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211화
211. 도와주십쇼(1)
번쩍.
빛이 휘몰아친다고 느낀 순간 백도현은 자신이 한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에 떡하니 한글로 된 간판이 나온 셈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이구나.”
휘청.
“아 진짜 이 인간.”
긴장이 풀린 백도현이 눈을 까뒤집고는 기절했다. 상혁은 그가 축 늘어지자 인상을 팍 썼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귀하게 자란 양반이니 그 정도 추격전이면 녹초가 될 만하지.”
그리곤 염력 마법으로 백도현을 받쳐 들었다. 상혁은 그런 그를 이해해 주기로 했다. 눈빛을 보니 그 정도 이해는 해 줘도 될 정도였고, 무엇보다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기구한 그의 운명 때문에라도 이 정도는 사정을 봐주기로 한 것이다.
“죗값이나 잘 치르쇼.”
상혁은 염력 마법으로 둥실 떠오른 백도현을 슬쩍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상혁은 마치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문을 따고 집 안에 들어가 소파 위에 백도현을 눕혔다.
“일호야.”
[예, 마스터.]
“누님한테 연락 좀 해 줘.”
[예.]
일호는 상혁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다. 서번트인 것을 제외하더라도 일호는 상혁의 눈빛만 봐도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했다.
그렇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백정연이 뛰어들어오자 상혁이 히죽 웃었다.
“오셨어요, 누님?”
“상혁이, 너!”
“일단은 나 말고. 여기 도현이 형님이요.”
“도현아!!”
백정연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백도현이 멀쩡하게 살아 있자 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뉴스에서도 백도현이 사고사로 사망했다고 난리가 났었고, 심지어 백정연은 장례식에 유족으로 하룻밤을 새우기도 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권력에 대한 욕망이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었다.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기에 어릴 적을 추억하며 눈물도 몇 방울 흘렸다.
그런데 백도현이 살아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백정연의 두 눈에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버젓이 살아 있는 백도현을 본 순간 백정연은 깨달은 것이다.
누군가 백도현의 사망을 놓고 장난을 쳤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상혁은 손을 내저었다.
“지난번에 그 친구분 있으시죠?”
“내 친구?”
“왜, 병원이요.”
“지예?”
백정연이 흠칫했다. 김지예의 병원에 인체 실험 희생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상혁에게서 인도받아 그녀의 신세를 졌던 것이 바로 백정연이다.
나중에 들어 보니 그곳에 CIA까지 왔단다.
김지예가 하마터면 그때 병원도 접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뻔했다면서 난리를 치는 것을 백정연이 어찌나 식은땀을 흘리며 달랬던지.
“설마.”
“저기 복권하신 노인네와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고 있는 큰형님 귀에 안 들어가려면 거기밖에 없어요.”
“많이 다친 거야?”
“조금 긁혔어요. 하지만 의사의 손길이 필요하기는 해요.”
백정연은 자신이 아끼는 소파에 피가 떨어진 것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이면 나야?”
“누님이 이 집안에서 가장 사람 냄새가 나니까요.”
“후, 말을 말아야지. 어차피 도현이에게 듣고 싶은 말도 많으니까.”
백정연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안에서 몇 번의 고성과 몇 번의 애원이 이어진 다음에야 백정연이 창백해진 얼굴로 비척거리며 걸어 나왔다.
“됐어. 가자.”
“크으, 역시 누님.”
“됐어. 하나도 안 기뻐. 너, 운전할 줄은 알지?”
백정연이 자신의 차 키를 휙 던졌다. 상혁이 그 키를 한 손으로 받아 내며 씩 웃었다.
“베스트 드라이버죠.”
* * *
끼익.
달칵.
“우, 우우우욱.”
병원의 후문 주차장에 차가 정지하자마자 조수석 문을 내리고 백정연이 내려서는 헛구역질을 했다. 그런 백정연을 보고 기다리다가 나오던 김지예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으악! XX! 이 더러운 X! 뭐 하는 거야!”
“우, 우우우욱. 지예야. 차멀미에 좋은 약 없어? 우욱!”
후두둑.
무언가 후두둑 떨어지자 김지예가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때 운전석에서 상혁이 내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안녕하셨어요?”
“유명인사 오셨네. 오랜만이에요.”
“지난번에는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런 거치고는 너무 연락이 뜸하지 않았나?”
