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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먹는 대마법사-171화 (170/249)

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171화

171. 횡재(1)

상혁이 뉴욕행 비행기에 탔다는 건 그가 출국 직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김태양과 일호가 나서서 모든 정보를 숨겼기 때문이다.

공항에서도 소수의 사람들 눈에만 띄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상혁이 지나다니는 길 도처에 정보원을 깔아 놓지 않은 다음에야 상혁이 미국행 비행기 올랐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이면 정수빈과 같은 비행기에 탄 거지?’

상혁은 볼을 긁적였다. 비행기가 가볍게 흔들리자 옆에 놓인 샴페인 잔이 부르르 떨렸다. 일등석은 모든 것이 좋았다. 승무원들의 친절함도, 좌석의 편안함도 좋았고 난기류가 별로 없이 쾌적한 비행인 것도 좋았다.

하지만 기내의 기류가 상혁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뉴욕행 비행기의 일등석에 탄 승객은 딱 세 명뿐이었다.

뭐 평소에는 비어 가는 경우가 많기에 세 명이 적은 수는 아니다. 일등석이라고 해 봤자 정원이 스무 명 내외였기에 고작 세 명은 지독한 적자 지출이었지만 말이다.

상혁이 계속해서 느껴지는 정수빈의 시선에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정수빈이 싱긋 웃었다.

“아뇨, 딱히요.”

“그런데 왜 계속 보시는 거죠?”

“신기해서요.”

“제가요?”

상혁은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정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여배우가 자신을 쳐다본다면 과연 어떨까.

상혁은 그런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직접 겪게 되자 깨달았다.

‘엄청 신경 쓰이네.’

더군다나 쳐다보지 말라고도 할 수 없는 게 저렇게 생글생글 웃으며 쳐다보는 정수빈에게 어떻게 쳐다보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는 말인가.

“수빈, 나랑 보던 거 안 보고 지금 어디 보는 거야.”

사만다가 딱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아니, 그냥 정수빈이 거슬린 것이다. 정수빈이 사만다를 보며 싱긋 웃었다.

“왜, 신경 쓰여, 사만다?”

“상혁 씨 귀찮게 하지 말라니까.”

“귀찮아하긴. 그래도 내가 대한민국 최고 미녀 배우 중 한 명인데. 안 그래요?”

저렇게 보면서 말하면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정수빈은 확실히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은 탓인지 자신의 미모와 위치로 상대가 거절할 수 없게끔 만드는 화술을 가지고 있었다.

‘가나안에 갔으면 웬만한 귀족 서넛은 휘어잡은 여장부가 되었겠는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여자다. 정수빈을 같은 여자가 가나안에 있었더라면 사교계를 휘어잡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끌려가는 건 상혁의 취향이 아니다.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사람한테는 더더욱.’

30대 중반인 정수빈이지만 상혁은 일흔이 넘었다. 겉모습이야 이래도 속은 구렁이 수백 마리를 품은 대마법사이니.

처음에야 일단 상대를 관찰하고 적절한 대처법을 찾느라 주도권을 저쪽에 넘겼지만 계속해서 정수빈이 주도권을 쥐게 할 생각은 없었다.

“글쎄요. 슬슬 귀찮아지려고 하는데요.”

상혁의 말투가 변하자 정수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미처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다. 아마 상혁이 스무 살이란 것만 듣고 이리저리 끌려다닐 줄 안 모양이다.

“원래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를 잘 섞지 않는 편인지라.”

상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이 재수가 없었지만 동시에 잘 어울리기도 했다.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SG그룹의 로열패밀리.

비록 최근 연달아 터진 악재로 SG그룹의 주가와 명성이 바닥을 치고 있었으나 지난 수십 년간 SG그룹이 쌓아 올린 아성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외부적인 악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의 악재였기에 백정연이 SG그룹의 총수직에 오른 후 그녀의 리더십 아래 혼란은 빠르게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저 여자도 안다.

‘야망이 많은 눈이니까.’

