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201화
201. 더 위자드를 찾아라(1)
백이현의 침묵이 길어졌다. 하지만 박상원은 그런 백이현을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애초에 그럴 것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백이현을 통해 삼합회와 SG그룹이 이어진 끈을 찾는다는 것.
로스차일드를 통해 백성철이 중국 공산당과 오래전부터 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상혁은 백이현을 점찍었다.
‘백이현이 그냥 자기 힘으로 삼합회와 손을 잡았을 리 없으니까.’
틀림없이 백성철이 백이현과 삼합회를 이어 준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삼합회는 사실상 공산당의 산하조직이었으니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 이어 중국이라.’
어찌 된 것이 스케일이 날로 커져 가는 듯했다. 원탁에 이어 이제는 아예 중국 그 자체인 공산당이라니.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시간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제가 얻을 건…….”
백이현이 말끝을 흐렸다. 말을 하고 보니 부끄러워진 것이다. SG그룹의 황태자 소리를 들었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우는 소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신경 쓰였으리라.
하지만 박상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살려 드리죠.”
“예?”
“SG건설. 자금난에 시달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 세계적인 건설 불경기 때문에 SG건설의 실적은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국내의 일감을 몰아서 SG건설이 도맡고 있지만, 백이현이 사업 확장을 문어발식으로 해 놓은 탓에 자금 순환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위자드가 보유한 자본금은 588조. 그중 90퍼센트 이상을 투자금으로 운용할 수 있습니다. 얼마 원하십니까?”
꿀꺽.
백이현의 눈이 커지고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588조. SG건설의 1년 매출이 13조 남짓이다. 그중 영업이익은 작년과 재작년에 –90억과 –130억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적자라는 소리다.
그리고 그 적자 폭은 올해 더 커질 예정이었다. 백이현이 백성철을 몰아내고 무리해서 회장에 오를 생각에 SG계열사의 주식을 사들이고 대주주에게 뇌물을 주느라 공식적으로 지출할 수 없는 항목에 많은 돈을 지출했기 때문이다.
그걸 전부 비용 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렇게 적자 폭이 커지고 회사 자금이 불안정해지면 지금껏 SG라는 이름 앞에 손가락만 빨던 놈들이 하나둘씩 숟가락을 얹으려 달려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백이현의 배임, 횡령, 장부 조작 등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투자라.’
하지만 투자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더 위자드의 투자를 받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개 그 상응하는 것이란 바로 주식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588조다.
박상원이 내민 백지수표를 백이현은 도저히 그냥 거부할 수 없었다.
‘내 편은 내 지갑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상혁은 즐겁게 그런 백이현을 관찰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혁은 그의 얼굴만 보고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상혁은 한 팔 거들어 주기로 했다.
“박상원 지부장님.”
“예.”
“제가 가주께 직접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너무 형님께서 곤란하지 않은 수준으로 부탁드립니다.”
백이현이 감동 받은 표정으로 상혁을 쳐다봤다. 그러자 박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분이라면 모르지만 이사장님이라면 가주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이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러자 박상원이 백이현에게 말했다.
“SG건설의 1년 매출이 13조가량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5조를 투자하겠습니다.”
“1, 15조.”
“백이현 사장님께서 보유하고 계신 SG건설 주식의 30퍼센트를 주십시오. 대신 계약서에 주주로서의 권리를 백이현 사장님께 위임하겠다는 조항을 집어넣도록 하겠습니다.”
15조를 투자하고 SG건설의 주식을 받아 가는 대신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냥 이 정도면 거의 퍼주는 수준이다. 백이현의 눈이 커졌다.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조건입니다. 여기 계신 백상혁 이사장님 덕분에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으니까요.”
박상원은 선을 딱 그었다. 여기서 흥정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때 상혁이 끼어들었다.
“대신 콜옵션도 넣어 주시죠.”
“콜옵션까지요?”
박상원이 난색을 표했다. 백이현은 상혁이 알아서 자신을 도와주자 입을 다물고 박상원의 표정을 살폈다.