김지예는 말을 돌려 말하지 않았다. 욕을 달고 사는 그녀답게 직설화법으로 받아치자 상혁이 하하 웃었다.
“안 그래도 근사한 선물을 준비 중이었거든요.”
“정연이 통해서 또 은밀하게 치료할 환자 태우시고?”
“아, 간단한 치룝니다.”
상혁이 뒷문을 열고는 백도현을 끌어내린 뒤 부축했다. 백도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매번 송장을 데려오는 게 치료라고 하시는 모양이네요?”
“기왕 누님의 친구시니까 그 찬스를 잘 이용해야죠.”
“뭐.”
김지예가 응급실 뒷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상혁은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지나쳐 들어가 커튼이 쳐진 응급실 뒷방에 백도현을 눕혔다.
“투덜대면서도 준비는 철저하시다니까.”
지훈은 피식 웃었다. 분명 백정연이 급할 때 김지예를 찾았으니 보나 마나 끔찍한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국 오는 것을 막지 않았으니 김지예는 전형적인 츤데레다.
차륵!
“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면 정연이가 저렇게 돼요? 링거 하나 맞으라고 했어요.”
“누님이 생각보다 멀미에 약하시더라고요.”
“어, 아닌데? 쟤 스키랑 보드도 최상급자 코스에서 타는데요?”
상혁은 천연덕스럽게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백정연의 저택부터 이곳까지 복잡한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데 상혁이 모는 차가 120km 이하로 속도를 단 한 번도 줄이지 않고 왔다고 이야기한다면 백정연을 이해할 것이다.
‘사고는 안 났잖아?’
응급환자가 있는데 이 정도쯤이야. 어차피 백정연의 차니까 딱지가 날아와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상혁의 귀에 가까이 다가온 김지예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죽은 사람을 살려오는 재주도 있었어요?”
“뭐.”
상혁이 데려온 사람이 백도현이란 것을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죽었다고 뉴스에까지 난 백도현이 살아 있었으니 김지예가 놀라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이번에도 귀찮아질 것 같은데.”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뭐 애초에 딱 보고 사이즈가 나오긴 했어요. 그런데 이번 건 사이즈가 안 나오네요?”
백도현이 살아 있다는 것. 이게 SG의 지형에 어떤 영향을 줄지 가늠이 안 된다는 표정이다. 그런 그녀에게 상혁은 그저 배시시 웃어만 주었다.
“비켜 봐요. 상처 부분을 봐야 하니까.”
김지예가 엉덩이로 상혁을 밀었다. 그리고 백도현의 옆구리를 들추는 김지예의 눈은 어느덧 의사의 눈이 되어 있었다.
조용한 곳에 가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꿰매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더니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김지예가 위생용 장갑을 탁 벗었다.
“끝.”
그러고는 링거를 가져와 백도현의 팔에 꽂았다.
“몸이 많이 상해 있네요. 마치 어딘가에 갇혔다가 탈출한 사람처럼.”
김지예가 상혁을 슬쩍 떠보았다. 상혁은 피식 웃었다. 복잡한 대기업의 경쟁이 싫어 제 발로 나왔으면서 또 이런 소문에는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선물이 뭔데요?”
상혁의 표정에 쉽게 이야기를 듣는 게 힘들겠다고 생각한 김지예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상혁이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 병원. 더 크게 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더 크게?”
“네.”
김지예의 병원은 중형급이다. 그녀는 그녀의 지분을 모두 팔고 그것을 다시 병원에 재투자했다. 그러나 그녀의 병원은 날로 적자를 기록 중이었다.
돈이 되는 치료에만 매달리기보다는 병원장인 그녀 스스로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데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병원 상황이 안 좋은 건 또 어떻게 아시고?”
때마침 힘들던 찰나다. 그 때문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정 안 되면 집에라도 찾아가 손을 벌려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SG에 들어가고 나니 여기저기서 소문이 들려오더라고요.”
“거짓말 마요. 정연이 저 입만 싼 년이겠지.”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너무 화내지 마세요.”
김지예도 알고 있었다. 백정연이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입으로는 험한 말을 해도 입술을 삐죽일 뿐 더 이상 화를 내진 않았다.
“그래서 선물을 드리려고요.”
“어디, 무슨 선물인데요? 참고로 나 돈은 안 받아요.”
