

생존자의 이름은 서문경.

사내의 정체였다.

뿌득.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굴욕이었다.

‘차라리 싸우다 죽었어야 했는데.’

죄책감이, 증오가, 후회와 회한이 늪처럼 차올랐다.

천마도 이걸 노렸을 터였다.

죽이지 않고 보내서 폐허가 된 서문세가를 보도록 만든 것이다.

피 얼룩이 남아 있는 장원.

방치된 시신과 부러진 칼들.

서문경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 젠장 할.”

걷는 곳마다 늪이고, 보는 곳마다 지옥이다.

그래도 여기서 멈추어 설 수 없었다.

확인해야 할 장소가 있었다.

검소하다 못해 좁디좁은 방.

가주실로 들어서는데 문득 옛 대화가 떠올랐다.

늘 그렇듯 고집이 한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책상이랑 의자만 놔도 가득 차잖아요. 명색이 가주실인데 왜 이렇게 좁아요?

-가주의 덕목을 되새기기 위함이란다.

-검소함이요?

-이곳은 조금만 어질러져도 지저분하게 보이지. 조금 있다가, 오늘 하루만, 정리를 미루면 안 되는 것이야. 무엇보다, 늘 완벽해야 가족이 안심하는 법이다.

가주 서문이현.

나쁘게 말하면 틀에 박혔고, 좋게 말하면 책임감 있는 가주이자 강인한 무인이었다.

그 아버지가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

서문경은 말없이 아버지의 눈을 감겨 주었다.

등에는 상처가 없었다.

평생을 강조하던 성실과 완벽을 지키고 돌아가셨다.

“돌아갈 곳을 없애 놓고는 무슨, 삶을 정리할 시간을 준다는 거냐. 염병할 놈!”

이마저도 천마에게는 자그마한 유희일 것이다.

신화경에 올랐다는 그 미친놈이 느낄 수 있는 건 남의 불행이나 절망뿐일 테니까.

서문경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끝까지 나를 희롱하게 둘 것 같으냐? 천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감정에 잡아먹히진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끝까지 해 봐야 한다.

자신을 살려 둔 걸 후회하게 해 주자.

서문경은 아버지의 등 뒤에 있는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쿵, 쿠웅.

‘역시. 아버지가 말한 대로야. 벽 너머가 비어 있어.’

서문세가의 비밀 창고.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다.

-군문세가의 남자가 가질 수 있는 취미가 골동품 모으기 아니겠느냐?

-다음에 오면 너에게 줄 것이 있다. 천마와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인생의 재미라곤 아예 모르고 살았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것이 바로 수집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줄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희귀한 물건을 모아 뒀을 터.

서문경은 오른발로 벽을 후려 찼다.

쩌적, 꽈과광!

가주실의 한쪽 벽면을 무너뜨리자, 숨겨져 있던 창고가 드러났다.

“……이건.”

서문경의 눈이 이곳저곳을 훑었다.

꼼꼼하기가 병적일 정도인 아버지답게, 물품마다 표식을 해 놓은 것이 보였다.

한데 그 물품들이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대환단, 자소단, 태청단…… 무인이라면 눈이 돌아갈 영약들이 각 함에 담겨 있었다.

하물며 책장에 있는 비급들은?

십단금, 이십사수매화검법, 제왕검형 같은 절학이 필사되어 꽂혀 있었다.

‘……이게 나한테 준다는 거구나!’

영약들과 비급을 모두 챙겨서 수련한다면 지금보다 높은 경지에 오를지도 모른다.

천마와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더니만, 역시!

서문경은 가죽 주머니에 영약이 든 함들을 때려 넣었다.

하루 정도 쉬어야 하는 몸 상태지만, 천마의 추격을 회피하려면 당장 움직여야 했다.

‘돌아오기까지 이틀 걸렸으니까. 하루 남았다.’

영약에 이어 비급까지 챙기다가, 한 서책이 눈에 들어왔다.

-신비한 무공사전

다른 비급들과는 달랐다.

어딘가 헤지거나 손때 하나 없이, 새것처럼 말끔했다.

심지어 먼지 한 톨조차도 없다.

서문경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서책을 펴 봤다.

“뭐야, 이거.”

아무것도 없다.

먹물 하나, 무언가 적힌 흔적 하나 없이 새하얀 백지.

이런 걸 아버지가 소중히 보관했을 리가 없었다.

자기 물건에도 까탈스럽게 점수를 매길 사람이었다.

“일단은 챙겨 갈까.”

서문경이 신비한 무공사전을 붙잡은 그때.

등 뒤에서 가장 증오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하가 나에게 넙죽 엎드리는데, 너만은 끝까지 칼을 들이미는구나.”

“……천마.”

등골에 식은땀이 났다.

서문경은 서책을 놓고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천마가 있었다.

소림을 주먹으로 꺾고, 화산을 검으로 죽였으며, 팽가를 도로 쪼갠 신화경의 무인.

뱀처럼 요사스러운 눈이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그것이 기껍기도, 가소롭기도 하다. 몇 번을 지고도 주제를 모르는 것이냐?”

“그야, 네가 만만하니까.”

“여전히 건방진 입이로다.”

“그나저나 하루가 남았잖아! 왜 지금 찾아온 거냐?”

“본좌의 말을 믿었느냐? 서문경답지 않게 순진했군.”

“쓰레기.”

“언젠가 그 욕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어.”

