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173화
173. 횡재(3)
꼬옥.
“이제 됐습니다.”
상혁은 공항 바깥으로 빠져나왔음에도 사만다가 자신의 품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상혁의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사만다는 볼을 붉히며 상혁의 옷을 꼭 쥐었던 손을 풀었다.
“이게 지금 그 마법이라는 건가요?”
“네.”
“하아.”
사만다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상혁이 마법사라고 했을 때 그를 믿었으나 이렇게 직접 몸으로 겪어 보는 건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순간이동이라니.
자신이 마치 슈퍼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히로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늘 홀로 모든 것을 해내야만 했던 사만다는 슈퍼 히어로처럼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는데 그런 슈퍼 히어로가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힐끔.
사만다는 상혁을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러나 상혁은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상혁은 주변에 손가락을 튕기며 이쪽을 찍었을 CCTV를 하나씩 터뜨리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 얼굴도 그럼 마법인가요?”
상혁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마법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꾼 상태라는 것을 깜박했다. 상혁은 바보 같았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힘 뺄 필요 없었네.’
어차피 이 얼굴은 안면 인식 프로그램을 돌려도 나오지 않을 얼굴이다. 상혁이 손으로 얼굴을 슥 어루만지자 상혁의 원래 얼굴로 스윽 돌아왔다.
“우, 우와아아아.”
“그만 좀 놀라면 안 됩니까?”
상혁이 머쓱한 표정으로 사만다를 쳐다봤다. 사만다의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마치 자신이 선망하던 연예인을 본 것 같은 팬의 얼굴인 것만 같았다.
늘 의젓하던 사만다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저렇게 보니 마법을 쓰는 게 민망하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신기해서.”
“어쨌든 아마 글레이저 가문은 꽤 머리가 복잡해질 겁니다.”
상혁은 화제를 돌렸다. 자신이 사만다를 나무란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겠네요. 마법이라니.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사만다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미국에 입국하자마자 글레이저 가문이 부린 수작에 걱정스러웠던 사만다다.
그건 고작 전초전에 불과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혁의 마법을 본 순간 사만다는 자신의 걱정이 우려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았다. 상혁은 굳이 CCTV를 피하지 않았으니 아마 글레이저 가문은 그것을 보고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마법.
상혁이 CCTV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킨 건 마법이란 존재로 저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함이다.
“모르죠.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망설임이 글레이저 가문을 둔하게 만들 거라는 겁니다.”
글레이저 가문은 비단 한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가문이 아니다. 정계에 깊이 뿌리를 내린 글레이저 가문은 가주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가장 강할 테지만 그에 못지않은 이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분열된 여론은 덩치 큰 글레이저 가문을 둔하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상혁과 SG그룹을 가장 먼저 의심할 텐데요.”
“의심이라.”
상혁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겠죠. 하지만 그 의심도 결국 증거가 있어야 추궁을 하든 떠 보든 할 것 아닐까요. 과연 글레이저 가문이 심증 외의 물증을 구할 수 있을까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마법이다.
확실한 물증 없이는 글레이저 가문이 SG그룹의 상혁을 섣불리 압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설령 물증을 확보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상혁이 사만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글레이저로는 저를 손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상혁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사만다는 그것이 만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지금까지 자신의 말을 어긴 적이 없었던 상혁의 말이기 때문이다.
“가죠.”
상혁이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겠다는 뜻이다. 사만다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 팔에 팔짱을 꼈다.
“아, 근데 수빈은 어떻게 할까요?”
상혁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찰싹 하고 때렸다.
“참, 맞다.”
안에서 멍청하니 자신과 사만다를 기다리고 있을 정수빈이 그제야 생각난 것이다. 상혁은 사만다에게 말했다.
“나오라고 하죠. 우리 먼저 나왔다고.”
* * *
상혁이 글레이저 가문이 부린 야료로 부조리하게 억류된 것을 구출하는 사이, 정수빈은 상혁과 사만다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던 정수빈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흠칫 놀란 정수빈이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다, 당신.”
“수, 미국에 올 생각이었으면 연락을 했어야지.”
정수빈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녀를 보며 친근하게 웃고 있는 남자, 스캇 고먼이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떻게…….”
“글쎄. 저녁까지 시간도 좀 남고, 마침 손님도 오신다고 해서 직접 나왔지.”
“당신이 직접 말이에요?”
정수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아는 스캇 고먼은 누군가를 위해 마중 따위를 나올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에 스캇 고먼이 환하게 웃었다. 머리 색과 같은 금발 수염을 기른 스캇은 매력적으로 생겼고 그 환한 웃음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럼. 그것도 피앙세와 함께 말이야. 낭만적이지 않아? 비즈니스를 오며 피앙세와 함께하다니. 그것도 그 피앙세가 사만다 허드라면 더더욱.”
“사, 사만다 허드?”
“참, 우리 수는 봤겠네. 수와 같은 비행기에 탔다고 하던데 말이야.”
스캇 고먼의 눈빛이 정수빈을 호랑이 앞의 사슴처럼 굳게 만들었다. 정수빈은 어깨를 잘게 떨었지만 그걸 감추기 위해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수. 오늘 한 번은 봐줄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용납하지 않아. 넌 내 거야 수.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
스캇은 자기 마음대로 정수빈을 수라고 불렀다. 수빈이 이름이라고 했지만 그런 그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스캇 앞에서만큼은 정수빈은 수라는 이름으로 적응했다.
“스, 스캇…….”
스캇이 성큼 정수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를 가볍게 포옹하는 척하며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는 그녀의 목을 부드럽게 뒤로 꺾었다.
