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200화
200. 누구시라고(5)
백이현이 박성원이 누구인지 모를 리 없다. 백도현의 가장 취약한 약점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백도현 쪽에서 박성원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던 백이현이 쾌재를 부른 적도 있었다.
백도현을 찌를 비수로 박성원이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백이현에게는 유리하기만 한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성원은 증발한 듯 그 어디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박성원이 더 위자드의 한국 지부장이라며 나타났을 때 백이현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상혁이에게 고개를 숙인다고?’
박성원의 고개는 뻣뻣했다. 그는 백이현과도 악수만 했을 뿐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백이현은 그런 박성원이 괘씸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박성원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로스차일드.
미국에서 더 위자드의 배후에 로스차일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 위자드는 무려 588조의 자금을 운용하는 초거대 투자사. 만약 더 위자드에서 588조란 무기를 앞세워 SG그룹을 압박하거나 경쟁사에 거액의 투자를 자행한다면 SG그룹은 괜히 큰 적을 만드는 셈인 것이다.
그 때문에 백이현은 박성원을 보고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백도현 때문에 박성원이 SG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좋지 않을 거라는 것 때문이다.
상혁이 박성원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박성원은 상혁을 아는 체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상혁이 그런 박성원을 자제시켰다.
“미스터 로스차일드에게 연락을 받긴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백상혁 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뇨.”
“미스터 로스차일드께서 한국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미스터 백을 찾아가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백이현은 상혁과 박성원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경악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미스터 로스차일드가 불리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주.
그는 미국의 대통령들이나 정계, 재계의 거물들도 만나고 싶어 안달을 내는 거물 중의 거물이다. 로스차일드란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서는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미국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혁이와 로스차일드의 가주가 만났다고? 그것도 이번 미국 출장에서?’
SG건설을 로스차일드가 밀어주고 있다는 소문이 증권가에 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각 증권사에서 평가하는 SG건설의 주식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다.
그러나 백이현은 그게 거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민이었다. 혹여나 이게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SG건설의 주가는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사장직이 위태로워진다.
그런데 백이현의 눈앞에 진짜 로스차일드와 연관이 있는 상혁이 나타났다. 그 순간 백이현에게 상혁은 황금 고블린이었다.
‘로스차일드 가의 가주가 직접 상혁에게 더 위자드의 자문을 맡겼을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니다. 대체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상혁은 수행원도 최소로 줄여 미국으로 갔기 때문에 상혁의 미국 행적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거의 없었다.
그저 상혁이 믿을 수 없는 성과를 내었다는 것만이 알려졌을 뿐이고, 그게 사실 확인을 거쳐 진실임이 밝혀졌을 뿐이다.
그 때문에 그룹 내에서 상혁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떨어진 로열패밀리에서 어느 정도 능력은 있는 로열패밀리로. 그런데 만약 상혁이 로스차일드 가의 가주와 막역한 사이란 것이 밝혀진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 것이다.
‘대세론이 상혁이에게로 갈 수도 있다.’
지금 SG그룹의 차기 회장직은 무주공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후계를 놓고 경쟁하던 유력 후보인 백이현과 백도현이 헛발질을 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백도현은 사망까지 하였으니 졸지에 SG그룹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후계자가 빈자리가 된 셈이다.
그 자리를 백정연이 메우고 있고, 주주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자칫하면 그 레이스에 상혁이 차기 주자로 떠오를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백이현을 자극했다.
‘좋지 않다.’
이 혼란을 질서 있게 정리해 줄 수 있는 건 검찰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고 있는 백성철 회장뿐이다. 하지만 백성철 회장의 욕심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백이현이다.
‘영국 여왕을 꿈꾼다고 했으니까.’
영국 여왕은 90이 넘는 나이에도 영국 왕실의 여왕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아들만 세자를 70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백성철 회장의 롤모델이 영국 여왕이라는 건 그가 숟가락을 들 힘이 없을 때까지 회장직을 해 먹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백이현은 수십 년간 세자 노릇만 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백이현을 상혁은 곁눈질로 힐끗거리면서 지켜보고는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네.’
심적으로 코너에 몰려 있기 때문일까, 얼굴에 생각하는 것이 고스란히 더 드러나는 백이현이었다. 상혁은 백이현이 홀로 소설을 써 내려가다가 폭주하기 이전에 그를 현실로 되돌려주기로 했다.
“형님과 비즈니스 미팅이 있어서 오신 것이 아닙니까?”
“아 참. 이런 실수가. 죄송합니다, 백이현 사장님.”
박성원이 그제야 백이현이 생각이 났다는 듯 백이현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짐짓 대인인 척 백이현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제 동생과 아는 사이셨다니 놀랐습니다.”
“제가 뵌 적은 없습니다. 단지 본사 쪽에서 직접 연락을 받은 적이 있어 안 그래도 조만간 백상혁 이사장님께 연락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본사라면 혹시.”
박성원은 빙긋 웃었다.
“죄송합니다. 회사 기밀이라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렸군요.”
백이현은 손사래를 치면서 속으로는 확신했다. 저렇게 기밀이라고까지 하며 회장을 숨기는 데에는 로스차일드가 있기 때문이라고 오히려 확신한 것이다.
‘진짜 로스차일드다.’
꿀꺽.