그건 김지예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뭐 이 상태로 얼마 지나면 그 자존심도 사라질 것 같지만 어쨌든 재벌 출신인 김지예는 동냥을 하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
“내가 한국대 이사장인 건 아시죠?”
“알죠. 스캔들로 유명하셨잖아. 참. 그거…… 괜찮죠?”
사만다 쪽에서 상혁과의 약혼이 파혼으로 끝이 났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상혁은 지금까지 그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피라냐 같은 기자들에게 괜히 먹잇감을 던져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의 침묵은 곧 긍정이다. 그렇게 세기의 스캔들은 그렇게 끝이 났다.
“괜찮습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거니까. 어쨌든.”
상혁이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중요한 건 상혁의 연애 사업이 아니라 김지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어떤 것이냐였다.
“한국대가 용산에 부지를 얻어 캠퍼스를 새로 짓고 있습니다.”
“알아요. 왜, 이사장님이 환경단체 모아 놓고 앞에서 토양 오염 해결하겠다고 큰소리 뻥뻥 쳤잖아요?”
“그리고 실제로 해결했죠.”
“그게 미스터리라던데. SG그룹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게 아니냐고요.”
“그거, SG 원천기술이 아니라 제가 개발한 겁니다.”
그리고 얼마 전 SG환경재단의 이사장이 된 김상돈은 용왕과 제석천의 상용화를 밝혔다. 그 때문에 SG환경재단은 세계 환경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선봉장처럼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그거 개발하는 연구소가 용산에 있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의학연구소와 대학병원이 있으면 한다는 말이에요?”
“어, 그럼 선물이라는 게?”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운영비 걱정하지 않게 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누님이랑 누님 병원이 통째로 한국대학병원의 창립 멤버가 되셨으면 해요. 아 물론.”
상혁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저나, 제 다음 이사장이나, 그리고 미래의 이사장들까지 병원 운영에는 일절 참여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마시고.”
김지예의 눈이 커졌다. 상혁이 준비한 선물은 김지예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는 선물이었다.
“그게 가능해요?”
“물주를 잡았거든요.”
“물주?”
“더 위자드라고.”
김지예의 눈이 더 커졌다. 병원에서 환자를 보느라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지만 그 와중에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한 결과다.
“세계 제일의 현금 부자?”
“뭐 모르죠. 그 양반보다 더 현금 많이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더 위자드를 알아요?”
“회장과 형, 동생을 하는 사이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더 위자드의 투자를 받아 낼 생각이고.”
“콜!”
김지예가 다급히 콜을 외쳤다. 원래 김지예는 꽤 신중한 성격이다. 성격이 급하고 욕을 입에 달고 살기는 해도 신중하지 않다면 더블 보드를 따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다.
“선물이라더니 제대로 준비하셨네.”
“이래야 선물이죠.”
“호호홋.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 이런 비밀 환자 백 명 데려와도 내 눈 감아 드릴게.”
지긋지긋한 자금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한국대의 이름을 달고 만드는 것이니 병원의 설비 투자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을 것이고, 의료진의 수준도 김지예의 상상 이상이 될 것이다.
“자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병원장님.”
“병원장?”
“네. 참고로.”
상혁은 당근을 먼저 내밀었다. 그러니 이제 채찍을 들 차례다. 상혁이 히죽 웃자 김지예는 불현듯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참고로 뭐요?”
“전문의를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잖아요? 아직 아무도 컨택을 안 했어요. 우리 김지예 병원장님의 입맛에 맞도록 알아서 하실 수 있도록 전권을 드리려고요.”
“자, 잠깐만요.”
“한성대학병원 출신이라고 하셨죠? 거기 실력 있는 양반들 많다던데.”
김지예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병원장이라는 허울 좋은 직함을 하나 떡 달아 주고 대학병원을 꾸리는 걸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가 다 알아서 하라는 소리다.
즉, 상혁은 지금 김지예에게 일 폭탄을 안긴 것이다.
대학병원 규모의 인력을 채용하려면 대체 어디부터 돌아다녀야 할까.
“참, 기존에 있던 의대 인력은 SG종합병원으로 다 갈 겁니다. 그러니까 레지던트랑 인턴까지 싹 다 구하셔야 해요.”
돈은 충분하다며 손가락을 비비는 상혁에게 김지예는 자신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는 메스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이 미친 새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