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204화
204. 더 위자드를 찾아라(4)
백성철 회장의 저택, 백씨 일가의 본가는 늘 그렇듯 고즈넉했다. 하지만 이 고즈넉함을 연출하기 위해 매년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간다는 건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뽀르르-!
그러나 그 연출된 고즈넉함이 초아의 마음에는 든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는 초아가 상혁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가 정원 위를 노닐었다.
팩!
하지만 돈으로 연출한 고즈넉함은 결국 진짜 앞에서는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초아는 정원 내에 고즈넉함을 연출하기 위해 사용된 비료와 화학물질을 느끼고는 진저리를 치며 상혁의 어깨에 앉아서는 상혁의 목에 제 얼굴을 비볐다.
‘간지럽다.’
뽀르르-!
상혁이 마나가 담긴 손가락으로 슥 밀어내자 초아가 까르르, 웃으며 날아올랐다. 실제로 웃는 모습이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초월의 경지, 8서클 어림에 도달한 상혁은 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짜식.’
정령은 순수하다. 정령을 정령으로 남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정령을 세속에 물들였다가는 타락한 정령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수많은 정령사들, 그리고 정령의 일족이라 불리는 엘프들은 자연을 벗하며 살아간다. 욕망이란 것이 정령이란 것을 타락시킨다면, 인간을 그토록 부흥케 한 욕망이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힘을 타락한 정령에게 부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본가야말로 그 욕망을 그대로 빚어 놓은 것 같은 모양새이지.’
상혁은 그 욕망의 집성체가 바로 백성철이 머무르고 있는 용담호혈 같은 이 본가라고 생각했다.
“어째 좀 스산하지 않아?”
“누님도 그렇게 느끼셨어요?”
“아버지가 오래 비우셔서 그런가?”
그럴 리 없다. 백성철이 없다고 해서 그냥 빈 집으로 있었던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혁은 백정연이 꽤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깊은 한과 끝없는 욕망이 만나면 뒤틀린 기운이 된다. 그렇게 뒤틀린 기운은 주변의 밝은 기운마저 깊은 수렁 속으로 끌어들인다.
‘백성철의 욕심이 하늘에 닿았군.’
상혁은 지난 몇 달간 자처해서 검찰의 조사를 받으며 바깥에 두문불출했던 백성철의 욕심이 하늘에 닿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거의 원념에 가까운 기운이 느껴질 리 없다.
히죽.
‘오히려 좋아.’
원념에 가까운 인간의 욕심은 광신을 좇는 광기와 다르지 않다. 그 정도 욕심을 가진 인간은 인두겁을 벗어던지고 더 이상 인간의 윤리에 따르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좇는 괴물.
그런 괴물이 될 가능성이 구할 구푼이다.
하지만 상혁은 그런 백성철의 변화를 오히려 환영했다. 백성철이 그렇게 타락할수록 상혁의 복수는 더욱 꽃을 피울 것이기 때문이다.
원념에 가까운 욕심을 키운 백성철이 제 눈으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무너지는 그 순간, 백성철의 절망은 무저갱을 관통할 정도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상혁이 바라 마지않는 부모님의 복수.
부모님을 농락하고 어린 상혁을 농락한 백성철에게 어울리는 최후가 될 것이다.
“음? 경호원들도 늘어난 것 같은데?”
“그래요?”
“그래서 그런가? 뭐, 가끔 아버지가 이럴 때가 있으셔. 왕의 숙명이라나 뭐라나. 주기적으로 주변을 단속하실 때가 있으시지.”
백정연은 별반 놀랄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상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를 따라 거실에 도착했다.
꾸벅.
“저희 왔어요, 아버지.”
“…….”
달그락달그락.
거실에는 하얀 머리를 길게 길러 마치 도사풍의 헤어 스타일을 한 백성철이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연호박 빛이 도는 위스키를 들고 있었는데, 잔을 돌릴 때마다 얼음과 잔이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쪽으로.”
“예.”
김대엽이 백정연과 상혁에게 상석에 앉은 백성철의 옆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상혁은 백성철을 돌아 그의 얼굴이 보이는 곳에 앉았다.
‘나 고생했다고 광고를 하는군.’
백성철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고생하고 나왔다는 것을 과시할 요량인 듯 자르지 않은 머리와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었다.
항상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만을 보이던 백성철의 전혀 다른 모습에 백정연이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그녀도 처음 보는 모습이기에 놀란 것이리라.
‘구렁이를 품은 노인네 같으니라고.’
백성철은 지금 과시 중이었다.