정수빈의 두 눈에는 야망이 가득했다. 더 위로 올라가고 말겠다는 의지. 그런 정수빈은 상혁과의 만남을 일종의 기회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간 보는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만다 씨를 계속해서 건드리는 건 그만두시죠.”

정수빈은 상혁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그녀가 상혁에게 사귀자고 저돌적으로 대시한 것도, 사만다를 은근히 툭툭 건드리는 것도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 차가우셔라.”

정수빈은 짐짓 상처받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뭇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였을 그런 얼굴이다. 하지만 상혁은 뭇 남성이 아니다.

“내가 조사하라고 시키면 당신의 비밀들까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상혁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그러나 정수빈을 보며 당황했던 지난번의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상혁의 눈에 정수빈은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다.

“내가 그런 걸 알아내길 바랍니까. 아니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상혁은 두 눈에 까불지 말라는 빛을 실어 경고했다. 그리고 정수빈은 그것을 알아들었다. 그러자 정수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백상혁 이사장님.”

“수빈?”

사만다의 눈이 커졌다. 정수빈이 무례할 정도로 상혁에게 호감 표시를 하는 모습을 보며 은근히 마음을 졸였던 사만다다.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나 싶기도 했을 정도로 정수빈은 사만다가 그간 보아 온 그녀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혁의 한마디에 정수빈이 원래 사만다가 알던 그 정수빈으로 돌아오자 사만다는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상혁은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정수빈을 쳐다봤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정수빈도 상혁이 그냥 스무 살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마당에 말이다.

‘그래도 눈치는 빠르군. 자존심도 없고.’

자존심이 없고 눈치가 빠르다는 건 사익과 성공을 위해 무슨 것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수빈이 상혁에게 접촉한 이유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만나 뵐 줄은 저도 몰랐어요. 그건 믿어 주세요. 스케줄이 겹쳤거든요. 그래서 운명이라고 말한 것이기도 하구요.”

정수빈은 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했다. 그러나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을 뿐이다.

“상혁. 대체 지금…….”

“사만다, 당신의 친구가 곤경에 빠진 모양이네요. 그래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구요.”

“수빈, 진짜야?”

“…… 저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요.”

정수빈은 사만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상혁을 보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칸느에서 처음 만났어요. 미국에서 유명한 제작사를 소유한 투자자더군요. 그런데 그가 내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소유한 제작사에서 필모그래피가 좋은 배우를 찾는데, 내가 적임이라고 하더군요.”

정수빈의 이야기는 진부했다. 그녀는 더 큰 성공과 명예를 원했다. 최고라 불리는 칸느까지 진출했지만 자신이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인 것에 한계를 느낀 것이다.

자신의 연기에 확신이 있었고 자신의 재능에도 자신 있었지만 한국인이란 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이 밤을 보냈어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갈등하기 시작한 순간 그녀는 을이 된다. 그 때문에 그녀는 갑인 그 투자자에게 대가를 지불했다.

“그랬더니 그날 이후로 날 마치 도구처럼 부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더 비참한 건 뭔지 알아요?”

정수빈은 삼십 대 여배우 중 독보적인 이미지와 연기력을 보유한 선망의 대상이다. 그녀 나이대의 여배우들 중 상당수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별다른 연애 스캔들도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가 조금씩, 내가 떠나지 못하게 콩고물을 조금씩 떨어뜨린다는 거예요. 그에 중독되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도록.”

“수빈…….”

“사만다, 너도 알겠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진짜 사랑은 없다는 걸. 그래서 난 진정한 사랑 대신 성공을 바랐을 뿐이야. 하지만.”

그건 수렁이었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성공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다. 정수빈은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녀가 살아온 배우 커리어 전체를 부정해 버렸다.

“난 바닥부터 올라왔어요. 대학로 연극 무대부터 단역, 조연, 주·조연에서 주연까지. 순전히 내 실력으로 올라왔어요. 그런데 그걸 잠시 잊었어요. 아마 할리우드라는 이름에 너무 취해 있었던 모양이죠.”

정수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사만다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심통이 났어. 둘 사이가 연인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백상혁 씨의 눈에는 욕망이 보이지 않았거든. 아마 널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준 거겠지.”