천마가 희미하게 웃고는 주먹을 쥐었다.

그것을 본 서문경은 검을 쥐었다.

이제는 악연을 끝내야 할 때였다.

‘서문불퇴(西門不退).’

서문세가는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가훈에 담긴 유업이 서문경의 의지를 북돋웠다.

지금 한순간, 검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애 마지막 초식.

서문경은 껍질을 벗었다.

“단혼섬뢰.”

허공에 무수한 흔적을 남기는 단 하나의 검격.

손목의 내관혈이 타오르듯 달아올랐다.

전심전력. 평생의 적공과 다시는 손을 쓸 수 없어도 좋다는 집념까지 일검에 담았다.

서문경이란 무인의 소우주.

그 정경(情景)을 목도한 천마가 나직하게 탄식했다.

“마지막에 한 걸음이 부족했구나!”

스걱!

천마의 앞섶이 칼날에 잘려 나갔다.

그것이 전부였다.

서문경의 검은 천마에게 닿지 못했고, 천마의 일권은 서문경을 꿰뚫었다.

“……커헉!”

“서문경, 네 이름은 기억하마.”

“개 같은 소릴.”

쌍욕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가슴팍이 꿰뚫려서인지 자꾸만 숨이 샜다.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허름하던 옷이 붉게 물들고, 몸에 생기가 사라져 갔다.

서문경은 흐릿한 눈으로 자신이 만든 피 웅덩이를 보았다.

‘이렇게, 이렇게 끝날 순 없어.’

피에 젖은 손을 마구잡이로 움직였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의미 없는 발버둥조차 끝나려는 순간.

무언가가 손아귀에 잡혔다.

‘신비한, 무공사전,’

백지만 있던 정체 모를 비급.

서문경은 자기도 모르게 피에 젖은 손바닥을 비급의 겉면에 찍었다.

그것이 생애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어둠.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서문경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죽음이구나.’

모든 미련을 버리고 염라를 맞이하면 된다.

천마도, 가문도…… 이제 끝난 일이라지만, 한 가지가 걸렸다.

‘신화경이 코앞에 있었는데, 분명 한 걸음이었는데.’

만약 그 경지에 도달했다면 달라졌을까?

서문경의 입술이 비틀렸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었다.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

자신은 단지 어중간하게 끝났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염라대왕은 언제 오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나.

너무 지루해서 하품을 하려는데,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치지 못해!”

“……뭐?”

“죽고 싶은 것이냐?”

“이미 뒈졌는데, 뭘 또 죽어?”

“이런 미친놈!”

이제는 눈에 익은 어둠.

어둠 속에서 등이 굽은 노인의 형체가 보였다.

서문경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요즘 염라는 등이 굽었나?”

“허, 정신이 나간 것이냐?”

“이게 무슨 일이래. 참나.”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는데, 여러 쌍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 일고여덟 살이나 됐을까?

젖살도 아직 빠지지도 않은 아이들이 겁에 질려 있었다.

칠흑 같은 속, 공포에 빠진 아이들과 등이 굽은 노인이라.

서문경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 납치당한 거냐?”

“아해야,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무릎을 굽히지도 않았는데 아이들과 시선이 비슷했고 목소리가 이상하게 엷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손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뭐야, 이거!”

분명히 천마에게 죽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지?

어리둥절한 와중에 등 굽은 노인이 끌끌 웃었다.

“정신이 드느냐?”

“…….”

들뜨던 마음이 확 가라앉았다.

꿈처럼 여겼던 저승이 아니라, 지독한 현실로 내던져진 기분.

‘하필이면 이때를 주마등으로 떠올리다니.’

이십오 년 전.

서문세가의 소가주로 내정된 첫날.

처음으로 가문 밖을 나섰다가 험악한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납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보호자를 죽이고 아이들을 무작위로 납치했던 사건.

‘평생 기억에 남았지.’

서문경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기억이 맞는다면, 자신의 호위가 죽은 척하고 있을 때였다.

‘……역시.’

약관을 이제 막 넘은 얼굴, 피로 물든 장포.

심각한 출혈로 안색이 창백했지만, 희미하게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가 목숨을 던졌기에 어린 서문경만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때 사라진 아이들은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서문세가의 가주가 나섰음에도.

‘시간이 지나고서야 마교의 짓이라고 추측했지만, 그걸 확인하기엔 너무 늦었었어.’

후회로 깊게 남았던 어린 시절의 과거.

그때와 다시 마주하니 희미하게 웃음이 나왔다.

‘꿈이라도 좋아.’

천마에게 잿가루를 뿌렸을지도 모를 첫걸음.

어려서, 겁이 많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과거를 꿈에서라도 고치고 싶었다.

그래서.

쩌억!

노인의 낭심을 있는 힘껏 박치기했다.

“끄허억……!”

게거품을 문 노인이 풀썩 쓰러졌다.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바깥에 있던 놈들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문경은 그 방향을 주시한 채 외쳤다.

“주백경! 당장 일어나라! 서문세가의 소가주로서 이놈들을 단죄해야겠다!”

어린 시절, 자신을 살리기 위해 희생한 호위.

서문세가의 소가주는 수십 년이 흐르고 한 번 되살아났어도 그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 말에 주백경이 천천히 일어났다.

“소가주의 명을 받듭니다.”

“그래. 이 소가주만 믿어라.”

서문경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도, 이 아이들도 죽게 두지 않을 테니까!”

전생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도록.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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