백성철은 백도현의 벌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제 발로 검찰의 포토라인 앞에 섰다. 그러나 그가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사이 장남인 백이현이 반기를 들었으나 그 열매의 과실은 난데없이 백정연이 따먹었다.
그리고 백정연은 호실적을 내며 시장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SG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은 것. 상혁이 원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승자의 권리를 누리는 와중에 로스차일드에서 알아서 상혁의 집안인 SG그룹에 콩고물을 뿌린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날개 없이 추락하던 SG그룹의 위신이 되살아났다.
SG는 역시 SG다.
전 세계적인 불황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SG그룹이 외화, 특히 달러를 끌어온 덕분에 재계 서열 1순위라는 SG그룹이 제대로 면을 세운 셈이다.
그런 백정연에게 백성철은 지금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던 것은 왕회장인 내가 고통과 수모를 감내했기 때문이다]라고.
그것을 모를 백정연이 아니다.
“아버지.”
“음, 일찍들 왔구나.”
“네.”
백성철은 백정연과 상혁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한 번 뜸을 들이다가 백정연이 다시 부른 다음에야 눈을 떴다.
‘같잖군. 부녀관계보다 수직관계가 먼저다?’
백정연은 잘못한 것이 없다. 백이현이 잘못을 했고 그 뒷수습을 백정연이 했을 뿐이다. 하지만 백성철은 임시로 회장직에 올랐으면서도 눈부신 성과를 낸 백정연을 견제하고 있었다.
보좌에 오를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었기에.
고소가 절로 새어 나오려고 했지만 상혁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백성철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백정연을 쳐다봤다.
“정연이. 고생 많았다.”
“아니에요.”
“네 오빠나 동생보다 네가 더 낫다.”
“…….”
백정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백성철에게 이런 칭찬을 받을 줄 몰랐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성철의 양육법은 간단했다. 칭찬 대신 충고와 채찍을 드는 것이었기에 백정연은 백성철을 아버지가 아니라 상사처럼 모셨다.
“얼굴이 많이 거칠어졌구나. 고생 많았다.”
“다시 복귀하실 건가요?”
“그래야 되겠지.”
“그럼 호텔과 리조트를 제게 주세요.”
백성철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백정연이 욕심을 내진 않더라도 적어도 실망은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정연은 다른 욕심을 냈다.
“호텔과 리조트?”
“처음부터 제 손이 닿은 사업이잖아요. 그 두 개를 제 이름으로 돌려 주세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독립.
SG그룹이란 거대한 배경에서 떨어져 나가겠다는 것. 하지만 백정연은 바보가 아니다. 그녀는 철저히 SG그룹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을 생각이었다.
“완전한 독립은 아니에요. 5년. 5년에 걸쳐 천천히 독립할게요. 제가 이번에 그룹을 수습한 대가로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네 생각이다.”
백성철은 욕망의 화신이다. 호텔과 리조트도 백성철의 것이다. 백정연의 공이 크다고 하여 백성철이 자신의 살점과 같은 호텔과 리조트를 떼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백성철의 심중을 읽어 낸 백정연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반발하려는 찰나 상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허락해 주세요.”
“상혁아.”
백성철의 의외라는 눈으로 상혁을 쳐다봤다. 상혁과 백정연의 유대가 깊다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백성철에게 상혁은 언제나 휘두를 수 있는 칼에 불과했다.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상혁의 이사장 자리는 백성철이 준 것이다. 자신이 준 것이니 언제든 다시 가져올 수 있다. 그렇기에 백성철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끼어들 자리를 보고 끼어야지. 너를 이사장으로 써 줬다고 해서 이 자리에 끼어들 자격이 되었다고 생각하다니. 아직 어리구나.”
한마디로 선을 넘었다는 것. 상혁은 어디까지나 조카일 뿐이지 백성철의 직계가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자리에서 이래라저래라 의견을 낼 수 있는 자격 역시 없었다.
하지만 상혁은 굴하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남의 손에 호텔과 리조트를 넘어가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을걸요?”
“뭐?”
상혁의 말에 백성철이 눈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김대엽을 쳐다봤다. 그러자 김대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성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군가 호텔과 리조트를 노리고 있다?”
“제가 이번에 미국 가서 사귄 친구가 해 준 말이 있는데, 꽤 믿을 만한 친구입니다.”
“친구?”
상혁이 미국 가서 로스차일드를 만나고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백이현뿐이다. 백성철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상혁이 말했다.
“헤르츨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
“나이 차이는 조금 나지만 친구가 되었거든요. 어쨌든 그 친구가 말하길.”