정수빈이 사만다 앞에서 보란 듯 그리 행동했던 건 질투 때문이다. 아마 자신에게는 오지 않은 행운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리라.

“그 투자자와 연락을 끊으면 되지 않습니까.”

상혁이 정수빈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게 싫다면 그녀의 손으로 맺은 걸 잘라 냈으면 된다. 하지만 정수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간단하지 않아요. 콩고물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 확실히 돈도 많고 인맥도 많거든요. 아마 그 사람 한마디면 내가 맺은 모든 계약이 취소될 거예요.”

“돈 때문입니까?”

정수빈은 한국에서도 작품 한 편에 출연료로 10억 넘게 받는 톱티어의 여배우다. 하지만 상혁의 말에 그녀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사업 실패를 겪었어요. 100억 정도의 적자를 내고 파산했는데 투자자들의 돈까지 빌려 재기하다가 다시 실패했거든요. 그래서 그 빚을 내가 갚고 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맺은 계약까지 파기된다면 그녀가 갚을 위약금은 100억 수준이 아닐 것이다. 소송의 천국인 미국이라면 아마 정수빈에게 수백억 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거는 기업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성공에 대한 갈망과 가족의 부채 문제.

그것이 그녀를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상혁은 여전히 그녀를 도와줄 명분을 찾지 못했다.

그때 사만다가 말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건 수빈의 선택이었어. 그걸 해결하지 못한 건 네 잘못이잖아.”

사만다가 상혁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었다. 정수빈은 더욱더 쓰게 웃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한 잘못을 남에게 대신 고쳐달라 부탁하고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사만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정수빈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상혁을 보며 말했다.

“내가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내가 직접 봤거든요. 그 사람이 살인하는걸.”

“뭐?”

사만다의 눈이 커졌다. 갑작스럽게 장르가 호러로 바뀌자 당혹스러운 건 상혁도 마찬가지다.

“살인?”

“우연이었어. 그 남자가 날 불렀는데 내가 스케줄이 일찍 끝나서 하루 일찍 도착한 적이 있었거든. 그런데.”

정수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그날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달빛이 폭포수처럼 통유리를 통해 쏟아지던 어느 날 밤, 불을 켜지 않아도 달빛이 형광등처럼 환한 밤에 그녀는 그가 하얀 침대보 위를 피로 흠뻑 적신 채 한 여자의 목을 조르는 것을 보았다.

버둥거리는 다리, 희열에 찬 그 남자의 얼굴, 그리고 이내 잠잠해지면 경련을 부르르 일으킨 발가락.

“다음 날 그곳에 가니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난 꿈을 꾸지 않았거든요.”

“그게 가능해? 경찰은? 경찰은 뭘 하고?”

정수빈은 사만다의 질문에 쓰게 웃었다.

“사만다, 너도 미국에서 활동했으니 알지 않아? 미국에는 돈과 권력만 있다면 공권력도 건드릴 수 없는 이들이 있다는걸.”

상혁의 눈빛에 흥미가 섞였다. 정수빈이 말한 언터쳐블들은 원탁과 프리메이슨이기 때문이다.

“그 투자자가 누굽니까?”

“스캇 고먼이라는 사람이에요.”

정수빈이 말한 이름에 상혁이 입꼬리를 씩 끌어 올리고 웃었다. 마침 볼일이 있었는데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스캇 고먼.

백도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고 더 나아가서는 원탁의 가문 중 한 곳으로 제피렐리 가문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가문이다.

어떻게 만날까 고민했는데, 그 고민의 키가 눈앞에 있었다.

“우리, 운명이라고 했죠?”

상혁이 정수빈을 보며 말했다. 정수빈의 말이 맞았다. 어쩌면 이건 운명일지도 모른다. 정수빈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온 셈이니 말이다.

“틀렸습니다. 우리가 운명이 아니라 당신이 운명을 만난 겁니다.”

상혁이 정수빈에게 말했다.

“당신의 운명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테니까요.”

상혁을 응시하는 정수빈의 두 눈에 미약한 희망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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