삼합회는 백이현과의 연을 끊었다. 라먼 헤르텔이 들인 막대한 자금이 그대로 하늘로 공중분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똥차가 가면 벤츠가 온다고, 로스차일드가 나타났다.
‘아무리 중국 놈들이 날고 기어도 로스차일드에는 안 되지.’
진짜 부자는 중국이나 인도에 있다는 말이 있지만 백이현은 알고 있었다. 진짜 암중에서 세계 경제를 손에 넣고 주무르는 건 로스차일드 같은 오래된 가문들이란 것을 말이다.
중국과 인도는 치고 올라오는 신흥 부자일 뿐, 그들이 로스차일드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백 년도 더 일렀다.
“제가 있어도 되는 자립니까? 형님. 대화를 나누신다고 하셨는데.”
“괜찮아. 괜찮아. 그걸 지부장님도 원하시는 것 같고.”
“저야 백상혁 이사장님이 계시면 더 좋습니다.”
상혁이 차기 회장 레이스에 올라오는 걸 걱정하는 건 나중의 일이다. 당장 상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박성원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에 백이현은 상혁을 붙잡았다.
그런 둘의 태도에 상혁은 못 이기는 척 뗐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그럼 제가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상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빙빙 돌려서 말하는 외교적인 수사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백이현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우린 삼합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이현 사장님이 그쪽과 손을 잡았었다는 사실까지도. 그러니까 정보를 넘겨주시죠. 그러면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오실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
백이현의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설마 다짜고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그것도 상혁이 있는 이 자리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 *
[속죄하라.]
“…….”
백도현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평생을 최고 대우만 받으면서 살아온 백도현이지만 그는 좁은 컨테이너 안에서도 더 이상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간신히 살아남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다 보니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하루 종일 멍했기 때문이다.
드르륵!
투다다다다!!
탕! 타다다당!
그런데 그때 밖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백도현은 흠칫 놀라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지난 몇 달간 백도현은 자신을 이곳에 가둬 놓은 이들과 대화라도 하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입 한 번 열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전부인 곳에서, 몇 달 동안 갇힌 백도현의 정신은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것처럼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어디 갔어?]
[다 도망간 것 같습니다.]
[도망? 그게 말이 돼?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핏자국도, 시체도 없잖습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밖에서 중국말이 와르르 들렸다. 백도현은 중국어도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부터 쇳소리가 나더니 이내 백도현이 갇힌 컨테이너에서도 무언가를 여는 듯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켜!]
탕-!
흠칫.
백도현이 어깨를 흠칫했다. 총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이내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백도현?”
“…….”
“맞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벙어리야?”
야간투시경과 복면을 쓴 남자들이 들어왔다. 그 남자들의 몸에서 바닷물의 짠내와 화약 냄새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백도현 씨, 들립니까? 이거 몇 갭니까. 보여요?”
“……누굽니까.”
“구하러 왔습니다. 백도현 씨.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백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밝은 손전등이 자신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도현은 불편함을 느꼈다. 이 컨테이너 안은 조용했고 말할 사람도 없었지만 어느새 적응되어 자신의 집처럼 평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속죄하란 목소리에도 백도현은 안정과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이들로 인해 평화가 깨졌다.
“구하러 오다니. 누가…….”
“백성철 회장이 보냈습니다. 가시죠.”
“해경이 출동했습니다.”
“어서!”
남자는 우악스럽게 백도현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백도현은 컨테이너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어둠에 잠긴 망망대해를 보았다.
“아.”
그 검은 어둠, 빛을 빨아들이는 차분한 어둠이 그의 평화를 지켜 주었다. 그런데 그 평화가 지금 깨졌다. 컨테이너 안에서 타의로 참선 비슷한 것을 시작한 백도현은 그 평온이 깨지고 다시 전쟁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싫어.’
무엇을 위해 그리도 발버둥을 쳤을까. 그깟 회장직이, SG그룹이 무엇이라고. 부와 명예를 좇았지만, 스스로가 메말라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백도현은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난 속죄하며 살아야 할 죄인이다.’
자신은 SG전자의 사장이자 야망이 넘치던 기업인이 아니다. 백도현은 자신의 남은 인생을 속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머릿속에서 괴롭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자신을 세뇌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드디어 메마른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몇 달간 갇혀 지낸 백도현이 건장한 이들의 힘을 이겨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백도현은 억지로 다른 선박으로 옮겨 타야만 했다.
“C4 설치 완료!”
“1분 뒤 폭파!”
부아아아앙-!!
백도현을 태운 검은 고무보트가 망망대해 위를 표류하고 있던 컨테이너선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그리고 거리가 벌어진 순간 컨테이너선이 폭발하며 불길이 일어나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어디로 가는 거요?”
“상하이. 그곳에서 다시 한국으로 가시게 될 겁니다.”
“아버지께서 공산당과 친밀한 관계라고 하던 게 진짜였던 모양이군요.”
“백성철 회장은 우리 대중화의 절친한 벗입니다. 우리는 벗의 곤경을 그냥 두고 보지 않지요.”
남자가 어둠 속에서 하얀 이만 드러내고 웃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바보는 없었다. 백도현은 아버지가 자신을 구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죽이면 모를까.’
자신은 SG그룹의 약점이다. SG전자의 사장일 때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고 그냥 백성철의 아들이기만 하면 그냥 짐일 뿐이다.
백도현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속죄도 못 하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백도현의 두 눈에 살고자 하는 의지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