백성철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상혁이 어떻게 로스차일드를 만났고, 그를 친구라 이르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상혁은 입을 쉬지 않았다.
“잭 노리치라는 양반이 아시아권의 호텔 사업에 관심이 많다고 하던데요.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에 관심이 많다구요.”
“잭 노리치…….”
백성철이 노리치 가문의 이름을 모를 리 없다. 글로벌 기업인 SG전자의 회장이기도 한 그가 원탁과 프리메이슨을 모를 리 없다.
잭 노리치는 미국의 주요 대도시, 그리고 유럽의 주요 대도시에 부동산으로 거물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잭 노리치는 비단 부동산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호텔과 리조트 체인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아시아에는 노리치가 진출하지 않았는데, 한국을 진출 대상으로 물색하고 있다는 셈.
“최근 뉴욕의 소로스 빌딩을 팔아서 이미 실탄을 확보했다고 하던데요.”
사실은 원탁이 무너지면서 상혁에게 거의 무상으로 양도한 셈이지만 이제 막 검찰에서 나온 백성철이 미국의 실시간 상황까지 세세하게 알 도리는 없다.
그 시간의 간극을 노리고 상혁은 백성철에게 그릇된 정보를 주입한 것이다.
“잭 노리치가 SG호텔과 리조트를 노리고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죠.”
“김 실장, 호텔과 리조트의 지분 상황 가져와.”
호텔과 리조트는 SG의 주력 사업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분 관리가 허술한 것이 사실이다. 자금 등 여러 사정으로 호텔과 리조트의 지분 손바뀜이 자주 일어나거나 시장에 지분이 풀리는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안건 아니고 더 위자드의 애널리스트들이 알아낸 것이지.’
더 위자드의 애널리스트는 전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유명 투자회사의 알짜배기 인력들이다. 상혁의 요청으로 그들은 SG그룹의 펀디멘탈부터 세세한 부분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호텔과 리조트는 그중 일부분일 뿐이다.
‘미리 확보해 뒀지.’
백성철이 이럴 것을 대비하여 상혁은 이미 더 위자드와 여러 페이퍼 컴퍼니의 이름으로 호텔과 리조트의 지분을 확보했다.
그러나 대주주 공시는 한 번도 나지 않았다. 호텔과 리조트의 지분을 딱 4.9퍼센트까지만 한 회사에서 확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원된 회사의 수만 해도 여덟 개, 호텔과 리조트의 지분 30퍼센트를 쓸어 담았다. 사실상 시중에 나온 거의 모든 매물을 쓸어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누님이 야금야금 모아 놓은 것이 의외였다고나 할까.’
그 30퍼센트에 백정연이 개인적으로 확보한 것만 20퍼센트다. 그러면 딱 50퍼센트, 절반을 단숨에 확보하게 된다.
‘여기에 SG의 임시회장으로 누님이 쌓은 실적을 적절히 홍보한다면 경영권을 얻는 건 누워서 떡 먹기지.’
백성철이 백정연에게 주지 않아도 백정연이 백성철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된 셈이다.
그러나 기왕이면 아버지와 얼굴 붉히고 독립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적절한 보상으로 정식으로 독립하는 것이 백정연에게 더 나았기 때문에 일부러 빙 돌아온 셈.
“이, 무슨…….”
부들부들.
백성철이 그런 흐름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단지 그 흐름이 백정연을 독립시키기 위함이란 것만 까맣게 모르고 있을 뿐이다.
백성철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그 결과 상혁의 말이 맞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노리치 손에 들어가느니 정연이 손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적어도 제어는 할 수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SG의 이름을 달았던 호텔과 리조트가 SG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이 대한민국에서 노리치로 간판을 바꿔 다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좋아. 정연이에게 호텔과 리조트를 주마.”
“정말이세요?”
“그래. 단, SG와의 협력 관계는 유지해야 한다.”
“네, 아버지.”
백정연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는 기뻐했다. 상혁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을 때 백성철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럼 이제 상혁이 차례구나. 그래, 미국에 다녀왔다고?”
로스차일드. 그와 관련한 백성철의 궁금증을 풀어 줄 차례였다.
“예, 회장님.”
상혁이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아주 철저히 엄선되고 또 가려내어 만들어진 한 편의 그럴듯한 스토리였다.
그리고 상혁은 그 끝에 백성철의 구미에 당길 만한 것을 하나 끼워 넣었다.
“더 위자드? 그곳의 회장도 만나 봤다는 것이냐?”
요새 재계를 뜨겁게 만든 화제의 중심, 더 위자드로 백성철을 건드리자 곧바로 격렬한 반응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