그러자 기고 가느다란 정수빈의 목이 스캇의 눈앞에 훤하게 드러났다.
“잊지 마! 수. 넌 노예야. 이 스캇 고먼의 노예. 내가 하라는 걸 하고, 내가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해야지. 내가 널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응?”
정수빈은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그물에 잡힌 새였다. 애처로운 눈을 한 정수빈은 그냥 눈을 감았다. 자신의 무력함을 스캇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으읍.”
스캇이 정수빈의 살 냄새를 맡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수빈은 그런 스캇에게서 그가 여자를 죽이고 그 피 냄새를 맡으며 황홀해하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곧바로 한국으로 들어가 필사적으로 스캇의 연락을 피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정수빈의 한국 기획사도 고먼 가문의 자금이 야금야금 잠식하고 들어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스캇에게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수빈 주변의 모든 것이 스캇의 감시자로 채워졌다.
그래서 그의 새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는데, 미국에 오자마자 이곳에서 그를 만나다니. 정수빈의 감은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위이잉!
그때 정수빈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자 스캇이 그녀의 머리를 놔주었다. 정수빈은 비로소 고개를 다시 들고서는 핸드폰이 울리고 있는 백에 손을 넣었다.
부들부들.
정수빈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두려움인지 무력감인지 정수빈은 알 수 없었다. 스캇이 그런 정수빈의 핸드폰을 힐끗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 봐.”
사만다.
그 이름을 보고도 스캇은 놀라지 않았다. 정수빈은 역시 스캇이 한국에 심어 놓은 눈을 통해 이미 그녀가 사만다와 안면이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서운 남자.’
그는 마치 거미처럼 자신을 천천히 그가 뿌려 놓은 거미줄에 걸리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거미줄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으니까.
정수빈은 사만다의 전화를 받았다. 사만다가 상혁과 먼저 나왔으니 어서 나오라는 소리였다. 그걸 들은 스캇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렇다는데?”
“죄송합니다. 지켜보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미스터 브라운. 요새 일이 편한 모양이야. 아래 애들도 그러시고. 하마터면 그냥 여기서 하염없이 기다릴 뻔했네?”
“죄,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미스터 브라운이라 불린 남자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러자 옆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서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흐흐흐.”
스캇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은 스캇은 고개를 돌려 정수빈에게 말했다.
“마침 내가 기다렸던 손님이 미리 나가셨다네? 우리 수는 그 피앙세와 아는 사이인 모양이고. 그러니까 수. 이런 쓸모없는 쓰레기와는 다르게 나를 그 손님에게 좀 소개해 주지 않을래?”
“……알았어요.”
정수빈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스캇은 고개를 돌려 무릎 꿇은 남자에게 말했다.
“이놈은 해고야. 경호책임자 바꿔. 나중에 나 죽고도 못 막았다고 죄송하다고 할 사람이잖아. 응?”
“이, 이사장님. 미스터 고먼.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입도 가볍네. 내가 경고했을 텐데. 고먼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응?”
미스터 브라운이 다른 경호원의 손에 질질 끌려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정수빈은 그 모습이 안 보이도록 눈을 더 돌렸다.
스윽.
스캇이 그런 정수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가자. 마이 수.”
정수빈의 온몸에 뱀이 기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 * *
“수빈?”
사만다가 수빈을 먼저 발견했다. 사만다를 따라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곳을 바라본 상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빈의 곁에 멀끔하게 생긴 백인 남자가 싱긋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채 함께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수 없는 새끼네.’
누가 보더라도 호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나 상혁은 그 남자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했다.
상혁은 저놈처럼 빙글거리며 제 속을 숨기는 능구렁이 같은 놈들에게 거의 알레르기 같은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웃으면서 오는 놈 중에 제대로 된 놈 하나 본 적이 없지.’
이미 마흔이 넘어가면서부터 마법사의 정점 중 하나로 불렸던 상혁인 만큼 여러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 왔던 상혁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나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 적대 관계로 만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중 저렇게 생글거리며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머금고 접근하는 놈들이 가장 최악이었다.
저렇게 웃으며 짐승 같은 짓을 하는 놈들이 거의 99퍼센트였기 때문이다.
“누구셔?”
사만다가 정수빈에게 말했지만 대답은 백인 남자, 스캇 고먼이 했다.
“고먼재단의 스캇 고먼이라고 합니다. 맨해튼대학교가 고먼재단에 속한 대학교 중 하나이지요. 백상혁 씨, 맞습니까?”
사만다의 말을 스캇이 미소를 지은 채 받았다. 그러고는 상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상혁은 찰나를 포착했다.
‘이 새끼가?’
스캇은 사만다의 말에 대답하면서 찰나에 사만다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리고 스캇의 두 눈이 음험하게 한 번 빛난 뒤 상혁을 쳐다봤다.
눈빛을 받은 사만다조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걸 알아챈 건 상혁뿐이다.
속마음을 숨긴 상혁이 그의 손을 잡았다.
“백상혁입니다. 고먼 재단에서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만큼 맨해튼대학교와의 결연을 저희 재단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하.”
스캇은 여러 겹의 가면을 쓴 채 능숙하게 그게 제 얼굴인 것처럼 웃었다. 하지만 이미 스캇의 속을 꿰뚫어 본 상혁은 그 위선에 속이 느글거렸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 가면을 쓸 수 있는 건 상혁 역시 마찬가지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고먼. 이야기는 형님으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요.”
상혁이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로 스캇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상혁의 환대에 당황했으리라.
하지만 상혁은 진심으로 웃었다.
‘이게 웬 횡재람.’
제 발로 굴러들어온 호박인 스캇을 보며 상혁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방긋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