콜옵션은 말 그대로 정해 둔 가격에 팔았던 주식을 다시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그게 있다면 판 주식을 자신이 다시 사 올 수 있으니 백이현으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그건…… 후…….”
박상원은 정말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하지만 상혁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말했다.
“백상혁 이사장님의 얼굴을 봐 드려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이현이 체면도 잊고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소리쳤다. 박상원의 찌푸려진 얼굴을 보고 상혁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형님. 제가 형님께 도움이 된 게 맞죠?”
“그럼! 도움이 됐고말고. 고맙다. 정말 고마워.”
백이현은 오늘 상혁을 부른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혁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상혁 덕분에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상혁은 그런 백이현을 보면서 씩 웃었다.
‘그렇게 열심히 좋아해라. 얼마 가지 않을 테니까.’
박상원과 상혁은 철저히 미리 짜 둔 대본에 따라 움직였다. 상혁이 오늘 백이현을 찾아온 것도, 그리고 박상원이 백이현을 찾아온 것도 다 계획에 있던 일이다.
“그러면 언제쯤 계약서를…….”
“아예 지금 쓰죠. 제 비서를 부르겠습니다. 사장님도 법무팀을 부르세요.”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더 위자드는 한 번 결정한 건 질질 끌지 않습니다.”
박상원이 그렇게 말하면서 상혁을 힐끗 쳐다봤다. 백이현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백이현은 그것 역시 상혁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이런 복덩이 같은 놈. 대체 미국에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왔길래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거지?’
무려 15조의 투자가 상혁 때문에 이뤄졌다. 그것도 독소 조항이 하나도 없는, 유리한 조건으로만 떡칠이 된 조건이 말이다.
백이현은 이 투자 계약 한 건이면 그간 잃었던 자신의 위상이 모두 회복될 것임을 깨달았다. 더불어 그런 투자를 이끌어 낸 자신에 대한 평판이 수직 상승할 것이란 것도.
지난번 주총 때문에 잃었던 걸 이제야 본전을 찾는 느낌이었다.
“사장님께서 보유하고 계신 SG건설의 주식은 어느 정돕니까?”
박상원이 백이현에게 물었다. 백이현이 가진 건설 주식 30퍼센트다. 백이현은 콜옵션까지 걸린 마당에 여기서 더 위자드의 호의를 사기 위해 그들이 제안한 것보다 더 쓰기로 마음먹었다.
‘삼합회 대신 로스차일드면 내가 왕권을 쥐기에 충분하다.’
다시 왕권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로스차일드란 배경이 필요했으니까. 이번 계약으로 그쪽과 연을 맺어 놓는다면 자신에게 있어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전체 주식의 15퍼센트가량 됩니다. 하지만 귀사의 호의에 저도 호의로 대답을 해 드려야죠. 5퍼센트가 아니라 7.5퍼센트를 넘기겠습니다.”
“호오. 좋습니다.”
박상원은 덥석 그 제안을 물었다. 거부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다. 그렇게 계약서가 완성된 후 사인하고 악수까지 마친 뒤 박상원이 백이현에게 말했다.
“앞으로 백이현 사장님과 파트너십이 더 공고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둘 사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잠시 후 박상원이 약속이 있어 먼저 일어난다고 한 뒤 상혁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아니다, 상혁아. 이게 전부 네 덕분이다. 네가 귀인이었어. 하하하핫!”
백이현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상혁의 어깨를 덥썩 붙잡았다.
“네가 건설을 살렸어. 내 특별히 책임부서에 연락해 용산은 더욱 신경 쓰라고 지시해 놓으마. 으하하하하!!”
백이현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다. 그런 백이현에게 상혁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다시 대권을 노리실 겁니까?”
“대권?”
“예. 솔직히 SG그룹의 회장은 형님 같으신 분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정연 누님이 잘하고 계시지만 누님은 호텔과 리조트 사업에만 매진하신 분이시라 경영 감각이 조금 떨어지실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느냐?”
백이현이 흐뭇한 표정으로 상혁을 쳐다봤다. 혹여 상혁이 자신의 자리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게 아니고서야 상혁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도울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주제를 잘 아는 아이구나.’
그걸 백이현은 상혁이 자신의 주제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상혁은 계속해서 그런 백이현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 주었다.
“그럼요. 솔직히 지금 정연 누님이 순항하고 계신 건 외부적인 조건이 운이 좋게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니까요. 그러다 암초를 맞닥뜨리는 순간 휘청거리실지 몰라요.”
“정연이가 대국적인 측면에서 회사를 운영해 본 적이 없기는 하지.”
“그러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형님이 딱이시죠.”
“도현이가 있었으면 큰 힘이 됐을 텐데. 그렇게 가 버리다니.”
백이현은 마음에 없는 이야기까지 하면서 슬쩍 연기까지 했다. 상혁은 그런 백이현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쉽지만 살아갈 사람은 살아가야죠. 이제는 형님밖에 없으시니까요.”
“너까지 그렇게 생각하다니. 고맙구나.”
“전 진심입니다, 형님.”
백이현은 하늘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장 고민되던 SG건설의 실적이 한 방에 해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대권에 뛰어들 동력이 생겼다. 그 전에 백이현이 상혁에게 물었다.
“네가 날 도와주겠니?”
“제가요? 제가 형님을 뭘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내가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
백이현이 상혁에게 숙제를 던졌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예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아야 하지. 내가 다시 일선에 나서기 위해서는 과거의 과오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다.”
백이현은 정무 감각이 뛰어났다. 그가 호방한 대인인 척 연기를 해 왔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이현은 새로 출발하기 위해서는 임팩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내 기업가로서의 역량에 해가 가는 일은 아니어야 해.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상혁이 고민하는 척하다가 손뼉을 짝하고 내려쳤다.
“한국건축상과 관련된 루머는 어떠세요?”
“어?”
“제가 이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불러다가 의견을 청취한 건 아시고 계실 거예요. 그중에 왜, 형님이 건축학과 학생의 설계를 훔쳐다가 SG건설의 이름으로 건축상을 받았다고 한 거 있잖아요.”
백이현의 표정이 굳었다. 상혁은 루머라고 하고 있었지만 백이현은 그게 루머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상혁은 그걸 모른 체하고서는 경박하게 떠들었다.
“그거, 아마 죽은 학생네 유족이 뭐라도 원망하고 싶어서 형님을 딱 짚은 것 같잖아요. 그게 말이 돼요? 외국 출신의 건축가도 있는 SG건설에서 말이에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백이현은 언론에 뇌물을 먹였다. 그 결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은 져 버린 별이 되었고 가족은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그래서 그걸로 뭘 어떻게 하자고?”
“건축상을 반납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뒤늦었지만 사고에 조의를 표하고 유감을 표한다고요. 그리고 유족을 찾아가셔서 위로금도 건네시고.”
백이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한 번씩 져 주기 시작하면 결국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달려드는 것을 받아 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백이현은 배웠고, 실제로도 무시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형님. 대신 진범을 찾으시면 되잖습니까.”
“진범?”
“뭐 형님이 진범이라고 하면 진범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상혁의 말에 백이현의 표정이 슬쩍 풀렸다.
“그런 다음엔?”
“그렇게 되면 형님은 억울한 사연을 듣고 몸소 나선 재벌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는 거죠. 그렇게 되면 형님이 다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백이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하긴. 정치인들도 선거 때만 되면 안 가던 시장도 가고 국밥도 먹는데.”
“고작 선출과는 다르게 형님은 왕이 되시려는 거니까요.”
“왕이라…….”
왕이라는 소리가 귀에 쏙 들어왔다. 백이현이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 그래야겠다. 네가 좀 도와다오.”
상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안 그래도 그 말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님. 당연히 도와드려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